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글쓰기 프로젝트 #16. 기본기>
대학 시절, 자취 집 근처에 복싱 체육관이 있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집에 가는 길이었다.
"슉슉~" "팡팡~" "땡~"
줄넘기 소리, 샌드백 치는 소리, 종소리가 들렸다.
백색소음에 불과했던 소리가 이날은 이상하게 달랐다.
무기력하고 파이팅 없던 나를 일깨우는 소리,
내 심장을 뛰게 하는 소리였다.
난 무엇에 홀린 듯 체육관 계단을 올라갔다.
입구 신발장에서부터 강한 공격이 들어왔다.
땀냄새와 발냄새가 섞인 살인적인 냄새였다.
이 날것의 냄새에 아드레날린이 분비됐다.
'이건 운명이다.
내 정신상태를 뜯어고칠 수 있는 기회다!'
그날 난 바로 체육관에 등록했다.
처음엔 내가 권투 체육관에 등록한 건지
줄넘기 학원에 등록한 건지 헷갈릴 정도로
대부분의 시간을 줄넘기에 할애했다.
훈련 내내 사람이 아닌 거울 속 나와 싸웠고
녹초가 될 때까지 체력훈련을 받았다.
이제 돈 내고 유격훈련을 받고 앉았네...
하지만 난 복싱을 배우기 이전에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려고 체육관에 온 사람이었다.
버텨야 한다. 다 피가 되고 살이 된다...
한두 달 지나니 비슷한 시기에 등록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나가떨어지며 안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 이유는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바로 뭔가 배울 수 있을 거라 상상했겠지만
줄넘기랑 체력훈련만 하고 있으니...
잘 버티고 살아남았다는 뿌듯함도 있었지만
난 언제쯤 샌드백을 쳐 볼 수 있을지,
언제쯤 링에 올라가 스파링을 할 수 있을지
막막하고 조급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소림사에서 권법 배우기 전 마당 쓰는 단계일 거야.
셰프에게 요리 배우기 전 접시 닦는 단계일 거야.
맛없는 쑥이랑 마늘 조금만 더 먹으면
곧 사람이 되어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야.
시간이 지나자 나도 샌드백을 칠 수 있게 되었고
코치님이 직접 미트도 잡아주시며
여러 콤비네이션을 연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잘하네~ 너도 이제 마우스피스 맞추자"
두둥~ 드디어 복서로 데뷔하는 건가...
기강을 잡으려는 건지 사람을 잡으려는 건지
내 첫 스파링 상대는 프로 선수였다.
물론 1대 1 대결은 아니었고
프로 선수 1명 vs 아마추어 4명의 대결이었다.
우린 각자 2라운드씩, 프로는 혼자 8라운드를 뛰었다.
우리는 헤드기어를 쓰고, 프로는 안 쓰고...
"니가 먼저 골라. 몇 번째에 할래?"
내게 무슨 큰 어드벤티지라도 주듯
코치님은 내게 원하는 순서를 정하라고 했다.
나도 탐색을 좀 해야 하니 첫 번째는 패스!
두 번째는 프로 아저씨가 몸이 풀릴 테니 패스!
마지막 라운드는 남은 힘을 쥐어 짤 테니 패스!
세 번째가 딱 쉬어가는 타임이겠구만~
내 차례를 기다리며 앞 라운드를 보는데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거울신경에 오류가 생겨 갑자기 활성화가 된 건지
내가 경기를 뛰고 있는 느낌,
내가 두들겨 맞는 느낌이 들며 내가 아팠다.
'배운 대로만 하자.
원투, 슉슉, 훅 어퍼컷! 오케이!'
링 위에 올랐고 배운 대로 잽을 날렸다.
상대에게 닿지도 않는 '오지마 잽'이었다.
나는 닿지도 않았던 거리에서 원투가 들어왔다.
골이 흔들리며 정신이 혼미해졌다.
살아오며 이런 주먹을 맞아볼 일은 당연히 없었다.
'링 위에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이때부터는 생존본능으로 움직였다.
가만히 서 있다가는 진짜 골로 가겠다 싶었다.
가드를 바짝 올리고 주유소 인형처럼 마구 움직여댔다.
위빙이라기보다는 살기 위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머리 위로 주먹이 슝슝 지나갔다.
'이젠 내 핵주먹맛을 보여줄 차례인가...'
수십 번 연습한 대로, 수만 번 상상한 대로
회심의 원투 펀치를 날렸다.
