한 평만큼의 세상 06
도시는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머무를 수 있는 곳이다. 대개는 그렇다.
나같이 이방인이면서 그냥 스치는 객인 경우라도 대체로 그 앞에 문턱이 드리워지고 나를 막아서는 곳은 없는 것 같다. 있다면 언어의 문제로 인해 생기는 것들이고 멋모르고 애초에 출입이 안 되는 곳을 들어가려고 시도했을 때이다. 열려있음에도 언어의 문제로 인해 나 스스로 차단해버릴 때도 있다. 낯선 도시에서 이방인이 객으로서 맞닥뜨리는 일상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근대 이전의 도시를 생각하면 지금의 도시는 비교적 많은 것들이 개방적인 것 같기는 하다. 달리 생각하면 도시의 정의가 바뀌었다고 하는 게 더 현실에 맞는 얘기일 수 있다. 옛날에는 도시라 하면 이랬었고, 지금은 도시가 이런 것이다 하는 식이다.
나, 그리고 우리에게 심리적 방어기제 역할을 하는 것은 언어 말고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문화적인 것도 그에 못지않은 것 같다. 태생적으로 내 몸과 의식에 장착된 문화적인 배경 또는 습성 같은 것이 장소를 선호하는 것에 분명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다. 도시의 여러 장소를 출입하는 데 있어 문화가 무언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니, 여기서 말하는 문화는 조금 정리가 필요해 보인다. 엄밀히 말하면 내게 응집된 습관과 시각과 이해력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극히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이것은 모두 각자가 지니고 있으면서 언제든지 몸 밖으로 표출될 만큼 일상적이고 보편화된 것으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문화가 개인화로 번안된 것이라고 하면 맞는 표현이 될지 모르겠다. W. 벤야민이 도시가 일종의 문화적 무의식이 표현되는 공간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처럼, 내가 머물거나 지나치는 곳에서 언제든 일어나는 일들이다. 이런 도시에서 나를 증명하지 않고도 머물려고 할 때 언어와 문화는 한 번 즈음 의식하게 되는 것들이고 그것들로 인해 내가 서있는 곳이 어디며 내가 당장 무얼 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다.
도시에는 수많은 지시어들이 있다.
표지판처럼 직설적인 것들도 있고 건물의 형태와 양식이 메시지가 되는 간접적인 것들도 있다. 조금 더 모호한 단계로 들어가서 생각해 보면, 장소가 풍기는 분위기가 무언가를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경우도 있다. 길을 가다 웅장한 건물을 만나면 어느 쪽으로 열려 있는지 어느 쪽으로는 가면 안 되는지 살피게 된다. 건물의 크기와 형태가 1차적인 메시지로 작용하고 그걸 떠받치고 있는 장소는 2차적인 메시지가 되어 하나의 전체 분위기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은연중에 물리적인 지시와 통제를 받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움직이는 나를 발견한다.
이 즈음에서 ‘간주관적 間主觀的’이라는 말을 떠올려보았다. 한창 건축을 공부하던 시절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관한 얘기가 오갈 때 언급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의미를 다시 정확히 짚어보면 주관적인 경험이나 생각이 상호, 또는 다자간에 공감대를 형성하는 경우를 말한다. 그래서 '상호 주관적 相互主觀的'이라고도 한다. 이게 떠오른 이유는 어떤 장소 가운데 ‘나’라는 존재가 편입되는 경우, 또는 장소와 내가 팽팽히 맞서 긴장 상태가 되는 경우,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여러 갈래의 경험이 때로는 극도의 개인적인 것이었다가, 때로는 공감이 되는 주관적 상태이었다가 하는 다양한 변화를 반복하는 것을 은연중 느낄 때가 있기 때문이다. 간주관적 성격이라는 것이 상호 주고받는 생각이나 의식, 가치 같은 것에서 생겨나지만, 그것이 장소가 될 때 성격이 더 잘 드러나는 것 같다.
