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감상평 15
*<파묘> 영화에 대한 크고 작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음.
오컬트
"오컬트 사랑하지 마."
"그게 뭔데."
"오컬트 사랑하지 말라고."
"... 그니까 오컬트가 뭔데."
그렇다. 나도 오컬트가 뭔지 설명하라고 하면 대충 얼버무리지만, 우리 모두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그거. 점성술이라든지 강령술이라든지 요술이나 요괴, 마법(그럼 '해리포터'도 오컬트인 거지...?) 등이 소재로 나오는 그것이 바로 오컬트라고 할 수 있겠다. (아니면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한다.)
과학도 잘 모르고, 오컬트도 잘 모르고 그냥 이야기에 몰입을 잘할 뿐인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 이런 부류의 영화를 접할 때는 얼마나 흥미롭게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느냐에 집중하는 편이다. 내가 느끼기에, 우리나라 사람들 특유의 '정답을 갈구하려는 욕구'와 '오컬트'는 상충될 수밖에 없는 성질이다. <곡성>의 범인이 누구인가를 따져 묻던 사람들에게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은 결코 만족스러운 답이 아닌 것처럼.
천사와 악마가 충돌하는 서부 문화권의 오컬트와는 다르게 K-오컬트는 좀 더 현세적이며, 토속적이며, 민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다. 악마를 숭배한다던가, 세계의 파멸을 이끌어올 마왕을 소환한다던가 하는 범지구적인 스케일이 아니라... 구천을 떠도는 유령의 한을 풀어주는(보통 억울한 일을 당한 우리 민족이거나 가족이다.) 내용이 주가 된다는 뜻이다. 물론 예외는 있겠다.
나는 실제로 무당을 본 적 없지만, 영화에서 보는 한국의 무당들은 칼춤은 추지만 칼질은 하지 않고, 피는 많이 보지만 자기가 흘리진 않는다. 그러니까 악마나 귀신을 죽여버리는... 이미 죽은 걸 어떻게 또 죽이겠냐마는... 뭔가 격렬한 전투를 통해 '퇴마'를 결행하는 느낌은 아니다. 귀신도 어쨌거나 사람이었고, 가족이었고, 같은 민족이었으니까.
한국에서 귀신이라는 개념은 때때로, 힘들고 어려운 현실에 대한 원인이다. 하는 일마다 안되고, 꿈자리가 뒤숭숭하고, 삶이 불편할 때, 한국인들은 귀신을 찾는다. 그러니까 우리가 힘든 이유는 우리 근처의 귀신이 한이 많기 때문이고, 이 한을 풀어주면 우리가 편안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제사, 차례 등 '영'이라는 존재가 '화나지 않도록' 하는 모든 이유가 따지고 보면... 현세를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가 심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조금이나마 더 편안한 삶을 영위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 오컬트는 신비한 대상 또는 현상 그 자체를 이야기하지도 않고, 특정 종교가 얽히고설킨 비인간적 존재와 결투를 하거나 일방적인 학살을 당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들의 억울한 이야기를 파헤치는 내용이 주가 되는 경우가 많을 테다. 그 내용 중에서 무속신앙이 소재로서 교묘하게 버무려지는 것이다.
<파묘>도 비슷한 기점에서 비롯된다. 하는 일이 도통 잘 안되고, 어딘가 이유 모르게 아픈 사람들은 무당을 찾는다. 초반 5~10분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파묘>는 무당과 풍수사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아주 친절한 내레이션으로 설명해 준다. 악마를 숭배하는 집단이 꿍꿍이를 벌인다던가, 재앙의 불씨에 대한 맥거핀을 뿌려놓는다던가 하는 단편적인 내용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떠올리는 '영'에 대한 기초적인 개념을 조정하는 느낌이었다.
한을 풀다
자손이 숨기고 있던 할머니의 틀니를 돌려놓는다고 해서 안되던 일이 갑자기 잘 될 거라는 보장도, 조상의 묫자리를 이장한다고 해서 아프던 사람이 깨끗이 나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조상의 한'이라는 게 <파묘>를 보는 데 있어서는 꽤나 중요한 단서가 된다.
"틀니가 없어서 제삿밥을 씹지를 못하겠네."
"그럼 나는 할머니를 뭘로 기억해요."
"예끼, 이 놈! 너는 내 자손이지만 네가 하는 일이 전부 안 될 것이며 가족 중 하나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정말 현대의 과학으로는 원인을 파악하기 힘든 희귀하고 치료가 어려워서 아주 고생고생 쌩고생을 해야 하는 유전병에 시달릴 것이며 태어날 때부터 심신이 약하여 온갖 잔병치레를 겪을 귀염둥이 막내는 오밤중에 거품을 물고 경련을 하여 온 가족의 걱정을 주렁주렁 달고 살 것이고..."
조상의 한은 생각보다 무서운 것 같다.
<파묘>의 줄거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풍수사 '상덕'(최민식 분)이다. '영근'(유해진 분)과 시시콜콜한 돈 이야기를 하는 부분을 보면 평범한 소상공인처럼 느껴지면서도, 막상 작업을 시작하면 누구보다 '직업정신'을 내세우는 사람이다.
상덕은 동시에 모든 진실을 찾아 나서는 사람, 즉 해결사다.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말이다. '여우가 범의 허리를 꺾었다.'는 말, '철혈단'의 존재, 다이묘의 정체와 퇴치까지 모두 상덕이 중심이 되어 극을 전개한다. 상덕은 생각보다 '땅 파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진짜 먹는다...), 자신의 가진 직업의 존재 의의를 나름대로 정의한 모양으로 보인다. 그에게 '땅'이란, 우리가 그냥 딛고 서있을 뿐인 바닥이 아니다. 그가 살아갈 수 있는 생계 수단이자, 그가 능통한 전문 분야이자, 결혼을 앞둔 딸에게 내어줘야 하는 삶의 터전이다.
