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종주리 Dec 30. 2022

긴 생각 5

<공포에 대하여>

공포 영화를 좋아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공포 영화를 굉장히 잘 보는 편이다. 한 때는 밤마다 영화 한 편씩을 보고 자는 게 취미였는데, 마땅히 볼 게 없으면 공포물을 보곤 했다.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생각할 게 많고 어둡고 진지한 영화들은 자기 전에 보자니 피곤하고, 생각 없이 웃길 뿐인 코미디는 취향에 안 맞았다. 나는 뭐든지 적당히 좋아하고 적당히 싫어하는데, 이상하게도 공포 영화가 그냥 적당했다.


어릴 때부터 공포물을 잘 봤던 건 아니다. '공포'라는 개념으로 좀 확장시켜 보자면... 나는 굉장한 쫄보였다. 밤에 자다가 깨기라도 하면 난 삽시간에 공포에 휩싸였고, 울면서 엄마를 불렀다. 어떨 때는 소리 내어 우는 것조차도 못했던 것 같다. (부르르르...) 침대 밑, 장롱 위, 이불속, 등 뒤, 다리 사이가 전부 소름 끼치도록 무서웠다. 심지어는 방에 뭔가를 세워놓거나 걸어놓지도 못하게 했다. 달빛에 그림자가 늘어져서 벽에 비치면 괴물이나 귀신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정말 아무런 계기 없이 나는 공포감을 못 느끼게 됐다. 처음엔 바이킹이었다. 당시 나는 바이킹이라면 '중앙에 타도 오줌을 지릴 수 있다.'라고 진지하게 걱정했어야 할 정도로 무서워했다. 내가 탈 수 있는 놀이기구라면 딱 '제멋대로 돌아가는 찻잔' 정도였으니까... 친구의 손에 붙들려서(누구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 맨 끝자리로 갔을 때는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막상 기구가 시작되고 보니, 이상하게도 재미있었다. 아주 엄청나게.


공포증이 없는 사람


돌아보면 나는 고소공포증 같은 게 없는 아이였다. 술래잡기를 할 때면 놀이터 꼭대기에 숨어있었고, 고층 빌딩에서도 밖을 잘 내다봤다. 어쩔 때는 아파트 옥상을 열고(그때는 흔히 열려있었다.) 나가서 아래를 멍하게 내려다보기도 했다. 발아래가 빙글빙글 돌며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찌르르, 오금이 저린 느낌을 받으며 난간에 걸터앉곤 했다. 변태 같지만(?) 그런 걸 재밌어했던 것 같다...


놀이기구를 난데없이 잘 타게 된 이후로, 그렇게 무서워하던 귀신도 별 것 아닌 것처럼 느끼게 됐다.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더라도 오싹한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는데, "가던 길 가쇼." 하게 되었다. 귀신과 마주한다는 생각을 할 때 방어기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굳이?' 또는 '얼마나 할 짓이 없으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 어두운 골목길 어귀를 걸어갈 때 '귀신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귀신이 굳이 나한테?'

'얼마나 할 짓이 없으면 여기서 기다렸다고?'


그럼 귀신이라는 작자가 굳이 나한테 그럴 이유를 떠올리게 된다. 또는 이 녀석이 날 기다리면서 뭘 했을까를 상상해 보거나. 담벼락 벽돌 수 세기 같은 걸 하지 않았을까... 귀신은 핸드폰도 없잖아, 하면서.


귀신을 본다면 이렇게 질문하자.


비슷한 느낌으로, 공포물을 볼 때 나는 묘하게 촬영장을 떠올린다. 간혹 비하인드씬에서 배우들이 분장을 한 채 막춤을 추는 장면을 상상한다거나, 배우 A가 어려운 분장을 위해 4시간 동안 앉아있었다느니 하는 내용들을 생각할 때면 무섭다기보다는 신기하고 재밌을 뿐이다. (애니메이션도 같은 논리다. 어떻게 그렸을까? 그리는 데 얼마나 걸렸을까?) 영화를 다 본 뒤엔 무서운 장면을 돌려보며 영화를 멈춰놓고 이 녀석이 어떻게 생겼나, 구경하기까지 한다. 가장 공들인 장면일 텐데, 열심히 봐주는 게 인지상정이겠지.


그렇다고 영화에 집중을 안 한다는 건 아니다. 사실 공포영화가 사람을 무섭게 하는 방식은 '깜짝 놀라게 한다'가 전부 아닌가? 그래서 나는 깜짝 놀라게 할 뿐인 영화보다는 서스펜스적인 요소가 많이 가미된 것을 선호한다. 내가 잘 놀라는 데 선수이기 때문은 절대 아니다. 아무튼 긴장감 넘치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게 좋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공포보다는 스릴러를 좋아한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귀신도 피곤하겠다.


