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마법의 밤 - 3
이제 하루 일정이 끝나면 씻지도 않고 마음 맞는 순례자들과 우르르 바에 몰려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 되었다. 어쩌다 보니 저녁 식사 요리의 메인 셰프가 된 토마스 신부님의 재료 활용법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낯선 현지 재료를 사다가 조금 맛을 보고는 일본식 식당에서 많이 본 듯한, 또는 한국의 어느 이탈리안 식당에서 먹었던 것 같은 음식을 뚝딱뚝딱 만들어내시곤 하는 것이다.
신부님의 요리를 돕는 사람은 그때그때 바뀐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수가 한다. 간혹 내가 설거지를 하기도 하는데, 왠지 이수도 신부님도 나에게 여간해선 주방일을 나누어주지 않으려 하셨다. (그것은 아마도 설거지하는 나를 보고 구제할 길 없는 똥손임을 눈치챈 게 아닌가 싶다)
걷기에는 빠르게 익숙해졌다. 네팔에서 하도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는지라, 솔직히 좀 겁을 먹었었다. 그러나 여태 물집 한 번 잡히지 않는 발로 날듯이 걷고 있어서 마음이 놓인 한편으로 은근슬쩍 김도 샜다. 신부님은 “재인 씨 걷는 걸 보면 오늘 수십 km 걸을 사람이 아니라 어디 옆집 슈퍼 가는 사람 같아요. 짐까지 적어서.”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나는 걸으면서 종종 노래를 불렀다. 어렸을 때 봤던 만화 주제가부터, 유행이 한참 지난 가요, 괴상하게 개사한 동요가 의식의 흐름을 따라 내키는 대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처음엔 내 노래를 듣고 웃기만 하던 일행들은 자꾸 듣다가 귀에 익고 말았는지, 후렴구를 어설프게나마 같이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렇게 모두가 같은 길을 걷는 동시에 각자의 길을 걷고 있다.
신부님은 걷는 도중 항상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린다(아마 평소의 미사 시간에 맞추신 게 아닌가 싶다). 이수는 묵묵히 이 사람 저 사람에게(특히 오래 함께 걷고 있는 나에게) 맞춰주며 걷는다.
로그로뇨에서 나헤라로 향하는 유난히 황막한 길에서 많은 십자가를 보았다. 고속도로와 순례길을 경계 짓는 철조망에는 많은 사람의 염원을 담은 십자가들이 줄줄이 끼워져 있다.
십자가는 대개가 나무 조각을 주워 엮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길가를 구르는 자갈 하나에도 의미를 담는 데에는 정말 천재적이다. 지구에 사는 생물 중 유일하게 모든 것에 이름을 갖다 붙이는 재능은 덤이고.
나헤라로 가는 도중, 또 혼자 걷게 된 나는 날이 까무룩 저물어서야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알베르게 현관 계단에 앉아 있다가 나를 발견한 신부님은 “오늘 중으론 못 올 것 같더니, 어떻게든 오긴 오네요.” 라며 웃었다.
로그로뇨를 거치며 한층 가까워진 순례자들은 같은 식탁에 모여 저녁을 먹는 일이 많아졌다. 나헤라에서도 그렇다. 나헤라의 숙소에서 우리 일행은 말 많은 영국인 마틴에게서 저녁을 얻어먹었다.
토레스 델 리오에서 우리가 만든 파스타 샐러드를 한 접시 나누어 준 적이 있는데, 그에 대한 답례였다. 솔직히 민망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이쪽이야 여럿이 먹는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얹었을 뿐이지만, 혼자 다니는 마틴이 우리 모두를 대접하려면 아예 잔칫상을 차려야 한다. 우린 몇 번이나 성의만으로 고맙다고 말렸으나 그는 막무가내였다.
런던에서 교사를 하고 있다는 마틴은 언제나 가르치는 말투인 데다, 빠른 코크니(런던 토박이 특유의 사투리) 억양과 우렁우렁한 성량까지 더해져 말로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하지만 식사를 대접하겠다며 들이는 그의 정성만큼은 정말 고마웠다. 덕분에 바늘방석 같을 줄 알았던 저녁을 생각보다 즐길 수 있었다. 우리 외의 다른 순례자들까지 각자 몫의 음식을 들고 끼어들면서 식사는 조촐한 만찬이 되었다.
