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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mel Nov 11. 2021

시큼한 진실

 무더운 여름이 되면 떠오르는 음식들이 있다. 보기만 해도 시원한 냉면, 이열치열의 삼계탕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내게 그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맛이 있다면, 바로 시큼한 오이냉국이다. 

 2017년 여름. 군 제대 후 복학을 하고 처음 맞이하는 방학이었다. 그 당시 나는 고향에 내려가지 않고 이것저것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오가며 나름 열정적인 복학생의 삶을 보내고 있었다. 사장님은 다른 아르바이트생들 중에 나이도 제일 많고, 특히나 고깃집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나를 마음에 들어 하셨다. 그러한 이유로 2주도 지나지 않아 나는 오전부터 출근하여 오후까지 일하는 이른바 매니저 직책까지 제의 받게 되었다. 돈 한 번 모아보자라는 마음으로 나는 한 여름 고깃집의 식구가 되기로 결정했고, 하루하루 뜨거운 불판과 절약정신이 투철한 에어컨 사이에서 싸우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손이 부족해 새로 들어오신 주방 이모와 함께 먹는 첫 점심 식사자리였다. 이런저런 식상한 서로의 자기소개가 이루어지던 평범한 시간이었지만, 이모의 질문 하나가 내게 대뜸 들어왔다. 

 “철학과라며? 내 사주 좀 봐줘봐. 거기 나오면 철학관 차리는 거 아냐? 호호...”

 나는 웃으며 슬쩍 대답을 넘겼다. 어르신들이 가지고 계신 철학과에 대한 편견을 선배들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밥그릇을 얼른 비우고 먼저 일어났다.

 하지만 이모를 향한 내 첫인상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좋은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 이유는 대부분 음식의 공이 크다. 당시 가게는 식사를 매일 찌개와 밑반찬들로 해결했었는데, 이모가 온 후 반찬의 맛이 정말 맛있어진 것이다. 특히 어떤 나물이든 젓갈이든 가리지 않고 잘 먹는 내 모습을 늘 좋아하셨다. 그래서인지 그만큼 끼니를 더 잘 챙겨주셨다. 타지살이에 지쳐 집밥에 대한 그리움도 컸었던 나는 이모가 차려주는 밥상의 힘으로 그 해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때늦은 점심시간에 40명이 넘는 단체손님들이 들이닥쳤다. 사장님도 볼 일이 있어 안 계시고 가게에는 나와 이모들만 있었던 상황. 혼자서 서빙하랴 계산하랴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브레이크 타임을 훌쩍 넘어서야 마지막 상을 다 치웠다. 에어컨 앞에 멍하니 앉아있던 그때, 이모가 나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직접 만드신 오이냉국이었다. 하필이면.

 살아오면서 가리지 않고 뭐든 잘 먹는 나에게도 불편한 음식이 있었다. 대부분의 국에서 느끼기 힘든 오이냉국의 시큼한 맛이 이상하리만큼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오래전 여름, 외할머니가 해주신 오이냉국은 아직 어린아이의 입맛에 맞지 않았었다. 그 이후 나는 여름 식탁에 올라오는 오이냉국을 번번이 모른 체하고 있었다. 오래된 편견이었다.

 이모는 네가 못 먹는 음식도 있냐며 깔깔대며 웃었다. 오기가 나서였을까. 아니면 너무 목이 말라 참을 수 없던 것이었을까. 나는 결국 오이냉국을 한 모금 들이켰다. 이럴 수가. 이렇게 맛있는데 이제껏 왜 피해왔는지. 지칠 대로 지친 더위와 갈증에 차가운 시큼함이 대답하는 삼박자였다. 그날, 나는 손님들 상에 나갈 것은 남겨놓자고 이모가 말릴 때까지 마시고 또 마셔댔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며 살아간다. 자신의 생각에 대한 옳고 그름을 굳이 따지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진실과 마주하기를 바라기보다 내가 알고 믿는 것이 진실이기를 바랄 때가 많다. 동네 철학관과 완전히 다른 대학의 철학과에 대한 이모의 생각과, 그저 시큼할 뿐 먹고 싶지 않은 이상한 음식이라는 오이냉국에 대한 나의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그날 마셨던 오이냉국은 나에게 있어 오래 머무른 생각과 편견으로 채워진 삶보다, 경험하고 접근해보는 삶을 가르쳐 주었다고 믿는다. 직접 보고 듣고 느낌으로써 우리는 진실을 조금 더 뚜렷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쉽지 않겠지만 그렇게 살아내야 한다. 

 그 해 여름 이후, 나는 식사자리에서 가끔 오이냉국이 나오면 참 반갑다. 메인 요리가 나오기 전부터 이미 두 그릇을 들이켜곤 한다. 이제는 없어서 못 먹는 음식이 되었다. 사실 음식의 맛과 진실의 무게감을 비교하기는 어렵고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 시큼한 한 모금은 적어도 내가 느낄 수 있는 가장 뚜렷한 진실이기에, 나는 이번 여름도 즐겁게 오이냉국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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