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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라게 Oct 23. 2022

온 더 로드 On The Road
#세계여행기

13. 메세타의 나비 - 4 



메세타를 걸으며, 나는 매 순간 꽉 차거나 완전히 비었다. 

나는 모든 이름이 되었다가 아무 이름도 아닌 것이 되었다. 그것이 끝없이 반복되는 동안, 내 안의 크고 작은 울타리들이 올랐다 내리기를 거듭하다가 끝내는 종적을 감추었다. 그렇게 나는 어디든, 무엇이든 채울 수 있는 텅 빈 공간이 되었다. 


메세타가 내게 쏟아붓는 물음엔 한계가 없었다. 모든 의문은 고밀도로 응축된 가정과 경우의 수를 감추고 있었다. 나는 그 질문들의 답과 답이 아닌 것들의 간극을 방황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 옆에서 나란히 헤매는 누군가를 발견한다.  그/그녀는 아마도 나이거나 내가 아닐 것이다. 내가 알고 있던 나이거나, 내가 나인 줄도 몰랐던 나일 것이다. 


우리의 기억과 과거와 현재와 생각은 서로의 끝과 처음을 묶으며 끝없이 이어진다. 마디마디 이어지는 그 가느다란 실 위를 걸으며, 나는 죽어가는 동시에 살아간다. 자아도 타자도 아닌 무언가가 된 채, 떠도는 공기처럼, 천천히 일어나는 사건들의 나열처럼, 한없이 팽창하는 우주처럼, 어떤 위대한 예언자도 감히 읽은 적 없는 까마득히 먼 미래의 기록처럼, 혹은 망각이 거두어간 과거의 어느 지점처럼. 

또는 흙으로, 혹은 물로, 혹은 어느 작은 새싹의 가느다란 뿌리 한 줄기로. 




여름 한낮의 태양이 지글지글 끓는다. 

아지랑이로 뒤덮인 길은 뒤틀리고 일그러진다. 

눈앞이 아찔하고 현기증이 돈다. 

입이 바싹 말라 갈라지고 마른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는다. 

이마에서 흐른 땀이 눈썹에 맺힌다. 

눈알이 따갑다. 

머릿속은 진공 상태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뭔가 느꼈더라도 그것을 정보로 변환하여 뇌에 입력할 만큼의 기력이 남아있지 않다. 


두 다리는 흡사 선장도 항해사도 조타수도 사라진 유령선처럼 멋대로 나아갈 뿐이다. 녹음이 익는 냄새와 달궈진 흙의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나의 오감은 현재 그저 지구의 모든 자극이 지나다니는 통로에 불과하다. 


어느 나무 그늘 아래 누워 가쁜 숨을 몰아 쉬던 도중 잠깐 이성이 돌아온다. 깨닫고 보니,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내 옆엔 여전히 그/그녀가 앉아있다. 

그/그녀는 환영처럼 모습을 바꾸는 중이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되었다가도, 교복 치마 밑에 체육복을 겹쳐 입은 채 학교 계단 난간을 미끄럼틀 삼던 중학생의 나이기도 했다. 사랑과 이별을 겪으며 깊이 침잠해 있던 나였다가, 바로 어제 숙소에서 흙먼지로 더러워진 옷을 빨던 내가 돼있기도 한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무엇일까? 


[너는 꿈이야.]


나는 아아, 하고 납득한다. 그리곤 울창한 나뭇가지 나뭇잎들 틈새로 자잘하게 스미는 햇빛을 응시한다. 

그/그녀가 말한다. 


[주머니 속에 실타래를 넣어 두었어.]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본다. 그러자 솜사탕처럼 금세 녹아 사라져 버릴 듯이 연약한 뭔가가 잡힌다. 


[그것은 늘 거기 있었어. 하지만 세상도 시간도, 심지어 너와 나마저도 그것을 잊었지.]


나는 그것을 이제 풀면 거냐 묻는다. 그/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그 실타래를 풀어 되돌아가기에, 우린 너무 먼 길을 왔어. 그때와 지금 사이에는 수천수만 개의 미로와 막다른 길이 놓여있지. 우리의 실은 그 어디쯤에서 이미 엉켜버렸을 거야. 그래도 괜찮아.] 


나는 그게 어떻게 괜찮을 수 있냐고 화를 냈던 것 같다. 완전히 길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 지경이 되도록 왜 가만 두었냐고도 따졌던 것 같다. 

그/그녀는 말했다. 


[실타래는 엉켰지만, 여전히 이어져 있으니까. 너와 내가 그 양 끝을 잡고 있고, 그걸 놓치지만 않으면 돼. 그럼 우리는 서로의 고동을 느낄 수 있어.]


그/그녀는 어느덧 오래전에 잊은 옛 연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는 여전하다. 내가 너무도 좋아한 그때의 모습 그대로다. 나는 문득 그와 연인이었을 때에도 해본 적 없던 말, 아니 내 안에 있으리라 생각지도 못한 말들을 꺼내기 시작한다. 


「난 네가 참 싫었어. 나와는 너무 달라서.」


그가 날 물끄러미 본다.


「나에게 너는 부수고 싶은 거울이었어. 나의 싫은 점, 나는 못하는 일들만 속속 비추는 그런 거울. 그래서 산산조각 내고 싶은데, 한편으론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낱낱이 들여다보고도 싶은 거야. 그러나 들여다봤다간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으니까, 그저 옆에 둔 채 견디고 견딜 뿐이었지.」 


[……]


「너는 지독히도 거짓말을 못했어. 자신의 치부와 약점도 감출 줄 몰라서 스스로를 못 견뎌했잖아.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할 때마다 너의 모든 것을 내던졌어. 나는 결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리고 단 한순간도 너의 우울과 어둠으로부터 눈 돌리지 않았어. 그러면서 온통 상처 입고 헤져도, 그렇게 넝마가 된 채로 또 누군가를 사랑하길 멈추지 않았지.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다 버거울 만큼.」


그는 관계에서 만큼은 매 순간이 치열한 사람이었다. 무심해지느니 차라리 상처 입는 편을 택했다. 그리고 받았던 상처가 낫는 동안 더 단단해졌다. 새 살이 돋거든, 섣불리 가보지 못했던 길을 선택해볼 만큼. 

누군가에게 온 마음을 쏟으며 재만 남도록 자신을 몰아붙이고 난 후에도, 그가 사람에게 무관심해지는 일은 결코 없었다. 불사조처럼, 그 행위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을 구하리라는 사실을 본능으로 알 듯이. 하지만 곁에서 휘말리던 나는, 자꾸만 내 안의 뭔가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너는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을 통틀어 가장 용감하고 무모한 사람이었어. 나는 그런 네가 싫고, 두렵고 그랬어. 누구에게도 진심이길 어려워하고, 스스로조차 온전히 바라보지 않으려 드는 못난 날 들킬 것만 같아서.」


다시 그/그녀의 얼굴을 한 이가 말한다. 


「모두 과거형이 되었네. 이제는 누군가에게 너를 들켜도 두렵지 않은 걸까?」

「아무래도 좋아.」

「어떻게?」

「그런 나를 가장 들키기 싫었던 이에게 결국 들켰다는 걸 이제는 인정했거든.」

「누구에게 들켰는데?」

「나.」

「……」

 「그런데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그러니까 다 괜찮아.」


그러고서 아마 나는 깜빡 잠이 들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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