그라뇽까지 오는 길은 평소보다 배로 힘들었다. 나는 막막한 길 위에서 넘거나 혹은 넘지 못할 어떤 한계가 점점 가까워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라뇽의 알베르게는 옛 수도원이다. 침대는 따로 없어서, 커다란 홀에서 매트를 깔고 자야 한다. 저녁은 모두가 함께 만들어 먹는다.
저녁을 먹기 전, 수도원 뒤뜰에 누워 한참 동안 하늘을 보았다. 순례자들은 뒤뜰 이곳저곳에서 각자의 휴식을 즐기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수도원 뒤뜰의 낮은 담장 너머로 너부러진 우리에게로 무심한 시선을 던지며 지나간다.
나는 생각했다. 이제 곧 부르고스다. 부르고스에 도착하면 모두와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여정은 여기까지로 충분하다. 어쩌다 보니 일행 아닌 일행이 된 이수와 토마스 신부님이 껄끄러운 것은 아니다. 문제는 나다. 타인의 페이스에 무리해서 맞추는 상황에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식사 준비 시간이 되자, 이수가 나를 부르러 왔다. 스웨덴인인 안네와 한참 이런저런 잡담(대부분은 그녀가 자신이 비건-엄격한 채식주의자-이 된 이유에 대한 간증이었다)을 나누다가 손을 보태러 숙소로 올라갔다. 그래 봤자 내가 하는 일은 테이블들을 붙이고 인원수대로 접시와 포크를 나르는 변변찮은 심부름뿐이었지만 말이다.
식사를 끝내고 씻다 나오면서 어쩌다 들춰본 이곳의 방명록에는 여러 순례자가 남긴 기록이 가득했다. 여기 그라뇽에서 참다운 순례자의 무언가를 얻고 간다는 내용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읽던 나는 솔직히 나는 좀 부담스러웠다. 오늘 이곳 그라뇽에 다다른 순례자 1인 나는 깨달음이고 뭐고 그저 피곤해서 자고 싶을 뿐이었으니까.
벨로라도Belorado를 지나 입성한 부르고스Burgos는 예상보다 엄청나게 큰 도시다. 도시 외곽은 거대한 공장단지가 들어서고, 차들은 잘 닦인 도로 위에서 마음껏 속력을 낸다. 오랜만에 듣는 자동차 경적이 자꾸만 신경을 닦아세운다. 인류의 편의를 위해 잘 닦인 이 포장도로가 여태 걸었던 어느 흙길이나 산길보다 힘들다니, 참 기이하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오늘 머물 알베르게가 있는 도시 반대편 외곽으로 향하는 내내 일행들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 그나마 장점이라면, 도심을 가로지르다가 점심을 때울 만한 중국 식당을 발견했다는 정도일까.
얼마나 피곤한지, 구시가지의 노란 화살표를 따라가다 발견한 부르고스 대성당의 장엄한 자태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신부님과 이수는 흥분에 들떠 정신없이 셔터를 누른다. 이수는 욕심껏 사진을 찍은 뒤, 내게 카메라를 넘기고, 자신과 대성당의 모습을 함께 담아 달라고 부탁했다. 건축학도인 이수는 여간해선 결과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자신보다는 대성당에 초점을 맞춰 다시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대성당의 전관을 죄다 집어넣느라 정작 본인은 이쑤시개만 하게 찍히고 나서야 그는 만족했다.
“근데 누나는 왜 사진을 안 찍어요? 그러고 보니까 사진기 자체를 들고 있는 걸 못 봤네.”
내가 찍은 사진을 쭉 보던 이수가 묻는다.
“사진에 별로 흥미 없어.”
“그래도 여행 오면 남는 건 사진뿐이잖아요. 휴대폰으로라도 찍어서 남겨보지 그래요?”
여행을 다니면서 잊을만하면 듣던 말이다. 나는 몹시 피곤해서 ‘나는 글로 남기고 있어.’라고만 대꾸했다. 사실 사진 찍기 귀찮다는 것 외에는 딱히 댈 이유도 없었다. 대체 사진기 없던 시절에는 여행들을 어떻게 다녔대,라고는 속으로만 욌다.