귀신은 있을까? 나는... 있다고 믿는다. 영적인 기운이나 퇴마 의식이라든가 그런 걸 믿는 건 아니고. 단순하게 귀신이 없으면 좀 재미없을 것 같아서다. 이런 토론에 진심인 신학자와 과학자를 불러놓고 싸움을 붙여보고도 싶다. (단!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말해!) 귀신이 있으면 어떠하리, 없으면 어떠하리. 믿고 말고는 본인 선택이다. 귀신도 동네방네 나타나기엔 좀 피곤할 것 같아.


그래서 <곤지암>이나 <주> 같은, '귀신을 부르는 행위'를 하는 영화는 몰입이 잘 안 된다. 잘 봉인되어 있던 귀신을 꺼내놓거나, 착하게 쉬던 녀석들을 괜히 자극시켜서 사달이 나는 것들 말이다. 이야기가 너무 뻔하게 흘러가잖아. 인간이 죽으면 '그러게 왜 건드렸어'가 되고. 귀신이 퇴치되면 '에이, 재미없어'가 되니까.


부동산 중개업자 : 이 집은 저번에 살던 가족들이 단체로 자살을 한 집이고, 5년째 아무도 살지 않았습니다.주인공 (해맑음) : 와우, 그것 참 쌈@뽕한데요? 바로 계약하시죠.
귀신 (사춘기) : 그만! 나 좀 혼자 있게 두라고!


난 무서운 얘기를 좀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데 여태까지 한 번도 유치하지 않은, 그러니까 정말 그럴듯하게 무서운 얘기를 들은 적은 없다. 사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긴장된 반응이 재밌다. 이야기 내용 자체는 뒷전인 셈이다. 내가 이야기를 주도하게 되면 나는 보통 가위눌린 얘기를 한다. 심심찮게 가위를 눌리기 때문인데, 가위를 눌려도 귀신을 본 적은 없다. 보더라도 신기해할 것 같고.


무서운 얘기를 하면 귀신이 찾아온다는 미신도 있지 않은가. 근데 누군가 내 뒷담을 하면 나도 찾아가서 듣고 싶을 것 같다. 잘 살고 있는(???) 귀신 안 건드리면 피해 볼 일도 없다. 반대로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나한테 해코지하면... 오 이건 좀 많이 짜증 나겠는걸?


무서운 기분을 떨쳐내는 방법


나는 '파국적인 생각의 전개'를 지양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조금 메스꺼운 기분을 느꼈다고 해서 '아, 토할 것 같아, 쓰러질 것 같아, 미칠 것 같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편한 사람들한테는 지나가는 말로 엄살 부릴 수 있겠지만 기분이 생각을 지배하면 안 된다는 게 핵심이다. 기분은 기분일 뿐이다.


기분이 태도가 되면 안 된다는 말이 있듯이,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고 해서 두렵고 긴장된 태도를 가지는 건 좋을 게 없다. 어두운 집에서 샤워를 끝내고 뭔가 서늘하다 싶으면 나는 "아, 옷 좀 입고 봅시다. 피차 부끄러우니까. 근데 뭐, 좀 자신 있긴 하죠 ㅎㅎ" 라며 헛소리를 하곤 한다. 보다 창의적인 헛소리를 할수록 금방 괜찮아지는 셈이다.


'파국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비단 무서운 기분을 떨쳐내는 것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통용되는 법칙이다. 답답하거나 불안하다고 해서 '죽을 것 같다'라고 생각하는 건 마음이 약해서가 아니다. 생각이 악순환을 할 뿐이다. 생각도 습관이다. 사실은 무서운 기분이든, 어떤 기분이든 별 게 아니다. 그런 면에서 염세적일 것까진 없지만, 조금은 허무하게 생각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겠다.


당장 공포를 느끼는 사람한테 "이게 뭐가 무섭냐?" 하는 건 일종의 폭력이지만, 너무 많은 공포를 느끼는 건 어지간히 피곤한 일이다. 반대로 아무런 공포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문제겠지. 나는 귀신은 하나도 안 무서워하지만 나를 실제로 아프게 하는 주삿바늘 같은 건 좀 무섭다. (사랑니 빼러 갔다가 눈물만 잔뜩 뺀 썰 푼다...)


아무튼, 공포는 자연스러운 거니까 적당히 생각하고 이겨내자. 누구나 통통 튀는 자신만의 극복법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긴 생각 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