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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사라 Nov 02. 2021

비타민 찬양론자

우연이 불러온 나비효과

 기분 좋은 날. 문득 그런 날이 있다. 그냥 기분 좋은 날. 요새가 그렇다. 가을이 와서 그런가? 아니면 요새 먹은 비타민 때문에 그런가? 문득 정신 차리고 보면 입가에 미소가 자동으로 지어져 있더라. 


 나는 다낭성 난소증후군 때문에 불규칙한 생리주기를 맞추고자 근 3년간 경구용 피임약을 먹었더랬다. 그 덕에 한 달에 한 번 찾아온다는 ‘월경’의 단어 뜻에 딱 맞게 매우 규칙적인 생리를 경험하였으며, 이로 인해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생리 때문에 불안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내놓아야 하던가. 역시 인생에 거저는 없지만, 내 몸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서트 페이퍼에 적혀있는 흔한 부작용이 거진 다 내게 찾아왔다.

 첫 한 달은 ‘내가 불임이라니(?)’라는 다소 과격한 상상에 억눌려 내가 많이 울적해졌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부작용 중 하나인 기분변화였고, 나는 거의 1년 동안 우울한 상태로 지내왔다. 뿐만 아니다.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통증과 피곤함 때문에 직업 특성상 하루 종일 가운을 입고 있는 나는 내 볼펜이 무거운 것인가 하는 생각에 툭하면 가운을 벗어놓고, 다시 입고를 반복하였다.

 의외의 부작용도 있었다. 그건 바로 유방 변화. 가슴이 커졌다. 한 평생을 75A로 살아온 내가 브라컵이 꽉 차고 원래 입던 속옷이 작아졌다. 약간의 미적 요소(?) 일 수도 있었지만, 뛸 때 아프고 그냥 있어도 통증은 있었다. 유방의 변화는 내게 불안감을 하나 더 안겨줬다. 이렇게 유방 세포가 자극을 받아 계속 재생산된다면 이는 유방암으로 이어지지는 않을까?라는 지극히 생물학도 출신의 발상이었다. 하지만 찾아보니 경구용 피임약은 난소암과 유방암의 위험을 오히려 낮춰준다고 하니 걱정은 조금 내려두게 되었다. 


 피임약을 대략 25 통정도 비울 무렵, 나는 부정출혈을 경험했다. 부정출혈 없애려고 약을 먹는데 부정출혈이 웬 말이야?? 가슴 깊이 분노가 올라왔고, 바로 산부인과로 달려갔다. 답은 당연히 피임약의 부작용. 허무하다. 일단 기존 복용 중인 약은 완료하고 한 달 생리 후, 그다음 달 자연생리를 하며 부정출혈의 여부를 살펴보자고 하였다. 만일 약 복용을 끊었는데 부정출혈이 없다면 그리고 그다음 달 약 복용을 재개했는데 부정출혈이 있다면 범인은 빼도 박도 못하게 피임약일 게다. 그러면서 문득 내 몸 건강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챙겨 먹는 약이라곤 피임약밖에 없는 나인데, 종합 비타민을 저렴하게 살 기회가 왔다. 사실 좋다는 비타민을 해외직구로 시켜서 하루 이틀 먹어본 적은 굉장히 많다. 한 번 먹고 속이 너무 쓰려서 혹은 나의 고질적인 역류성 식도염으로 느슨해진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강렬한 비타민 냄새 때문에 먹는 건 이틀이 최대였다. 그런데 새로 구입한 비타민은 그런 게 없었다. 속이 쓰리거나 냄새가 강하지도 않고, 알약이 너무 크지도 않고. 작심삼일인 내가 3일을 넘게 먹다가 문득 깨달았다. 나 기분이 너무 좋아! 


 그렇다. 진짜 범인은 피임약이었다. 피임약은 체내 비타민 다수를 고갈시킨다. 대표적으로 비타민 B6, B9, B12등이다. 알고 있었지만 설마.. 하는 생각이 늘 있었나 보다. 믿지 않았다. 정말 비타민이 신체를 좌우할지는. 먹은 날과 안 먹은 날의 차이를 경험하라는 한 제약회사 비타민의 문구를 진짜 내가 겪게 되다니. 세월이 야속한가? 내 나이가 이제 어느덧 30이 넘어서 그런가? 라며 여전히 비타민의 존재를 완전 믿지는 않았지만, 아예 안 믿기에는 그날을 기점으로 내 삶이 너무나도 달라졌다. 