“아아, 누나는 그럴 수 있겠네요.”
이수는 혼자 납득했다는 양 고개를 끄덕인다.
부르고스의 알베르게는 대학 근처의 널찍한 공원 안에 서있다. 샤워 시설도, 침대도 충분하다. 나는 샤워를 마치고 생장 피드포르에서 출발한 뒤 한 번도 세탁하지 않은 ‘갈아입기 전용’ 옷을 빨았다. 시커먼 땟물이 줄줄 흘러나와 옆에 있던 여자가 기겁을 했다.
오다가 점찍었던 중국 식당을 찾아 점심을 먹으러 일행과 시내로 나섰다. 배낭을 벗은 채 걷는 시내는 막 도착했을 때와는 사뭇 달라 보인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다.
중국집으로 가기 전, 신부님의 새 등산화를 사려고 잠시 신발 전문 매장에 들렸다. 등산화나 레포츠 용 신발을 판매하는 곳으로, 대부분의 신발이 수제다. 신부님이 매장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과 상의하며 신발을 고르는 동안, 나는 거리의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했다.
느긋이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드문드문 그보다 더 느긋이 걷는 순례자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그들을 보통의 사람들과 구분하기는 어렵지 않다. 등에 짊어진 큼지막한 배낭과 딱, 딱, 소리를 내며 지면과 부딪히는 지팡이는 눈에 띄지 않기가 더 어렵다. 그들은 일상의 풍경과 섞이지 않고 물 위의 기름처럼 어딘지 붕 떠 있다. 자유롭지만 어딘지 고독한 풍경이다.
그렇게 얼마나 앉아있었을까. 어느 순간 사라졌던 이수가 봉투 가득 체리를 사서 왔다. 우린 나란히 앉아 체리를 나누어 먹기 시작했다. 그때 익숙한 음성이 우릴 부른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보니, 프랑스 예술 영화 초반부의 한 장면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꼬마 소녀 다니엘이 머리칼에 햇빛을 가득 머금고서 씩씩하게 뛰어온다. 아이의 뒤로 다니엘의 부모가 따라오는 중이다.
길 한복판을 점령한 채 다니엘과 포옹으로 반가운 인사를 나눈 우리에게, 다니엘의 부모가 무어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물론 프랑스어라서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때, 듣고 있던 다니엘이 명랑한 목소리로 말한다.
“부르고스, fin.”
그 난리 속에 어딘지 익숙한 단어 하나를 간신히 주워들은 내가 놀라서 말했다. (이제와 밝히지만 고등학교 재학 시절 내가 선택한 제2 외국어는 프랑스어였다. 물론 공부는 전혀 하지 않았지만.)
“부르고스가 끝이라는데?”
이수의 눈이 동그래진다.
“부르고스, 디 엔드?”
이번에는 다니엘이 영어를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때마침 가게를 나온 신부님도 다니엘 가족을 보고 반가워하더니, 상황을 듣고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몹시 아쉬워했다.
다니엘 엄마의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프랑스어 속에 간간히 ‘파리’가 섞인다. 여기서 일정을 끝내고 파리로 돌아간다는 의미인 것 같다. 다니엘은 작별의 키스를 해야 한다며 우리의 뺨에 몇 번이나 키스를 퍼부었다. 다니엘의 커다란 푸른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다. 헤어짐을 솔직하게 슬퍼하는 아이의 순수함 앞에서 우리는 모두 무장해제되고 만다. 다니엘의 부모는 신부님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였고, 보고 있던 이수의 눈시울마저 붉어졌다.
한바탕의 이별을 끝내고, 우리 셋은 기차역이 있는 방향으로 서둘러 멀어지는 다니엘 가족을 오래오래 배웅했다. 다니엘은 몇 번이나 우리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저 애가 저러다 넘어지지나 않을까 내내 걱정이어서, 알아듣지도, 들리지도 않을 한국어로 몇 번이나 ‘앞에 봐, 다니엘! 그러다 넘어질라!’를 외쳤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