받아라! 로케트 주먹!
목숨이 아깝거든 모두모두 비켜라!
'엥? 뭐지? 안 닿네?
이 아저씨 뭐지? 순간이동을 했나?
난 순간이동 기술을 아직 안 배웠는데?'
모든 운동이 그렇듯 복싱도 하체 싸움이었다.
아저씨는 들어왔다 빠졌다 스텝으로 날 농락했다.
반면 난 다리가 굳어 움직이질 않았다.
"땡~"
어떻게 싸웠는지도 모르게 2라운드가 지나갔다.
어찌됐건 2라운드를 버틴 내가 자랑스러웠다.
내가 프로를 상대로 2라운드를 버텨내다니!
링을 내려오며 멋지게 양팔을 쫙 펼쳤다.
헤드기어를 벗겨주려 달려오던 애들이 말했다.
형, 코피 나요!
엥? 내가 그린 그림은 이게 아닌데?
거울을 보니 피 묻은 글러브로 얼굴에 펀치 도장이
찍히는 바람에 내 얼굴은 피떡이 되어 있었다.
아이씨, 누가 보면 엄청 얻어터진 줄 알겠네.
진짜 엄청 얻어터진 건가? 기억이 없었다.
아무튼 스타일을 구긴 건 확실했다.
코치님이 왜 그렇게 줄넘기를 시켰는지,
죽어라 체력훈련을 시켰는지 알 것 같았다.
스텝이 받쳐주지 않으면 펀치는 무용지물이었고
체력이 버텨주지 않으면 경기 자체가 불가능했다.
TV로 수없이 봐왔던 선수들의 멋진 장면에는
기본기를 다지는 인고의 시간이 있었을 텐데
내 눈엔 화려한 결과물만 보였고
얼른 과실을 따먹고 싶다는 마음만 앞섰던 거였다.
기본기가 중요하다는 것,
그 지루하고 괴로운 시간을 지나야 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늘 그게 쉽지 않았다.
꼭대기 말고 다음 계단에 집중하라.
내 눈높이는 늘 다음 계단이 아닌 꼭대기에 있었다.
기본기를 다지는 시간은 지루하고 초라했다.
'내가 이거 하려고 시작한 게 아닌데~'
'어느 세월에 저기까지 가나~'
'접자! 이건 나랑 잘 안 맞네~'
호기롭게 칼은 잘도 뽑아들지만
진득하게 끝을 맺은 건... 글쎄다.
돌아보니 참 많이도 손을 댔다.
격투기로는 태권도, 합기도, 권투, 검도...
스포츠로는 농구, 야구, 탁구, 배드민턴, 요가...
악기로는 피아노, 기타, 드럼...
왜 그 시기를 못 견디고 그만뒀을까...
이것저것 손댈 시간에 한 우물을 팠다면...
기본기를 다지는 지루한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해 버린 순간들이 아쉬운 건 사실이지만
돌아보니 그 경험들이 모두 없어져버린 것도,
쓸데없이 시간낭비를 한 것도 아닌 것 같다.
새로운 것에 도전했던 경험이 남아있고,
얕지만 넓게, 뭐든 조금은 할 수 있고
적어도 어디 가서 한 마디 얹을 에피소드라도 있다.
[기본기]
: 어떤 일에 있어서든
가장 먼저 익혀서
다른 기술의 토대가 될 기초
어쩌면 난 그동안 '삶의 기본기'를 다져온 게 아닐까?
한 분야로 따지면 수준급이 되진 못했지만
얕지만 넓은 경험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기술의 토대가 될 기초'가 되진 않았을까?
우리는 삶이라는 링에 올라간 선수다.
죽어야 링에서 내려올 수 있는...
삶이라는 링에 올라간 선수의 기본기는 무엇일까?
계속해서 도전하고, 경험을 쌓고,
무언가를 느끼고 배우려는 자세가 아닐까?
개별 분야에서는 중도에 포기했을지라도
삶 전체에서는 계속해서 도전하며
기본기를 쌓아가는 중이라 생각한다.
아직 종이 울리지 않았고 경기는 계속되고 있다.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면 된다.
과거에 내려놓았던 것도 다시 꺼내 들면 된다.
치고 빠지는 경쾌한 스텝과
라운드를 끝까지 버틸 수 있는
지치지 않는 체력만 유지한다면
언젠가는 원투 펀치와 현란한 콤비네이션이
제대로 먹히는 그날이 올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