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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mel Nov 11. 2021

섬의 조각가

그리스 로마 다시 쓰기_피그말리온 이야기

그리스 로마 다시 쓰기의 첫 번째 주제는 키프로스 섬의 조각가 피그말리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원작의 내용이 가장 잘 담겨있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조금 더 깊고 세속적인 부분을 다루는 고전입니다.  <변신 이야기>는 당대 신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변신’의 모티브를 주로 다룹니다. 그중 저는 ‘피그말리온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아시다시피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심리학/교육학 용어로도 쓰이는 등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가장 잘 알려진 만큼, 조금 더 새롭고 깊이 있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필자는 기존의 행복한 피그말리온 신화의 뒷이야기를 창작하여 새로운 신화로 만들어보았습니다. 제가 이 신화에서 가장 주목했던 부분은 이상형(이상, 진리)에 대한 부분입니다. 기존의 신화에서 피그말리온은 이상형의 여인을 조각합니다. 그리고 아프로디테 여신의 축복으로 조각상이 사람으로 변신하게 되고, 그 여인과 현실에서 서로 사랑하는 기회를 받아 행복한 삶을 보냅니다. 하지만 저는 완벽한 이상형은 존재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이상형이란 말 그대로 이상형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적 같은 사랑을 성취한 피그말리온조차도, 그의 깊은 내면에서 이상형의 형태는 조금씩 바뀌어갔을 것입니다. 이상형이란 언제든 나의 상상 속에서 변화를 겪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상이란 실제로 존재할 수 없거나 존재한 적이 없는 것이기에 더욱 완벽하고 신성해 보입니다. 또한 인간은 끊임없이 다시 또 다른 이상을 꿈꾸는 존재입니다. 저는 새로운 이야기를 통해 계속되는 이상에 대한 갈망이 오히려 현실에서의 인간을 허무하고 피폐하게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나아가 경험한 것에 대해 욕구를 넘어 욕망으로 발전하게 되는 인간의 모습을 비극적인 신화로 표현해보고자 합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흥미롭게 읽히길 바랍니다.   


장 제롬,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섬의 조각가』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섬 하나를 깊은 마음속에 지니고 있다. 매력적이고 이상적인.

   

 키프로스 섬의 기적이 있은 후로 10년이 지났다. 여신이 맺어준 한 쌍의 부부는 그동안 너무나 행복한 삶을 함께 보내왔다. 부정할 수 없는 기적의 시간들이었다. 이상적인 외모와 이상적인 성격을 가진 갈라테이아에게 받는 무조건적인 사랑은 형용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부부를 쏙 닮은 아이들도 낳았다. 부족한 것이 없는 나날들이었다. 더 이상의 어떤 행복도 그녀와의 관계를 대신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여느 날과 다름없던 저녁, 그의 머릿속에 스쳐간 생각에 스스로에게 놀라고 말았다. 그는 스스로 고개를 가로 지으며 떨쳐 버리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부하기 힘든 생각이 끝없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가 떠올린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누구보다 행복했다. 아니 행복해야만 했다. 그의 행복한 삶을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갈라테이아에게 바라는 것이 조금씩 생겨만 갔다. 사람이 사랑하는 이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피그말리온에게 이것은 혼돈의 시작이었다. 분명 그녀는 그가 바라던 이상적인 외모와 성격을 지닌 기적 같은 존재였다. 쾌활하기보다는 차분한 사람이었고, 빛나는 올리브 색 눈동자를 지닌 사람이었다. 아이들에게 너그러운 어머니였고, 새하얀 피부와 그보다 환한 미소를 지닌 사람이었다. 피그말리온은 이런 갈라테이아를 사랑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아쉬움을 느끼는 순간들이 잦아졌다. 어떤 일에서든 그를 지지하고 순응하는 그녀에게 느끼는 따뜻함이 좋았지만, 가끔은 그녀가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 주고 표현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 자체로도 아름다웠지만, 지중해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가 더 매력적이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변화시킬 수가 없는 문제였다. 그녀는 이상적인 성격을 가진 채 창조된 사람이었고 일반적인 사람과 다르게 성격과 외모에 있어서 변화를 겪을 수 없게 운명 지어진, 그가 젊은 날 떠올렸던 이상형 그 자체에 머무르는 사람이었다. 어느새, 피그말리온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새로운 이상형에 대한 갈망이 자신도 모른 채 자라나고 있었다.  


