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타인마인드 Dec 03. 2021

너의 위로가 나를 아래로 당기진 않는지

그냥 생각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우울한 현대사회"


"집단 우울증 앓는 한국사회"



참 힘든 한국사회, 현대사회이다. 거기에 코로나까지 벌써 2년째 말썽이다. 위드 코로나 시행 이후 확진자는 가파르게 상승 중이다. 



일일 확진자 5,266명 / 위중증 환자 733명 (12월 02일 0시 기준)



상당히 어지러운 부분이다. 코로나 장기화와 거리두기 정책 등으로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힘든 날들을 보낸다. 코로나 발발 이후 우울감을 느끼거나 우울증이 있는 비중 OECD 국가 중 1위 (36.8%, 평균 21.8%)




우울한 사회, 늘어난 위로


암튼 사회가 많이 우울해졌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경기 침체, 취업난, 연애/결혼 등 코로나 말고도 우리네를 힘들게 하는 원인들은 너무나도 많다. 20대 대학생인 나에겐 뭐 아무래도 취업 걱정이 1순위다. 이것저것 준비는 하는데 걱정만 태산임; 



그럴 때마다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인다. 같이 툴툴대고,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고, 현실을 욕하며, 서로를 위로한다. 그럴 때마다 꽤나 자주 듣는 말들이 있다.



"잘하고 있다"


"그럴 수 있지."


"우리 나이대가 다 그렇지 뭐."


"너보다 못한 사람도 많더라."



너도나도 '위로'라는 것을 전달할 때 즐겨 쓰고 자주 쓰는 표현들이다. 정말 고마운 말들이고, 들을 때마다 많은 힘이 된다. 이 말마저도 해주지 않는 사람이 많다. 나의 힘든 이야기를 털어놓다 보면, 상대가 자신을 감정 쓰레기통이라고 느낄 때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를 위한 이야기를 해준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너의 위로가 나를 아래로 당기진 않는가


하고 싶은 말은 뭐 제목 그대로다. 그 말들이 정말 위로의 말인가 궁금했다. 의도에 대한 의문은 아니다. 내 사람이 힘들어하는데 거짓으로 위로하진 않을 테니. 근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딜 가든 비슷한 위로의 표현을 자주 들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말하는 고민이 비슷했기 때문일 수 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어떻게 반응할지 어려웠기에 그렇게 말했을 수 있다.



누군가는 세상을 삐뚤게 바라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 번쯤 아래와 같은 생각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위로의 말들을 한 번 다시 생각해보자.



"잘하고 있다."

내가 뭘 잘하고 있는지 그대가 어떻게 알까. 우리는 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인걸. 잘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도 뭐 위로를 받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를 생각해서 해준 정말 고마운 말이지만, 나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 안 하는데.. 



"그럴 수 있지." 

뭐가 그럴 수 있다는 걸까. 그럴 수 있다는 말은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을 때 보통 쓰곤 한다. 굳이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은 경우가 아닐까. 


"00이는 치킨 먹을 때 다리를 안 좋아한대!" "아 진짜? 그럴 수 있지.."


물론 다른 여러 상황에서도 자주 쓰이는 표현이다.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때 쓰는 좋은 표현이지만, 위로받고 싶을 때 이 말을 들으면 기분이 묘하다. 직장 상사에게 시달리고 온 애인이 그에 대한 불만을 쏟아낼 때, 그럴 수 있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혼난다.



"우리 나이대가 다 그렇지 뭐."

이게 진짜 위로가 안된다. 그냥 이 한마디로 퉁치는 느낌이다. 다 그런 거 나도 안다. 그런데 나는 우리 나이대 사람들이 아니라 내가 힘들다고 말했다. 



"너보다 못한 사람도 많더라."

나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기엔 갈 길이 멀다. 그리고 나보다 못한 사람이 누굴까 의문이다. 물론 내가 그 사람보다 나은 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못하는 것을 그 사람이 잘할 수 있다. 누가 더 나은 사람인지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남을 깎아내려가며 위안 삼고 싶지 않다. 그건 진짜 위안이 아니다.    