 나는 피임약을 먹기 시작하던 시점에 얼마 안 있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일을 경험했다. 일이 생각보다 커져 살이 10kg나 빠져버렸다. 그때 딱 새로운 직장에 근무하기 시작하니 내 몸과 마음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매 달마다 새로운 일들을 인계받았고, 집과 직장의 거리도 꽤나 멀어 주변 동료들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일어났어야 했다. 이런 날들이 몇 달간 지속되자 나는 퇴근하면 바로 밥 먹고 잠들기 일쑤였다. 평균 8시에서 8시 반이면 잠들었다. 누적된 피로는 달아날 줄 모르고, 이를 불쌍히 여긴 엄마는 매번 홍삼을 챙겨주시지만 홍삼 빨도 잠시. 나는 하루하루 골골대며 살아갔고 건강검진까지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2년이 지나 비타민을 만난 거다. 비타민, 왜 이제야 왔니? 왜 나에게 더 어필하지 않은 거니?! 

 

 예능프로에서 건강보조 식품을 한 움큼씩 먹는 연예인을 본 적이 있다. 그때는 저렇게 먹으면 배가 너무 부르겠다, 저렇게 먹을 필요가 있나? 하며 다소 냉소적으로 바라본 것 같다. 그런 내가 이렇게 비타민 찬양자가 되었다. 비타민 하소서. 널리 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건 비타민이올시다. 비타민으로 축복받으세요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거예요! 


 몸의 코기토(cogito). 몸은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비타민을 먹으니 체력이 좋아지고, 좋아진 체력은 많은 걸 하게 한다. 이는 곧 정신에도 영향을 미쳤다. 축 늘어져 무기력하게만 있던 내가 비타민을 먹고 퇴근 후에도 눈에 생기가 돈 것이다. 11시까지 똘망하게 깨어있던 적이 언제였던가! 뿐만 아니다. 기운 넘치는 몸은 일터에도 영향을 주었다. 일단 가운을 입어도 어깨가 아프지 않다. 바쁜 날에도 2시에 말을 잃었다면, 이제는 한 4시가 되어야 말을 잃게 되었다.(여전히 말을 잃는 건 너무 바빠서겠지만..) 입맛도 돌았다. 평소 소화가 되지 않아서 구내식당보다는 소량으로 판매하는 요거트나 삼각 김밥 등을 따로 먹었는데, 이제는 구내식당을 간다. 구내식당 밥이 너무 맛있게 느껴져서 오늘의 메뉴를 기다리는 기쁨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주말에 친구를 만나도 마찬가지다. 약속 다음날은 침대에 하루 종일 붙어있어야 회복되는데, 이제는 하루에 약속이 3개가 있어도 이틀 연속 약속도 괜찮다. 


 체력이 좋아지니 퇴근 후 하고 싶던 일들을 실행에 옮기는 추진력도 돌아왔다. 이 글도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주말에는 베이킹을 한다. 완성된 빵들을 보며 뿌듯함을 느끼고, 맛있게 먹어주는 가족들을 보며 감사함을 느낀다. 이렇게 비타민이 불러온 나비효과는 컸다. 마녀의 마법을 받은 냥 잠시나마 20대의 체력으로 돌아가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하고, 이로부터 행복을 느끼다니. 기분 좋은 나날들이 이어지니 어리둥절하다. 이 모든 걸 비타민이 해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내가 힘들었던 건 내 탓이 아니었구나. 그래 내 잘못이 아니었어. 내가 회사에 적응하지 못한다고 느껴서, 내가 겪은 일들을 내가 감당하지 못해서, 내가 우울한 성격이어서 그렇게 힘들었던 게 아니었어. 이 모든 건 피임약이 불러온 비타민 고갈 때문이었어. 


 이렇게 비타민으로 내 존재를 치유받다니. 내가 비타민론자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이유다. 우린 살면서 우연히 마주친 존재로 기쁨을 느끼기도 슬픔을 느끼기도 한다. 나에게 비타민은 내 잘못이 아니라고 일러주는, 내 결핍을 채워주는 존재가 되었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위로. 우연히 시작한 비타민으로 다시 기뻐졌다. 우연이 언제든 내 삶에 오도록 항상 열려있어야지. 무엇이든 다양하게 시도해봐야지. 비타민 하나가 참 거창하게 만든다. 그리고 내가 느낀 기분 좋은 나날들을 다른 이도 느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번만 더 말하고 싶다. 


비타민 한 번 해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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