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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작가 Feb 23. 2024

"이게 거짓말이면 저를 죽이셔도 좋아요"

진실을 아는 건 오직 한 사람

우리 집엔 불문율이 있다.

아이들이 명절에 용돈을 받으면

아이들에게 바로 지급되는 돈은 5만 원이고

(이 돈의 사용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나머지 돈은 아이들 명의 통장에 입금하는 것이다.

이번 설도 예외는 아니었다.


형네와 우리 가족은 부모님을 모시고

펜션에서 1박을 했다.

펜션을 나오며 형은 아이들에게 용돈을 줬다.

마침 아내는 안에서 짐을 챙기느라 현장에 없었고

용돈을 받은 준이는 내게 와서 조용히 속삭였다.


"아빠, 이거 엄마한테 말하지 마요."


와~ 이 틈을 노리네~

난 아무 생각 없었는데

준이 말을 들으니 장난기가 발동했다.


"내가 왜? 나한테도 뭐 떨어지는 게 있어야지.

5대 5!"


"와~ 진짜..."


준이는 이런 날도둑놈이 있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7대 3!"


"내가 3? 그렇게는 못하지~"


"진짜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죠?

알았어요. 나 3만 원, 아빠 2만 원.

이게 마지막이에요. 더는 안 돼요."


준이가 7:3, 6:4의 개념을 알다니...

내기와 협상의 달인다웠다.

준이와 한 배를 탈 운명인 윤이는

은근히 동생 준이를 응원하는 듯했다.

아직 협상이 끝나지 않았는데

아내가 등장하며 우린 결론 없이 흩어졌다.


부모님과 아내를 태우고 가는 차 안에서

아까 있었던 협상 제안 얘기를 꺼냈다.

준이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좋아하는 부모님께

웃고 추억할 만한 에피소드를 말씀드리고 싶었다.


"준이 고놈 참 웃기는 놈이네~"


부모님은 준이를 귀엽고 기특하게 생각하셨고

아내에겐 모르는 척 넘겨달라고 했다.

그땐 이게 불행의 씨앗이 될 줄은 몰랐다.



우리 집 일정을 마치고 처가로 가는 차 안.

아내가 중간정산 차원에서 아이들에게

지금까지 받은 용돈 액수를 물었는데

준이는 삼촌에게 받은 돈은 쏙 빼고 얘기했다.

사정을 다 아는 아내는 준이를 떠봤다.


"삼촌한테는 용돈 안 받은 거야?"


준이는 당당하게 말했다.


"네. 안 받았어요."


"이상하다? 삼촌이 용돈을 주셨을 것 같은데~"


협상의 달인 준이는 묻고 더블로 갔다.


"진짜 안 받았어요. 내기하실래요?

안마 120분 내기!"


아내와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쭈? 요놈 봐라? 세게 나온다 이거지?

준이는 내가 엄마에게 말하지 않을 거라 믿었고

안마 10분도 아니고 120분으로 배팅을 크게 하면

엄마가 쫄아 판에서 빠질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준이 패를 다 알고 있는 아내는 "콜"을 외쳤다.

그러자 준이는 갑자기 형을 걸고넘어졌다.


"형, 우리가 삼촌한테 용돈 받았어? 안 받았지?"


강 건너 불 구경하던 윤이에게 불똥이 튀었다.

윤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마지못해 준이 말에 동조를 해주었다.


"지금 삼촌한테 전화해서 확인해 봐요!"


"삼촌, 저한테 용돈 안 주셨죠?" 하며 유도하면

눈치 빠른 삼촌이 적당히 동조해 줄 거라 믿었을까?

준이 시나리오대로라면 완전범죄가 눈앞이었다.

하지만 아내 역시 호락호락 넘어가 줄 생각이 없었다.

지금은 삼촌이 운전 중일 거니

나중에 따로 확인해 보겠다고 했다.


일이 꼬일 것 같았는지 준이가 입장을 바꿨다.

생각해 보니 받은 것도 같고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며

안마 120분 내기는 없던 걸로 하잔다.

아내는 그런 게 어디 있냐며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까진 장난스러운 분위기로 웃고 떠들었지만

준이의 짜증과 우기기가 시작되며 분위기가 싸해졌다.


