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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작가 Jul 03. 2024

오 마이 달인

<아내와 글쓰기 프로젝트 #15. 마흔 즈음에>

#1. 밥 먹고 야구만 한 애들이라~


부장님은 야구에 미쳐있는 나를 보며

구속이 몇 나오냐, 언제부터 야구를 했냐

물으시더니 자못 진지하게 물으셨다.


"설차장, 조만간 최강야구 나가는 거 아니야?"


"어휴~ 저는 근처에도 못 가죠.

선수들 던지고 치는 거 보면 차원이 달라요.

걔네들은 밥 먹고 야구만 한 애들이라~"


내 말을 듣고 부장님이 다시 물으셨다.


우리는 밥 먹고 일만 한 사람이잖아.
그럼 우리도 벌써 일로는
달인이 됐어야 하는 거 아닌가?


평생 못 잊을 뼈 때리는 한방이었다.

'밥 먹고 OO만 한 애들'이라고

다 달인이 되는 건 아니었다.



#2. 달인


16년 동안 최면술을 연구해서
세계 최고의 최면술사가 되신 최면술의 달인
잠결 김병만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달인의 소개에는 항상

'16년 동안'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달인이 되려면 적어도 16년은

한 우물을 파야한다는 뜻일까?


공자는 15세에 지우학(志亏學),

 배움에 뜻을 두었고

30세에 이립(而立),

자신의 뜻이 확고해지며 바로 서게 되었다.


뜻을 세우고 한 우물을 파서

달인의 경지에 이르는 기간이 묘하게 16년 정도다.


기간으로만 따지면 나도 달인이 됐어야 맞다.

'6년(초등) + 6년(중고등) + 4년(대학) = 16년'

16년간 정규교육을 받았지만

달인은커녕 뭘 배웠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기초교육이고 우물을 판 것도 아니니 그렇다 치자.


어느덧 올해 입사 18년 차가 되었다.

어찌됐건 한 우물을 16년 넘게 팠으면

지금쯤 우물물이 샘솟든 땅파기의 달인이 됐든

뭐라도 됐어야 할 텐데 그냥 삽질만 한 것 같다.


어릴 적 내가 생각했던 마흔은

세상을 다 알 것 같은 중년 신사의 모습이었고

어떤 일이든 척척 해내는 만능 차장의 모습이었지만

정작 난 여전히 흔들리는 사십 대 아저씨일 뿐이다.


난 아직도 발등에 떨어진 업무에 허둥대고

앞으로 만날 일과 사람이 긴장되고 두렵다.

신입 때는 신입이라서 모른다는 핑계라도 댔지만

지금 모른다는 건 무능한 내 민낯을 드러낼 뿐이다.

불혹이 지난 지금에도 이립하지 못하는 나.

왜 난 달인이 되지 못했을까?



#3. 땡잡아야지


40세의 불혹과 30세의 이립을 논하기 전에

난 15세의 '지우학'부터 없는 상태니 말 다했다.


'이 회사는 나에게 맞지 않아'

'내 적성에 맞는 다른 일이 있을 거야'

'오늘만, 이번 일만, 올해만 잘 버티자'


일로, 내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겠다는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회사에 다니다 보니

어느덧 세월이 이렇게 흘렀다.

밥 먹고 일만 했지만 전문가가 되지 못했다.

뜻을 세우는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년까지 아직도 16년이 남았다.

지금 시작해도 달인이 되기 충분한 시간이다.

직장생활 중간지점을 통과한 지금,

하루 중 내 삶의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내 삶의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회사에서

어떤 태도로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근데 회사에서 뜻을 세우긴 왜 이리 싫은 건지...


직장뿐 아니라 인생에서도 중간지점을 통과하고 있다.

하루하루 놀고먹기만 할 것이 아니라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어디에 뜻을 세울 것인지 고민해 봐야겠다.


志于'O'


성공한 사람들이 여름휴가 때

책 몇 권 들고 짱 박혀 백년대계를 세우는 루틴,

나도 한번 따라 해 보련다.

이번 여름휴가, 땡('O') 잡으러 가야지!

(난 이 순간에도 계기를 찾는다.)



#4. 의식


김성근 감독이 쓴 <인생은 순간이다>를 보면

'의식'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온다.

김성근 감독의 말버릇일 수도 있지만

평소 '의식'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무턱대고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스윙 한 번을 해도 최적의 폼과 동작을 생각하며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항상 의식하며 집중해야 성장으로 이어진다.


1만 시간 한 우물을 파면 전문가가 된다는

1만 시간의 법칙에도 함정이 있다.

매일 세 시간씩 1년이면 1천 시간,

10년이면 1만 시간 동안 무조건 열심히만 하면

누구나 그 분야 최고가 될 수 있을까?


이 법칙의 창시자 에릭슨 박사는 틀렸다고 말한다.

1만 시간의 법칙의 핵심은 '얼마나 오래'가 아니라

'얼마나 올바른 방법'이냐다.

김성근 감독의 '의식'과도 결을 같이 한다.


확실한 목적의식을 갖고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서

올바른 방법으로 매 순간 한계에 도전해야 한다.

'학교 종이 땡땡땡'만 1만 시간을 친다고

피아노의 달인이 될 수는 없는 법.


돌아보면 순간순간 치열하게 살았던 것도 같다.

수능이라는 큰 목표 사이엔 주기적인 시험이 있었고

대학에 가니 취업이라는 관문이 또 기다리고 있었고

회사에 들어가니 일, 승진, 인사 등 과제의 연속이었다.


어느덧 마흔이 되고 나니 가정도 회사도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난 이 안정감에 젖어 "인생의 꽃은 사십 대"를 외치며

현실을 마음 놓고 즐기기 시작했다.

목표도, 계획도, 한계에 대한 도전도 다 내려놓았다.


늘 목표를 갖고 치열하게 살아야 비로소 안심이 되는

현대인의 강박과 불안에는 격렬히 저항하고 싶지만

아무 생각도 발전도 없이 나태와 무책임으로

인생을 허비하는 건 더 격렬히 저항하고 싶다.


다시 방향을 잡고 중심을 잡을 나이다.

그리스에서 철학이 발전한 이유 중 하나는

시민 계급이 시간적 여유가 많아서였다.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이 꽃밭이 될 것인지

이제 꽃이 시들 일만 남을 것인지는

나를 돌아보고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긴

인생의 꽃 사십 대, 지금의 나에게 달려있다.

뜻을 세우고, 늘 깨어있으며, 한계에 도전한다면

남은 인생 몇 번 달인이 되고도 남을 테니...


Bravo, my life!

(지금까지 16년 동안 다짐과 계획을 반복해 오신

파이팅의 달인 뻥카 설민 선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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