이런 말들을 듣다 보니 이게 뭔가 싶었다. 별로 위로가 안되고, 마음은 똑같이 불편하다. 왜지? 분명 위로의 말을 들었다. 물론 상황의 해결을 바라진 않았다. 근데 이상하게 자존감이 떨어지네. 그냥 힘든 일 뱉고 보니, 초라한 내가 있었다. 물론 그래도 내 자존감은 낮지 않다. 그래도 2021년은 상대적으로 꽤 낮았다. 그래서 그렇게 삐딱하게 들은 것일지도.



왜 사람들은 비슷한 위로의 말을 전할까?


앞서 언급한 예시들은 누구든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평소에 많이들, 자주들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 왜 사람들은 비슷한 위로의 말을 전할까.



실제로 그대가 잘하고 있을 수 있다. 내가 봤을 땐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 왜 걱정이 태산이냐. 그대로 정진하면 될 것 같은데.

"잘하고 있다."



진짜 우리 나이대 사람들은 보통 다 힘들고 바쁘고 정신없다. 시험 준비, 취직 준비, 창업 준비, 사회생활 등 신경 쓸 것들이 너무 많다.

"우리 나이대가 다 그렇지 뭐."



나도 힘들고 피곤한데 너의 힘듦까지 짊어지기 싫다. 근데 그게 그렇게 힘드냐? 나한텐 별로 안 힘든데 너한텐 그런가 보다. 충분히 그렇게 느낄 법하다. 

"그럴 수 있지."



실제로 그럴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겐 부러움의 대상일 수도 있지 않은가. 누구보다 바쁘고 열심히, 치열하게 사는 그대일 수 있다. 

"너보다 못한 사람도 많다."



더 다양한 이유들이 있겠지만, 이유를 들자면 뭐 이렇지 않을까. 왜냐면 내가 그런 생각으로 말해왔다.



그럼 위로를 어떻게 하란 말인가


필자도 모른다 그건.. 그걸 알면 이미 상담심리계의 거장이 아닐까..

그래도 뭐 개인적으로 생각해보고 노력 중인 몇 가지가 있다.



완벽한 공감에서 나오는 위로는 없다. 

내가 그 사람이 아닌데 그 상황에서 그 사람이 느끼는 감정에 어떻게 완벽하게 공감하나. 이해는 하려고 노력하되, 너에게 토탈리 공감하고 있단 척은 하지 말자. 다 티 난다. 



마케팅도 그렇듯, 위로도 개인화가 필요하다.

마케팅도 초개인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왜냐, 소비자 집단이 아닌 개개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시도를 보여줘야 소비자도 그러한 브랜드의 노력에 답장을 보낸다. 위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집단의 특성을 가져와서 너도 그렇지? 하고 넘겨짚을 때 상대방에게 얼마나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상황은 어차피 잘 모른다. 섣불리 추측하고 예상하지 말고, 그냥 그 사람에 대한 얘기를 하자. 너는 예전부터 항상 멋진 놈이다. 그래도 넌 근성이 있어서 잘 이겨낼 듯? 뭐 이런 거.



정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면 가정을 해보자.

부정적인 상황을 부정적으로 얘기한다고 바뀌는 것은 없다. 서로 속만 상한다. 그러면 애써 그 상황이 가져올지도 모르는 좋은 점을 찾아보자. 사람 일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닌가. 우리는 수많은 전화위복의 사례들을 주변이든, 매체를 통해서든 접해왔다. 침착맨 유튜브에 출연해 주식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최고민수 선생님의 마인드를 활용해 위로를 해보자. "온통 파란불이네? 하지만 추가 매수의 기회를 줘서 감사하다. 오히려 좋아." 상황은 내가 바꿔줄 수 없지만, 다~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다 이거야~ 같이 견뎌보자 인마! 이런 느낌으로 얘기하면 좀 다르지 않을까. 뻔한 말보단 너를 많이 아낀다는 것을 표현하면 좋겠다. 



가수 노라조의 '형'이라는 노래 가사가 참 기똥차다. 참고로 원래 제목은 '변비'다. 심의에 걸려서 바꿨다나.. 암튼 진짜 형이 위로해주는 것 같다. 형도 그랬는데 힘들지? 쇠주 한 잔 하고 견뎌보자. 나중엔 다 추억으로 남더라. 뭐 대충 말하는 게 아니라 상대를 이해하되, 공감하는 척하지 않으며, 무작정 상황을 비난하지 않고, 적절한 개인화가 이루어져 있다. 



작가의 이전글 MBTI? 뉴로마케팅도 있다구요!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