준이는 울상이 되어 내기는 무효다,

기억이 가물가물해 형에게 물어본 건데

형도 용돈 안 받았다고 했지 않느냐,

그래서 나도 내기를 한 건데 그럼 형 잘못 아니냐며

궤변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장난으로 받아주던 아내는

준이의 거짓말과 책임회피를 보고 표정이 싹 바뀌며

이대로 두면 안될 것 같다 생각했는지

준이를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지금 있었던 일이 불과 몇 시간 전 일이고,

아빠랑 5:5네 7:3이네 얘기를 했으면서

용돈 받은 사실을 기억 못 하는 게 말이 되냐,

내기를 먼저 하자고 한 건 준이였으면서

왜 짜증을 내고 형 핑계를 대느냐며

언성을 높이고 준이를 추궁했다.


모르는 척해달라고 털어놨던 협상 얘기를

아내가 오픈하니 내 입장도 난처해졌다.

지금까지 아내를 보아왔던 25년 간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나도 처음 봤다.


그래도 준이는 울먹이며 결백을 주장했다.


"진짜 억울해요. 믿어주세요.

아빠랑 5:5, 7:3 얘기를 했던 건 기억해요.

그런데 그게 할아버지께 받은 돈인지

삼촌에게 받은 돈인지 기억이 잘 안 났던 거예요.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기억을 못 한 것이지

거짓말을 한 건 절대 아니에요."


요놈 봐라. 이 상황에도 말은 청산유수네.

아내의 고성, 준이의 울먹이는 항변.

고성에 유독 예민한 나는 심장이 쿵쾅거리며

머리털이 쭈뼛 섰다.

구경꾼처럼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내가 나설 차례였다.


"준! 마지막으로 묻는다! 그냥 대답하지 말고

충분히 시간을 갖고 생각해서 대답해.

진실을 말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거야.

이번 대답에 준이는 책임을 져야 한다.

지금 거짓말하고 있는 거야, 진짜야?"


준이는 잠깐의 텀도 없이 바로 변명을 했다.


"조용히 해! 아빠가 생각하고 말하랬지?

마지막 기회라고 했어. 대답 잘해!

주절주절 길게 얘기할 필요도 없어.

거짓말이야 아니야? 예, 아니오로 대답해!"


아마도 지금까지 준이가 본 가장 무서운

아빠의 모습이 되어 준이를 압박했다.

준이는 이번에도 울먹이며 말했다.


"진짜예요. 이게 거짓말이면

저를 죽이셔도 좋아요."


와... 준이가 초강수를 뒀다.

이쯤 되니 우리도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렇게 결백을 주장하는 아이를

계속 압박하는 건 역효과만 부를 것 같았다.


"알았어. 여기까지 하고 이 일은 끝내자."


웃자고 시작했는데 죽자고 달려들어

결국 파국으로 끝이 났다.



중학교 음악 시험 시간이었다.

장 3도네 단 3도네 하는 어려운 문제를

쉽게 풀 수 있게 정리한 표가 있었다.

시험 시작 전 쉬는 시간,

내 주변으로 친구들이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중 한 친구가 그 표를 커닝페이퍼로 만들었다며

커닝을 할까 말까 얘기하던 중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다들 우르르 자기 자리로 가서 앉았고

그 친구는 커닝페이퍼를 내 책상에 두고 갔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책들과 함께

커닝페이퍼는 내 책상 서랍으로 들어갔다.

시험 시작. OMR 카드를 받아 한 장씩 뒤로 넘겼다.

맨 뒤에 있는 친구가 말했다.


"선생님, OMR 카드를 못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맞게 세어서 줬는데 그럴 리가 없다,

누군가 2장을 챙겼을 거라고 부정행위를 의심하셨다.


"이 줄, 모두 손 머리에 올리고 책상 위로 올라가!"


선생님은 책상 서랍에 있는 물건들을 모두 빼셨다.

내 차례. 친구가 놓고 간 커닝 페이퍼가 나왔다.


"이 자식이! 빡! 빡!"


선생님은 손바닥으로 내 허벅지를 치기 시작하셨다.


"이거 뭐야! 너 커닝하려고 했지?"


"아니오."


거짓말을 한다며 시험지를 받기도 전에

계속 맞기 시작했다.

계속 아니라고 말했지만 믿어주지 않으셨고

내가 생각해도 선생님이 오해할 만했다.

친구를 끌어들이는 것도 내키지 않았고

나 때문에 시험을 못 치르고 있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아직 내가 커닝을 한 것도 아니었고,

차라리 내가 커닝을 하려고 했다고 말하는 게

이 상황을 빨리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커닝하려고 만들었습니다."


"이 자식이 진작에 그렇게 말할 것이지."


내가 몇 대를 더 맞고야 시험을 볼 수 있었다.

시험이 끝나고 바지를 벗어보니

허벅지는 시뻘겋게 피멍이 들어있었다.