언어와 문화, 지시어 같은 것들이 경계로 작용하더라도 장소와 공감하고 연대하는 순간 그 어떤 경계도 무색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이런 일들은 무대가 어떠한 것들이 연출되더라도 받아줄 수 있는 중성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처럼 도시 속의 장소들 또한 언제든지 우리가 그곳을 점유할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음을 말해준다. 언어, 문화, 지시어들, 이런 것들이 나를 가로막고 부담으로 다가오더라도 내가 갖고 있는 경험과 이해로 장소를 이해하고 가치를 발견한다면 그것이 곧 나만의 고유한 것이 되거나, 장소와 공감하는 것이 생길 수 있는 것 같다. 이것이 곧 장소에 대한 간주관적인 이해 또는 접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더욱이 복수의 장소를 가로지르는 여행은 짧은 시간에 옮겨 다니는 탓에 그 많은 장소 가운데 하나에서 교감과 공감이 일어나는 것은 나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이 기습적으로 그 위에 포개어질 때 생겨난다. 태어나고 처음 찾는 장소에서 개인적인 것이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명확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다만, 장소가 그 안에 누적되어온 것들과 생소한 것들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면 개인적인 것이 거기에 더해지고 스며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누적된 것과 생소한 것이 상존하는 것 자체가 그 사이에서 틈이 어떤 식으로든 존재하고 있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에는 머무르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머무를 권리를 증명하도록 요구하는 장소가 있다. 마르크 오제는 그걸 '비장소'라고 불렀다. 그것이 담고 있는 표현과 의미를 가져와서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를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도시들은 예외를 찾기가 힘들 정도로 장소와 비장소로 채워져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둘을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사람들의 숱한 행위들이 그곳들을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움직임, 행위, 상호작용하는 것들이 우리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장소와 비장소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어 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거나 리뉴얼되었을 때, 도로가 새로 나거나 공공의 장소가 리뉴얼되었을 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전적으로 그것만이 충분한 조건이 되지는 못한다. 사람이 들어오고 나가고 머물고 하는 것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움직이고 사람들로 채워지는 것이 여러 부수적인 조건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고 상대적인 것 같지만, 장소가 생명력을 유지하는 데는 결국 사람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빠져나가면 건물도 비어가기 시작하고 도로가 한산해지고,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건물이 채워지고 도로가 붐빈다. 당연한 얘기다. 잠시 한때의 경우라고만 볼 수는 없다. 수년을 걸쳐 볼 때 사람들의 움직임은 도시에서 절대적인 것이다.
언덕 위 성당 문을 나섰을 때 처음엔 마임 퍼포먼스라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단순히 시선을 빼앗는 정도의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최선의 보답은 동전과 지폐이고, 그다음은 나의 시선이다. 관객으로서 시청 지속시간을 최대한 유지해주는 것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게 곧 새로운 관객을 불러오니까. 그래서 아낌없이 보고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공연을 하고 있는 사람과 바라보는 나는 어느새 한 공간으로 묶여 있음을 느낀다. 공간 또는 장소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람이라고 한 것이 이런 경우 더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조금 더 구체적이고 결정적인 것이 되려면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지고 연출되는 것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이처럼 무대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을 일상 속으로 옮겨오면 더욱 그렇다.
도시에서 어떤 행위가 낭만적이라고 느끼는 것은 더 이상 그 도시에서 그 행위를 찾아볼 수 없을 때이다. 장소를 오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로 지워졌던 과거의 행위를 재현하는 것으로 낭만과 향수를 끌어내기도 하는 것 같다. 내 주변은 경계를 지켜내려는 힘이 여전히 살아 팽팽히 버티고 있지만, 나의 평범한 행위로도 언제든 나뉘고 구분되었던 것들을 무색게 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덤으로 묻혔던 것들을 불러낼 수 있다는 것은 장소를 점유하고자 하는 욕구에 대한 일종의 포만감과 공복감 같은 것을 내가 원할 때 원하는 만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도시에서 나를 증명하지 않고도 머물 수 있는 곳이 예전보다는 늘어나는 것 같다고 느끼고 있다면, 일상에 이런 배경이 있는 것도 한몫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살아간다는 것은 시계의 문자판에서 시침과 분침과 초침이 만들어내는 시간의 시각화에 견줄만한 것 같다. 무대와도 같은 문자판 위에서 다양한 몸짓과 춤사위 같은 에너지가 한 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은 우리들의 모습이다. 무수한 경우들이 생산되는 현장이다. 도시는 더욱 그렇다. 그런 것들이 고스란히 삶이고 일상이 되어 버린다는 건 무대 위를 살아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도시는 나의 무대’라고 하는 것은 해변의 모래알 같은 것이다. 각자의 얘기이면서 모두의 얘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