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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주리 Jan 30. 2023

긴 생각 6

<꿈을 꾸는 사람의 글쓰기>

꿈이 좋다. 무언가를 바랄 때 말하는 꿈도 좋고, 잘 때 꾸는 꿈도 좋고. 신기하거나 웃긴 꿈을 꿨을 때 그것에 대해 얘기하는 것도 재밌다. 보통은 얘기하고 곧바로 까먹어버리지만 (얘기하는 중에 까먹는 경우도 있다.) 간혹 임팩트가 컸던 꿈들은 나중에도 종종 생각나곤 한다.


어떤 꿈을 꿨으면 좋겠다 하고 잠든 적도 많았다. 그러면 가끔, 아주 정말 가끔 그게 이루어졌다. 마법을 쓴다거나 떠난 강아지를 다시 만난다거나 그냥 친구들과 재밌게 노는 꿈들. 그만큼 악몽도 많이 꿨지만 무서운 한 순간만 넘기면 악몽만큼 재밌는 얘깃거리도 없지 않은가. (아니면 말고...)


한 번은 꿈에서 미래의 나와 만났다. 어딘지도 모르는 하얀 복도였다. 마주친 우리는 서로 알고 있던 사이처럼 자연스레 얘기했는데, 미래의 나는 아주 추레하고 피곤한 얼굴이었다. 그는 거칠거칠한 얼굴로 내게 다가와서 대뜸 '불행하게 살아달라'라고 말했다. 


불행하게 살라니?


어리둥절한 내게 그는 '미래의 나를 위해서 지금의 너는 불행해져야 한다'고 얘기했다.




시를 쓸 때, 내가 가장 먼저 하는 건 내 불행함의 목록을 나열하는 것이다. 실망감, 열등감, 조급함, 답답함, 모멸감. 성실하지 못한 내 이력이나 생각이 짧았던 순간들에 대한 후회. 말실수들. 내가 한 멍청한 잘못들. 자기혐오를 비롯한 온갖 부끄러운 것들.


그 불행한 감정들은 적어도 시에서는 솔직해서, 내가 나에 대해 가감 없이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스스로를 다그치거나 채찍질하는 수단이기도 했고. 힘들고 복잡한 감정들을 내려놓고 풀어볼 수 있는 도피처였다.


시를 가장 많이 썼던 때, 나는 혼란스러웠고 자주 슬펐다. 인간관계는 어렵고 장래는 불투명하고 나는 게을렀다. 누가 귀신같이 내 시를 읽어주길 바랐다. 보여주질 않았으니 아무도 읽을 수는 없었겠지만. 그냥 어떻게든 읽고 아무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라는 문학은 어렵고 나는 모자라서 누가 읽기엔 어렵고 내걸 보여주기엔 부끄러웠다. 결국 나만을 위해서 썼던 거다.


그러던 어느 날, 시를 쓰다가 문득 홀연해졌다. 글을 쓰면서 우울했던 감정이 돌연 사라졌다. 불현듯 깨달음을 얻고 종교에 귀의하는 사람들처럼 평온했다. (물론 깨달음 같은 건 없었지만...) 그냥 '내 삶이 그렇게 불행한 삶도 아닌데'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둑을 무너뜨린 것처럼 감정들이 순식간에 쓸려갔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감정에 휘말려 시를 쓴 적이 없다. 슬픈 감정을 쌓아두질 않으니 시로 위로받을 필요도 없었다. 내게 남은 건 시를 써야 할 것 같다는 의무감뿐이었다. '글을 쓰는' 내게 있어서는 슬럼프인 셈이다.


나는 슬럼프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슬럼프가 슬럼프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자신이 슬럼프라는 걸 스스로 선언하기 전까지 슬럼프는 없다. 그리고 인정한 순간 본인을 계속 수렁으로 밀쳐낸다. 온갖 핑계를 만들고 압박하고 괴롭히니까.


이전까지는 스스로가 무적인 셈이라 여겼다. 일상을 살아가는 내가 힘들면 글은 호황기를 맞이하고, 반대로 글이 잘 안 써지면 내 일상이 행복하다는 뜻일 테니까. 좋은 게 좋은 게 아니겠냐는 논리의 합리화였다.


그러나 믿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부진한 모습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미래의 내가 얘기했듯, 내가 불행하지 않다고 해서 글을 쓰지 않으면 '글을 쓰는 나'의 미래는 없다. 남루한 모습의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제발 불행하게 살아달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미래의 내가 나에게 한 말은 '불행 속에 스스로를 집어던지라'는 말이 아닐 테다.


'글을 쓰는 나'를 살려달라는 말이다. 스스로 '불행하지 않다'고 여겼던 것은 어쩌면 불행을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인간관계는 어렵고, 장래는 불투명하고, 나는 게으르다. 변한 건 글을 향한 나의 태도지, 환경이 아니다.


1년 전에 이것과 비슷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슬럼프라는 걸 인정하지도 않았다. 왜 그랬는지 이해되지 않지만 솔직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글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지라도 글을 쓰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주체는 글이 아니라 나여야 한다. 솔직한 글을 쓸 게 아니라, 솔직한 나로 살았어야 했다. 딱히 결연할 필요 또한 없었다. 행복감만 가지고 살거나, 불행함만을 가지고 글을 쓰는 건 너무 편협하고 바보 같으니까. 불행한 감정들을 애써 외면하지도 않고, 행복하다고 글을 멈추지도 않는 나로 사는 거다.


꿈을 꾸고 싶다. 내 꿈이 열정을 자꾸 자극해서, 나를 절로 움직이게 만드는 거짓말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똥꿈을 꾸고 싶다. 터무니없고 웃겨서 지나가는 누구라도 붙잡고 말해주고 싶은 꿈. 그런데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싶은 꿈.


글을 처음 쓸 때는 글로 돈을 벌고 성공하고 싶었다. 대학교에 가서는 내 글이 읽히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지금은 글을 쓰기라도 하고 싶다. 꿈을 꾸는 사람으로서, 재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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