 평범한 주말이었다. 부엌에서는 갈라테이아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그 모습을 한참을 쳐다보았다. 참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었다. 도저히 떨쳐낼 수가 없었다. 마음속에 자리 잡은 새로운 이상형에 대한 뜨거운 갈망에 다시 몸을 던져야만 할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인간의 욕구는 채워지지 않는다. 특히 이상적이거나 닿지 못할 것 같은 곳에 관한 욕구는 더더욱 그렇다. 그것을 가까이 경험해본 자라면 그것은 필연 욕구를 넘어 욕망으로 불타오를 것이다. 더욱더 높은 곳을 향한 그 목마름이 절제하지 못할 위험이라는 것을 당시에는 깨닫기 힘들다. 이윽고 저녁상이 차려졌지만 그는 마시던 차를 비우고 작업실로 가 문을 잠갔다. 문 너머 갈라테이아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대충 둘러대면서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젊은 날 갈라테이아를 그려나가던 그때처럼 누군가를 다시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배고픔도 잠도 잊은 채 새로운 이상형을 만들어가는 것에 빠져있었다. 무서울 만큼 깊게 몰두한 밤이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을까. 그는 완성된 조각상 앞에 서있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한 여인이 마치 금방이라도 살아나 그를 안아줄 것만 같았다. 갈라테이아를 닮았지만 조금씩 다른 그녀의 모습에 피그말리온은 감탄하며 주저앉고 말았다. 이미 그의 옆을 지키던 갈라테이아에 대한 사랑은 그렇게 옅어지고 있었다. 그는 10년 전과 똑같이 차가운 조각상 없이는 살 수 없는 날들을 그렇게 맞이하게 되었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미친 사람처럼 그는 조각상을 옮겨 집 밖을 나서기 시작했다. 아프로디테 여신의 신전을 가야 했기 때문이다. 인기척을 느낀 갈라테이아가 놀라 그를 붙잡았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돌아섰다. 그렇게 혼자 남겨진 갈라테이아는 멍하니 그와 조각상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다시 여신의 신전 앞에 섰다. 10년 전 그날처럼 그는 제단에 제물을 올리고 무릎을 꿇었다. 칠흑같이 어두워진 밤공기는 그날과 같은 조용함으로 그와 새로운 조각상을 둘러싸고 있었다. 지나온 시간을 떠올리며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다시 시선을 돌려 제단을 바라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위대하신 여신이시여! 여기 피그말리온이 당신을 찾습니다. 10년 전 이곳에서 당신이 주신 기적으로 제 조각상이 인간의 온기와 숨결을 얻었던 것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그는 이상하리만큼 떨리지가 않았다. 그의 불타는 갈망이 차가운 밤공기가 무색할 만큼 신전 안을 울리고 있었다.

 “여기 새로운 조각상이 있습니다. 이 조각상, 아니 이 여자는 지금 누구보다 제 이상형에 가깝습니다. 젊은 날의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마저 담았습니다. 제 전부를 쏟아 만든 이 사람에게 또다시 온기와 숨결을 내려주시옵소서. 최고의 조각가로서 당신에게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제 마음속 열망을 채워주소서.”

 그가 말을 마치고 잠시 정적이 있었다. 곧이어 어둠 속에서 빛이 있었다. 아프로디테 여신이 모습을 드러내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했다. 그토록 아름다운 얼굴로 이리도 무서운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그녀는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만하고 어리석은 인간이여. 내가 10년 전 조각상에게 온기와 숨결을 준 것은 너의 그 사랑에 대한 순수함과 열망을 가엾게 여겨 기적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 너의 그 어리석은 욕망에 실망하고 말았다. 

 피그말리온은 그녀의 차가운 목소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너의 그 오만한 시도가 왜 잘못되었는지 말해주겠다. 첫째, 너는 신의 선물에 감사하지 못하고 소중함을 가벼이 여긴 오만한 인간의 모습을 보였다, 둘째, 이상에 대한 욕구를 넘어서 욕망이라는 것에 집착하게 되는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보였다. 셋째, 조각상을 넘어 인간을 무한히 창조하려는 신에게 도전하고 모욕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였다.

 여신의 무거운 목소리가 공허한 신전을 가득 채워갔다. 피그말리온은 신전을 가득 채운 울림에 압도되어 고개 조차 들 수가 없었다. 

너는 평생을 그 불타는 욕구와 욕망을 해결하지도 못한 채 갇혀 살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너는 갈라테이아와 너의 아이들에게 손을 댈 수가 없다. 너의 손이 그들에게 닿는 순간 그들은 곧바로 그 자리에서 차가운 조각상으로 변할 것이다. 그들도 너를 만질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너에게 손을 대는 순간 그들은 조각상으로 변할 것이다. 평생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저 바라만 보며 살아가라. 이로 인한 고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질 것이다. 혹시나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말거라. 너는 이 섬을 떠날 수 없다. 평생 그들 주변을 맴돌기만 하며 가까이 갈 수도, 떠날 수 없을 것이다.