주변 친구들은 나의 결백을 알고 있었겠지만

선생님에게 나는 끝내 거짓말쟁이로 남았다.



결백을 주장하는 준이를 보며 그때가 떠올랐다.

준이는 진짜로 기억을 혼동해 억울할 수 있었다.

우리가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압박하는 것은

준이에게 거짓 자백을 유도하는 꼴이 될 수 있었다.

중학교 때 내가 경험했던 억울함을

준이에게 똑같이 경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억울할 확률이 단 1%라 하더라도...


혹시나 준이가 거짓말을 한 거라 해도

이 상황에서 퇴로를 열어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아이들에게 절대 거짓말은 안 된다,

다른 건 용서해도 거짓말은 용서 못한다며

유독 아이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 것도

어른이 휘두르는 가혹한 폭력이 아닐까?

누구나 거짓말을 하며 산다.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할 사람은 어른이고 부모였다.


사태는 마무리됐지만 준이 마음을

다독여 줄 필요가 있었다.


처형네 집에 도착했다.

사촌형들과 놀고 있는 준이를 잠깐 방으로 불렀다.

준이는 또 취조가 시작되는 줄 알고

이미 억울상을 한채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준아, 아까 엄마 아빠가 너무 무섭게

몰아붙여서 놀라고 무서웠지?

준이는 진실을 얘기한 건데 엄마 아빠가 이미

준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답을 내려놓고

너무 세게 몰아붙인 것 같아서 미안해. 사과할게.


준이가 엄마 아빠 입장이라고 해도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을, 그것도 아빠랑

장난까지 쳤던 일을 기억 못 한다는 걸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려웠을 거야.


진실은 준이만 알고 있을 테고

준이가 아니라고 하니 준이 말을 믿을 거야."


준이는 또 억울함을 항변하려다가

자신을 믿어주고 사과하는 모습에 경계를 풀었다.

'또 무슨 꿍꿍이야?' 싶었을지도 모르지만...


"준이가 거짓말로 엄마 아빠를 속이려 한 거라면

이번에 대충 넘어가서는 안될 것 같았어.

거짓말로 남을 속인 작은 경험들이 쌓이고 쌓이면

나중에 더 큰 거짓말로 남을 속이는 사기꾼,

교활한 사람으로 자랄 수도 있어서

엄마 아빠가 크게 화내고 몰아붙였던 거야.


그리고 준이가 잘못한 게 있다면

기억을 잘 못한 것뿐이라고 말했지?

아빠 생각엔 준이가 제일 잘못한 건

형 핑계를 댄 거야.

먼저 내기를 하자고 한 건 준이였고

형 의견은 참고사항일 뿐 결정은 준이가 한 거잖아.


이번에 한국이 축구에서 졌지?

손흥민이 인터뷰할 때 뭐랬어?

선수들, 감독 욕하지 말고 모든 비난은

저에게 해주시라면서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지.

만약 손흥민이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누가 잘못해서, 심판 판정 때문에, 컨디션이 어쩌고

핑계를 댔다고 해봐. 멋없지?


준이도 살다 보면 많은 일을 겪게 될 텐데

그때마다 모든 선택과 결정은 내가 한 것이고

그 책임은 내가 진다는 생각을 하면 좋을 것 같아.

드라마 주인공은 누구 핑계 안 대잖아?"


준이에게 다시 한번 사과하고 안아주며

놀라고 상처 난 마음을 위로해 주었지만

이는 중학생의 나를 위로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번 일로 준이가 엄마 아빠를 어려워하거나

벽을 세우지 않길, 예전처럼 대해주길 바랐다.


진실이 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준이뿐이다.

하지만 이젠 진실이 뭐든 상관없다.

준이 말이 진실이라면 응어리가 풀렸을 것이고

거짓이라 해도 충분히 느끼는 바가 있었을 테니.



설 명절이 끝나고 아내는 아이들과

받은 용돈을 정산했다.

왕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큰 이모, 작은 이모...

(애들이 맡긴 돈이 다시 조카들 용돈으로 나가면서

애들 통장에 입금할 돈이 얼만지 계산해야 했다.)


정산이 끝나고 아내가 내게 조용히 말했다.


"여보, 준이가 진짜 잊어버린 것 같아.

삼촌한테 받은 건 이번에도 빼먹고 말하더라고."


진실은 여전히 준이만 알고 있다.

진짜로 까맣게 잊은 건지,

아님 이것마저도 자신의 결백을 입증할

계산된 큰 그림인 건지...


후자라면... 진짜 소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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