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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스 May 15. 2022

0.004  모든 아침은 공평하다   

한 평만큼의 세상 04  


살아가면서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 자동으로 설치되는 애플리케이션이 있다. 설정해놓은 환경에 따라 때를 맞춰 푸시 알림을 해준다. 매일 찾아오는 아침 얘기다.  


태어나는 시간이 다르니 약간의 시차만 인정한다면 곧 아침은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오전 11시에 태어나는 아이는 저녁을 지나 하룻밤을 보내면서 세상에는 밤과 낮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아침을 맞는다. 오전 6시에 태어나는 아이는 곧 밝아오는 아침에 세상이 나를 환대하는구나라고 느낄 수도 있다. 새벽 1시에 태어나는 아이는 세상이 깊은 침묵과 같다는 걸 오랜 시간 느낀 후에야 아침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정도의 시차를 인정해줄 수 있다면 살아가는 동안 아침은 등분포로 찾아온다.


죽을 때도 마찬가지다. 오전 11시에 죽는 이는 아침에 보았던 해가 함께 하늘로 올라가 주는 걸 보게 될 것이다. 오전 6시에 죽는 이는 여명으로 시작되는 아침으로 인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 생각할 것이다. 새벽 1시에 죽는 이는 깊은 어둠으로 들어가면서 어제의 아침을 마지막으로 기억할 것이다. 이런 정도의 시차도 용납된다면 살아오면서 쌓아온 아침은 모두에게 등가로 채워진 것이 된다.  


아침이 공평하게 주어진다고 하는 것은 양과 질을 따져본 것이 아니다. 살아가는 시간 속에 균등하게 분포되어 찾아와 주는 것에 더 가깝다. 이게 참 묘하지 않는가 싶다. 노랑 고무줄을 늘이면 어느 한쪽에만 모여 있지 않고 그 팽팽한 것을 나누어 갖는 것과 같다. 짧게 살다 가던 아주 많이 길게 살다 가던 마찬가지다. 정확히 정비례로 채워져 간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이런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경이롭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빼곡히 채워졌음에도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여할 수도 누군가에게 팔 수도 없다. 평생 계약된 자동차 리스 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구독 경제의 원조라고 해야 할까. 트렌드에 맞춰 옷을 보내주고 책을 보내주고 아티클이나 칼럼을 읽게 해 주고 로스팅한 커피빈을 보내주는 것처럼 정해진 기간에 내가 관리하지 않고도 시간이 되면 채워지는 것들을 생각나게 한다.


이런 구독을 통해 제공받는 서비스는 아마도 처음 한두 번은 나에 대한 정보와 취향, 사는 환경, 일상의 패턴에 관계되는 것들의 정보를 등록하는 수고는 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나면 꾸준히 관리를 받는다.


아침은 어떤가. 같은 아침이라 해도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아침이 되는 것은 개인의 취향과 마음의 상태가 아침이라는 현상에 투영되면서 나오는 것을 맞이 하기 때문이다. 구독 서비스처럼 뭔가 기계적인 설정을 해야 할 것은 아니지만, 개인의 심상에 설정해둔 수많은 정보들에 의해 걸러진 것은 극히 개인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아침은 평생 각자의 심상이 설정해둔 방식대로 배달된다. 그것도 새벽 배송으로 매일.   


소유할 수도 없지만 하루를 넘겨 잠시 보관할 수도 없다. 출애굽에서 광야에 있던 사람들에게 만나(Manna)는 그날 하루치만 주어졌던 것처럼 아침은 그날의 분량이다. 많은 양의 만나를 걷어서 다음날 먹으려고 남겨두면 모두 썩어버렸던 것처럼 아침은 그날의 분량으로 주어진다. 창조주가 만나를 먹였던 시절을 기억하기를 바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찌감치 인간은 그날의 일용할 아침이라는 걸 감지해야 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깊게 심호흡을 해댄다. 오늘의 아침이고 나의 아침이라는 걸 무의식적으로 감지한 것 마냥 자신의 오감을 통해 투영되는 모든 유기물과 무기물의 감각을 한껏 들이킨다.


하지만 그 아침은 똑같은 무게와 내용으로 주어지지 못할 때가 있다. 지구 한쪽에서는 한밤의 포격 속에 잿더미가 되어버린 도시에서 아침을 맞아야 한다. 지속되는 긴장과 두려움을 고스란히 이어받아야 하는 아침이다. 마치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아침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기습적으로 폐허 속 괴리된 장소 여기저기를 훑고는 빠져나간다. 맑은 물 위를 떠다니는 기름처럼 자리를 찾지 못해 밀려나는 모양으로 비춰지는 것이 싫어 태연히 의지를 다해 도시를 두텁게 꽉 채웠다가 황급히 빠져나가는 아침을 누구도 불러 세우는 이가 없다.  


똑같이 주어지지 않지만 여기에 불만을 달아놓을 수가 없다. 왜 내겐 이런 아침인가라고 묻기를 시도하다가도 이내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은 것을 본다. 불만이나 불쾌해할 틈을 주지 않는다. 어떤 경우라도 주저함 없이 같은 시각에 아침은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렇게 와서는 차분히 리셋시켜준다.


그래서 아침은 3가지를 지니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반복의 힘. 짧은 주기. 어쨌든 어제와 다른 것


한 사람의 인생은 죽는 날까지 12월을 향해 치닫는 것을 반복한다. 그렇게 반복하는 것을 쪼개어보면 그 속엔 무한반복으로 장착된 아침이 있다. 마치 끊임없이 돌아가는 널찍한 컨베이어 벨트 같다. 언제든지 나를 올려놓기만 하면 내 상태가 어떻든 돌아간다. 내가 멈춰 있어도 돌아가니 그 자체가 굉장한 에너지다. 나를 견인해 나가는 것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어떤 일을 계획한 것이 작심삼일이 된다면, 3일에  번씩 계획을 짜면 된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작심삼일로 끝날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아침은 그보다 짧은 주기로 다시 시작하게  준다. 매일 플래너를 쓰는 사람이라면 하루를 작심일일로 끝나지 않게 하는 사람이다. 설사 그렇게 끝났을지언정 하루와 하루의 간극을 쪼여주는 일을  테고 그것이 인생 전체를 가질  있다는 확신이 강한 사람일 테다.


나이가 들면서 하룻밤 단잠과 이어지는 아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고통이라고 할 만큼 일들이 가중되어도 아침엔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나이가 들 수록 이걸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허무와 낙심, 좌절이 번번이 넘어뜨려도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이 아침이 갖는 힘이다. 어쨌든 어제와 다른 것을 항상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똑같이 주어지지 않은 경우를 감안하더라도 우리가 모든 아침은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반복해서 짧은 주기로 어제와 다른 아침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걸 상쇄시키고도 남을 만하다.   


장소가 바뀌어도 문제 되는 게 없다. 성탄의 아침에 파리를 걸었던 일도 그랬다. 모든 것이 잠시 치환되었을 뿐, 아침은 언제나 그 아침이었다. 최근 구글의 플러스 코드(Plus Codes)나 페이스북의 로보코드(Robocodes)가 세상의 모든 지점을 주소화하면서 내가 사막 한가운데 있어도 배송이 가능하도록 한 것처럼 내가 다른 곳으로 장소를 바꿔 다녀도 아침은 배송된다. 내겐 낯선 곳이지만, 나의 심상이 설정해둔 대로 나만을 위한 아침이 배달된다. 파리에 거주하는 사람들, 몽마르트르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아침이다. 아침은 정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진심이다.


성탄절 아침 몽마르트르 언덕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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