 여신은 말을 마치고 나서 조각상을 눈 깜짝할 새 산산조각 내어버린 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그는 주저앉은 채 부서진 조각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그가 가장 먼저 본 것은 갈라테이아가 아이들과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그가 온 것을 보고 한 걸음에 달려 나와 그를 안으려 했다. 피그말리온도 편안한 그녀의 품이 그리워 안아주려 했지만 이내 여신이 내린 저주를 떠올렸다. 그는 가까이 다가온 그녀를 피해 얼른 작업실로 도망치듯 들어와 문을 잠겄다. 굳게 닫힌 문 너머로 그녀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얼굴을 보면 그들을 안아줄 것만 같았기에 그는 주저앉아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그의 이상형이었던 여자가 같은 집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그의 하루는 10년 전 조각상을 만들기 전의 그때로 돌아간 것과 마찬가지였다. 평생을 빛나는 이상을 눈앞에 두고도 다가갈 수 없는 굴레에 갇혀 살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에 댄 듯 타들어가는 저주에 피폐해져 가는 한 남자. 그렇게 그는 한동안 주저앉아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른 새벽이 되자 그는 결국 편지를 남긴 채 집 밖을 나섰다. 그들과 같은 공간에 도저히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젊은 시절부터 모아놓은 돈의 절반만을 챙긴 채 그는 섬을 떠나 먼 육지로 가려했다. 하지만 그가 항구에 도착했을 때는 여신이 이미 ‘피그말리온을 돕는 사람은 벌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저주를 섬 전체에 알려 놓은 후였다. 섬사람들은 모두 그를 피하며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그를 반겨주는 딱 한 곳이 있었다. 돈과 욕정이라면 누구든 반겨줄 그곳. 바로 '프로포이티데스'(키프로스 섬의 주인인 아프로디테 여신을 경솔하게 대했다. 이후 여신의 저주를 받아 역사상 최초의 매춘부가 된 여자들이 되었다) 무리가 몸을 파는 곳이었다. 돈을 더 주더라도 젊은 날 자신이 가장 더러워하며 손가락질했던 그들에게 가고 싶지는 않았던 피그말리온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쌓여가는 따뜻한 품에 대한 갈망과 인간에게 주어진 욕구가 그의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그는 결국 그녀들에게 몸을 던졌다. 이미 저주받은 몸이기에 여신을 신경 쓰지 않았던 그녀들은 그를 거리낌 없이 맞이했다. 그는 그녀들의 품 속에서 어떤 의지도 가지지 못한 채, 욕구와 욕정 속에서만 살아가는 몸이 되어있었다. 


 시간이 흘러 키프로스 섬에 길고 긴 장마가 찾아왔다. 돈이 다 떨어지고 반쯤 제정신이 아닌 한 남자가 결국 매춘부들에게서도 쫓겨나 거리에 주저앉게 된 무렵이기도 하다. 그는 비를 맞으면서도 전혀 춥지가 않았다. 차라리 이 비가 자신을 산산이 부셔 바다로 흘려보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더럽게 생각하고 멀리했던 여자들과 몸을 섞으며 욕정을 채워나간 지난날 들에 그는 어쩐지 울음 섞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지쳐 깜빡 잠이 들었을까. 그는 꿈을 꾸었던 것 같았다. 오랜만에 갈라테이아와 아이들이 나온 꿈이었다. 아이들과 그녀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발견하고는 한걸음에 달려오기 시작했다. 갈라테이아는 여전히 남편만을 생각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너무나 괴로워서 울었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어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뜨거운 것이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갈라테이아와 아이들이 곁에 와 그의 눈물을 닦아 주고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들을 안았다. 그들은 그렇게 껴안고서 소리 내어 울었다. 하나 문득 그는 그의 손가락이 닿아있던 그들의 몸에서 차가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들과 닿아있던 볼에서도 차가움을 느꼈다. 그는 문득 정신을 차려 눈을 떴다. 그는 여전히 꿈인 줄만 알았지만, 하염없이 내리는 차가운 비는 꿈이 아님을 알리기에 충분했다. 아름다운 한 여자와 부부를 꼭 닮은 두 아이의 조각상 앞에서 그는 그렇게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울음소리에 문을 열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아무도 찾지 않는 홀로 남은 섬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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