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만큼의 세상 05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언제 어느 때에 사용하는가에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들린다. 우리가 그렇게 사용해 왔으니까.
근데 도시가 그렇다.
도시는 길게 보면 유유상종을 보는 가장 대표적인 결과물이고, 가장 큰 결과물이며, 가장 오랜 결과물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인류사를 통해 이루어진 결실이다. 오랜 시간 걸쳐 누가 말한 것도 아니고 강제한 것도 아닌데 비슷한 사람들이 모였다는 사실이 그렇다. 이 자체만으로도 경이롭다는 생각을 했다. 바벨탑을 쌓으며 모였던 이들이 흩어졌지만, 그 흩어졌던 순간을 보면 언어가 다르게 되어 소통이 안 되는 일이 발생하고 그 언어를 따라가면서 나뉘었다고 한다. 유유상종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유유상종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도시에서 유사성이라는 것이 도시를 만드는 기원이었는지 도시가 만드는 결과였는지 나 같은 사람이 얘기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사이의 시간에는 유사성을 간직하면서 꽤 오랫동안 함께 했다는 것이다.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비슷한 형식으로 모여 살았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음에도 그 또한 비슷한 형식으로 모여 살았다. 도시가 그렇다. 도시에는 그럴 수 있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서로가 달랐더라도 그 속에 있으면 비슷한 형식을 가지려고 한다. 당장 몸에 붙은 언어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하물며 몸 주변, 생활 주변을 채우는 다양한 것들 또한 그렇게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 같다. 장소가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요구하는 규범 같은 것이 있다고 해야 할까.
시간이 좀 지나니 도시에는 침(鍼)과 같은 것도 허용된다. 허용된 것인지 강요받은 것인지 사실 알 수는 없다. 다만 여차여차한 과정을 통해 생겨난 것이 있는데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어떠했나 하는 것에 생각이 닿았다. 거부감도 있고 불편함도 있지만 그것이 삽입되는 순간부터는 지금까지 없었던 신진대사 같은 것이 그곳에서, 그 주변에서, 더 나아가 도시에서 일어난다. 이런 류의 신진대사는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그것과는 달리 금세 확인되는 것은 아니니 시간이 필요하다. 한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감지하지 못할 만큼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다.
도시에 침이 생긴다는 것은 다른 종으로서 그 속에 있거나, 다른 형식으로서 그 속에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모이면 서로 달랐더라도 사는 모양, 형식 같은 것은 조금씩 변화하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면 비슷하게 모습을 갖추기도 하는데, 도시의 침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시간이 흘러도 다른 종이고, 긴 시간을 지켜보아도 형식은 바뀌지 않는다. 지속 가능하기 위해 주변과 주고받는 신진대사 같은 것이 과연 일어날 수 있기는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나그네가 되었다. 그 시선으로 에펠탑을 보았다. 처음 쌓아 올라갈 때 뜬금없다 했을 그 쇳덩이들의 조합이 오랜 시간 이방인의 물건처럼 어떤 것과도 관계하지 않고도 유유히 그리고 오롯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도시 한가운데 마치 중성적인 기계장치와 같은 것이 자리를 트고 앉았는데 도시가 가지고 있던 이전 것들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으니 그것이 도시 속에서 의미를 부여받고 무언가 일을 해대기 시작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을 것 같다.
지나는 나그네가 보는 것과 오래된 이방인이 보는 것과 토착화된 거주자가 보는 것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신진대사 같은 것이 일어나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나그네에게는 그 시간이 허용되지 않는다. 태생적으로 토착화된 거주자가 되기는 쉽지 않으니 오래된 이방인으로 살아보는 것이 허락된다면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현실은 나그네.
나그네는 도드라지고 뜬금없고 명징함을 지닌 그것이 시각적인 자극으로 남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그래서 생각해보았는데 나그네는 도시 이곳저곳, 또 이 도시 저 도시 돌아다니면서 시각적인 자극에 일단 눈길을 주기가 쉽다. 한편으로는 그것에 균형을 좀 잡아보려고 도시의 뒷골목을 뒤져보고 사전에 가용한 정보를 통해 장소를 찾아가 보기도 하고 일정에 없던 곳을 발길 닿는 대로 찾기도 한다. 그러면서 아주 우연히 도시 속에 오랜 시간 일어나고 있었던 신진대사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건 사전에 정보를 얻기 위해 찾았던 사진들이나, 친구들이 공유해준 사진과 영상 속에서나 심지어 구글 로드뷰 같은 곳에서는 알아챌 수 없는 것들일 가능성이 크다.
나그네가 도시의 침이 만들어 내는 변화를 조금이라도 찾아볼 수 있을까 생각한다면, 이 역시 도시가 상징하는 것 이면의 것을 사전에 충분히 찾아보고 가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정보를 얻는 것에 공을 들이는 만큼 효과가 발휘되는 세상이니까. 이것만으로도 우린 분명 행복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여행은 공부를 하고 간 만큼 얻는 것이 크다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앞서 얘기한 대로 가급적 일정에 없던 곳을 발길 닿는 대로 다니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여기까지는 나그네가 본능적으로 그의 여정에 균형을 잡으려고 하는 것들이다.
근데 좀 더 나아가 길을 잃어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일부로라도 그렇게 한다면 우연한 것들과 마주할 수 있는 확률은 높아진다. 우연한 것들이라고 하지만 그건 이미 오랜 시간 준비된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관계하는 것이 그곳에서 오랫동안 일어나고 있었다. 내가 길을 잃는 것은 그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마주하는 것은 건축가도 도시 행정가도 도시 문헌학자도 전문 가이드도 얘기할 수 없는 것일 수 있다. 왜냐면 그건 자신의 것이니까.
자신이 느끼는 그것들은 결국 자신 안에서 소통된다. 그러니 도시는 천 개의 고원이고 천 개의 평원과도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각자의 장소가 존재한다. 지나는 나그네, 오래된 이방인, 토착화된 거주자 모두 자신의 도시를 마음에 담아 가고, 담아 놓고 살아간다. 언덕 위에 올라 내가 본 파리와 에펠탑도 그랬다. 정물화 같은 한 장의 사진 속 그것들이 꿈틀대고 있었다. 하늘이 흐렸던 그날 지붕 너머 수많은 지붕들 그리고 도시의 침이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