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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 May 27. 2022

분노라는 파도에서 서핑하기

시류에 몸을 맡기기 (2/2)


(‘시류에 몸을 맡기기 1/2’ 편과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일단 어렸을 적 학대가 왜 분노로 남는가? 고찰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당연하게도 그 어떤 부모도 자식을 완벽히 만족시킬 수 없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람이 일관되기는 매우 힘들고, 그 과정에서 몇 번은 반드시 머리끝까지 화가 날 것이다. 그로 인해 체벌을 할 수도 있고, 상처가 되는 말을 할 수도 있다. 게다가 사회에 만연한, 아니, 만연했었던 유교사상으로 인해서 체벌에 굉장히 관대했었던 분위기였음에도 어째서 나의 경험은 ‘학대’로, 타인의 경험은 ‘부모님의 사랑’으로 각인이 되는가. 그것을 판가름할 수 있는 기준이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피 양육자를 이해시킬 수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닐까 한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을 때에 내 부모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느냐. 당연하게도 납득과 이해는 달라서, 왜 그랬는지 어렴풋이 알 수는 있더라도 ‘그래도 인간에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냐’는 반박이 속에서 나올 때부터는 학대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이렇게 호기롭게 내뱉기는 했으나, 나는 이런 복합적인 문제에서 하나의 이유를 자신 있게 꼽는 것을 굉장히 꺼린다. 나의 가장 깊은 상처와 가치관을 남들에게 대놓고 전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글이 어려운 것과 자신의 인생을 드러내는 데 드는 창피함은 같은 궤도에 있을까?




어떻게 열셋, 넷, 지금의 내 삶의 반절을 뚝 분지른 나이의 아이에게 그럴 수 있었는가. 부모와 단절되어 평온한 삶을 이겨내는 중인 내게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불을 지르는 말이다. 그리고 불길은 흔적을 남기기에, 지독한 분노의 시간 후엔 두려움이 불쑥 찾아오고는 한다. 나의 부모도 이겨내지 못한 가정환경이라는 게, 대물림, 굴레, 이런 말들로 내 인생에 엮일 것만 같아서.


내가 이렇게 자신해놓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도 이를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는 사람일까 두렵다. 증명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이런 문제에서 공연한 걱정은 나를 깎아먹을 뿐이라는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원초적인 분노는 나를 쉬이 떠나 주지 않는다.


그래도 내가 필사의 노력을 해보는 것은 이에 나를 내던지고 싶지 않아서. 무책임한 분노조차 나의 부모를 답습하는 것일까 두려우니까.


이 두려움에서 도망가는 데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분노의 이름을 찾기’인 것 같다. 이게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누군가의 상처가 되지 않게끔 물길을 내어 피해를 최소화하기. 문제의 원인과 해결방법을 찾는, 찾고자 노력이라도 해보는 것만큼 근본적인 해결책을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먼저 날 분석해보려고 한다. 내가 왜 화가 났을까? 아마 나의 어떤 측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혹은 나의 일상이 너무나도 평온해서.


나 스스로에게 결핍이 되는 부분을 마주했을 때 나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같은, 내 탓이 아니라는 책임회피를 위해 배경과 환경에 그 책임을 떠넘기곤 한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비겁하게 굴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연속된 상황에 대해 원망하고, 화를 내고. 이는 스스로가 그 어떤 것도 극복해내지 못했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감정이 어떤 방향으로든 흘러야 하는 배출구가 필요한 감정임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부터는 초점이 달라진다. 마냥 그 분노에 나를 내던지는 게 아닌, ‘해결’ 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에 집중하게 되었다. 맛있는 것을 먹든, 술을 마시든, 친구와 떠들며 잊어버리든. 남들이 스트레스를 풀 때 하는 방법들을 하나씩 따라 해보기도 했다.


그중 어떤 것도 취향이 아니었던 내게 가장 편안했던 건 글을 쓰는 것이었다. 감정이라는 것은 실체화하여 눈앞에 꺼내 두는 순간부터 열기가 식어가기 때문에, 내가 쓴 글을 읽고, 또 읽으며 찬찬히 식혀내려 노력했다. 부피와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감정이 내게는 너무 버거웠기 때문에, 내 가시범위에 들어오도록 딱딱히 굳히고 자르고 각을 내어서. 하고 싶은 말, 전하고 싶은 말을 구어체로 한참을 써내려 가다 보면 울분이 손을 타고 내려가는 감각이 들었다.


물론 저렇게 추상적인 방법만을 매번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냥 내 상황을 차분히 나열하는 것 만으로 위기감이 끼칠 때가 있으니까. 무엇 하나에 빠지면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내게 가장 효과적인 것은 두려움, 위기감 같은 것이었다. 여태 쉽게 나의 원동력이 되어주던 감정들.


그 재료가 무엇이든 이 상황이 해결해야 하는 것임을 자각해야 한다, 정도로 요약해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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