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폴스 May 16. 2023

걸으면 보이는 것들 03




먼지 낀 하늘에 구름이 깊은 어둠을 가져와도

신호는 때가 되면 초록불빛을 내보낸다.


차량에 보내는 초록불빛은 낯설다.

그냥 불빛이 아니라 차량 모양을 하고 있음에도 내가 주목하고 있는 것에 낯설다.  

차로를 가로질러 보았던 보행신호에 익숙해서인지, 초록불빛은 항상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초록은 선하고 안전한 것이고 내가 거기에 반응하면 되는 거라는 고정된 생각이 강해서인지..  


‘저게 왜 초록불이지?..’ 하며 잠시 의아해했다.




바위에 온통 이끼가 감싸고 있어도 그걸 두고 이끼 덩어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반대로 무엇에 둘러싸여 있는지 자각할 수 있는 존재라면

그리고 무엇으로 둘러싸일지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면

바위도 건물도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아닐 것이다.

존재의 부재가 오히려 현존재를 만들어내는 것들인데

따지고 보면 세상의 많은 것들, 대다수의 것들이 이렇게 유지되고 있는 것 같다.  




성문 밖으로 뭔가 알려야 하는 깃발들이 그랬던 것처럼


도시한옥이 숙명적으로 작은 키를 가진 데다 가게는 처마 깊숙이 물러나 있으니

간판은 깃대의 깃발처럼 조금이라도 높이 매달려야 했다.

나름 높게 올라갔는데, 도심 한복판에서는 애교의 손짓 같다.

머지않은 곳에 종탑과 빌딩 옥탑이 서있으니 더 그럴 수밖에 없다.

당장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담쟁이들 앞에서 좌절을 맛봐야 한다.

하지만 가게 주인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결국 길을 오가는 사람들 눈에 띄면 그만일 테니.




자질구레한 일들이 산만하게 나를 또는 내 주변을 귀찮게 하는 것이 인생이지..라고 하면

너무 박한 건가. 살아가는 걸 그렇게 비유한다면 말이다.

계단을 주욱 펼쳐놓았지만  

곳곳에 굴곡과 그림자가 넓게 펼쳐져 있는 건 삶터와 많이 닮았다.

1미터 올라가고 내려가기 위해 필요한 계단과 경사로가 넓게 차지하면 편하긴 하지만 효율이 떨어질 수 있고 좁게 차지하면 힘들긴 하지만 효율이 좋아진다.    

이런 식의 평가에서는 당연히 효율이 좋은 쪽이 선택받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평가가 아니라 개인 경험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그 선택은 모두 달라질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넓게 차지하는 이 단단들과 경사로를 오르내릴 때 좋은 점은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한다는 거다.

살아가는 동안도 그렇지 않을까. 그 정도의 굴곡만 있다면.. 그럴 수 있기를 바라본다.




가린다는 것과 숨는다는 것은 다른 건가?

가린다는 건 사물을 움직이는 거고 숨는다는 건 사람이 움직이는 것 정도의 차이만 있고 목적은 같지 않나?..


남으로 창을 내려했지만 공공주차장이 넓게 자리하고 있어 가려야 했고  

숨는 게 필요했을 것이다.  

사적인 곳과 공적인 곳이 바로 만날 때는 긴장할 수밖에 없다.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막아서는 건물이 없으니 종일 햇빛과 조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니 가리고 숨는 게 해결되고 나면 이제,

도시를 슬쩍 훔쳐보는 게 가능해진다.  




내리쬐는 해는 땅에 직접 닿을 만한 곳을 찾기가 어렵다. 도시에서는 그렇다.     

빼곡히 자리 잡은 건물들이 틈을 보여주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해가 길게 땅에 닿는 일은 드물지만 서쪽으로 길을 깊이 낸 동네를 찾으면 잠시나마 볼 수는 있다.   


서쪽으로 길을 깊게 낸다는 건 동쪽으로도 길이 깊게 나있다는 얘기가 된다.

아침과 저녁, 하루 두 번 해가 잠시 낮게 위치했을 시각 길 위에 서면

내 그림자만큼만 해는 땅에 닿지 못한다.  


나를 맞이하거나 나를 등지거나, 내가 맞이하거나 내가 등지거나  

그만큼의 해는 내 몸에 딱 붙어버린다.




동네 깊숙이 막다른 골목까지 평평한 길을 가다가 바로 산을 만날 수 있는 동네는 드물다.  

한국의 지형에서 도시는 높고 낮은 산을 갖기 마련인데,

산을 만나는 곳은 산에 닿기 전에 경사가 만들어지고 경사가 허용되는 곳까지 빼곡히 집과 건물이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여긴 이상하게도 저 깊숙한 곳까지 그런 경사를 찾아볼 수가 없다.

동네가 궁의 담장에 빠작 붙어 따라가며 마을을 이루고 있는데,

이유는 거기에 있는 것 같다.

궁의 택지가 평지를 고려한 것일 테고 거기에 가까이 붙은 마을은 그런 택지의 지형을 그대로 받았을 것이다.


소박한 동네, 집들인데 지형에는 궁의 흔적이 스며있다.  




마당 한쪽, 길과 만나는 곳은 작은 노력을 더해 무언가 만들어 보고 효과를 얻고 싶은 곳이다.  

간혹 담장 너머 붙어 있는 옆집의 나무나 담장 그 자체, 건물 그 자체가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다. 오늘은 소박한 지붕 박공과 담쟁이가 그랬다.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옆에 있는 것에 큰 도움이 되는 것들..

모든 경우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도시가 자연보다 좋은 것 가운데 하나가 이런 것이다.


연접한 것들이 주고받는 것들..  




평일이든 주말이든 시속 30km 이하의 속도를 요구한다.

넓은 길이고 인적이 적은 길이다.

길을 따라 나가서 큰길을 한 번만 건너면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매력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도심의 에너지 넘치는 거리를 지척에 두고도

조용히 다닐 수 있다는 건 참 드문 축복이다.


오랜만에 찾은 날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건물로 채워야 할 터인데 텃밭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작은 곳에 두 군데가 그랬다. 골목 옆과 골목 끝이다.  

비싼 도심의 땅에서 무엇이든 채워서 수익이라는 열매를 따야 하는데,

이 땅들은 그냥 열매를 따기로 했다.

순전히 땅에서 올라오는 열매..  


도심의 빈 땅은 으레 콘크리트와 유리 벽으로 채워진다. 여기도 그런 날이 오겠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걸으면 보이는 것들 0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