영화의 중간 지점을 기점으로 앞부분까지는 네 인물이 맞물리며 각각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었지만, 뒷부분부터는 그 양상이 크게 달라진다. 쇠말뚝의 존재와 의미를 알아낸 상덕이 극을 이끄는, 판타지성이 짙은 액션물에 가깝게 된다. 사람들의 호불호가 갈리는 부분은 아마 이 지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상덕은 친일파 자손의 조선총독부를 향한 경례와, 보국사 창고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의 결의와 최후를 직접 눈으로 마주한 인물이다. 조상, 사실상 우리 민족의 한, 스스로 몇 번씩이나 되새기던 직업윤리, 딸에게 물려주고 싶은 세상까지 모두 얽히는 과정에서 상덕은 무의식적 집착에 가까운 소명 의식에 사로잡힌다.
상덕이 '독립운동가' 격의 비장한 마음으로 쇠말뚝을 뽑아내고 싶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영근과 화림 역시 거창한 대의보다는 개인적인 이유로 합류했다는 게 납득이 된다. 그건 <파묘>의 기점, 더 정확하게는 '나 자신의 미래에 대한 안녕'이다. 상덕의 딸이나 봉길을 위한다는 각각의 개인적인 욕망과 그들이 해 온 일에 대한 뚝심. 그 쇠말뚝을 뽑고 다이묘를 퇴치한다고 해서(퇴치한다는 생각까지는 못했겠지만) 현실이 나아질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렇게 믿고 일을 하며 살아온 이들이기에 도달할 수 있는 행위다.
그 사적인 욕망이 결론적으로 일제의 잔재를 뽑아내는 공동체적인 비전으로 이어지는 것 또한 <파묘>의 재미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이라는 건 어쨌든 추상적인 개념이고, 한풀이를 받는 사람(사람이었던?)보다는 한풀이를 행하는 사람에게 주가 맞춰진다고 생각한다. 막연하지만 '이 정도면 한이 풀렸겠다'싶은 느낌. '나 이 정도로 정말 정성을 다했어요.'라는 느낌. 몰라서 하는 말이지만, 일정 부분은 개개인의 양심에 달려있는 게 아닐까.
가족들의 무덤에서 금품을 슬쩍하는 영근의 모습이나, 풍수 의뢰의 위험성을 따져 묻고 건설 중인 건물 앞에서 시비를 거는 상덕의 모습, 의뢰비 떼먹는(으로 추측) 화림의 모습, 좀 더 넓게는 관뚜껑을 열고야 만 장례식장 직원의 모습까지. 우리는 자신들의 이익과 욕망을 위해서는 각각의 양심을 타협하고 어겨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죽은 사람의 한을 풀어준다는 건, 살아가는 사람이 자신의 이익에 해가 가해지는(혹은 그럴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자신의 양심을 다잡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은 잘 없다. 마찬가지로 조상이 크게 노할 일도... 잘 없다고 생각한다.
<파묘>는 분명한 항일 의식을 띄고 있는 영화다. 영화 내내 꼼꼼하게 깔린 복선과 상징들이 '나 이런 영화니까 모르면 안 돼!'라는 식으로 전해진다. 등장인물의 이름들이 전부 독립운동가들이고, 차 번호판이 광복절, 삼일절이고 하는 디테일들은 영화를 즐기는 또 다른 재미다. 그런 이야깃거리가 가득한 영화는 언제나 좋다.
그런데 나는 그러면서도, 민족적인 한 같은 거창하고 포괄적인 개념보다는 각각의 개인적인 모습에 눈이 갔다. 평범한 일상을 살면서 일제 잔재에 대한 반발감이 생겨날 일은 흔치 않다. 한창 NO JAPAN으로 시끄러울 때는 그랬을 수 있겠지만...
단순하게 감상을 정리하면, '양심에 손을 얹고 나는 조상이 노할 만한 짓을 했는가?'를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였다는 거다. 난 자식이 없지만... 잘 먹고 잘 사는 자식새끼들을 보는 게 인생의 낙이라는 말이 있듯이. (진짜 그런지는 모름) 내 조상들의 소소한 한을 풀어주는 방법은, 내가 올바른 도덕적 가치관을 지키며 잘 살아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 저질러 온 부끄럽고 떳떳하지 못한... 크고 작은 잘못들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서.
묻혀있던 것을 꺼내다
<파묘>는 우리가 일상에 치여 지내며 잊고 있던 것들을 되새기게 만드는, 단어 그대로 묻혀있던 것을 꺼내게 만드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오컬트는... 각광받는 분야는 결코 아니다. 공포영화 자체가 대체로 그렇지만, <파묘>가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건 장르적으로 상당히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곡성> 이후 잠잠히 묻혀가던(당연히 영화는 꾸준히 나왔겠지만 흥행할 수는 없었던) 오컬트를 양지로 퍼올렸다는 느낌이다.
영화적으로는 오컬트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대중성과 장르성은 혼합되기 어렵다. 그러나 장르가 소멸하지 않기 위해서는 대중성이 분명히 필요하다. 대중의 관심은 장르가 가진 매력이나 색깔을 자꾸만 옅게 만들지만, (그게 마음에 안들겠지만) 거시적으로 볼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장르의 힘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파묘>가 서양 오컬트와는 다른 독자적인 매력의 'K-오컬트'에 대한 관심의 신호탄이 되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