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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해 Mar 13. 2024

어른은 내비게이션 역할까지만!

운전대는 아이가 직접 잡아야죠

  (라떼는) 시내버스 한 정거장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초등학교를 매일 걸어서 통학했고, 저보다 버스 한 정거장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걸어 다니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비가 오는 날이 아니면 어머님들이 교문 앞에서 기다리는 경우를 보기 어려웠어요.

  요즘은 대단지 아파트가 초등학교를 품고 있으니 통학거리가 훨씬 짧아졌죠. 그런데도 하교 시간엔 교문 앞에 꽤 많은 어른들 북적입니다. 입학 후 처음 몇 번이 아니라 계속요. 직장에 다니는 어머님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잠깐 나오시는 경우도 있고 할머님이 기다리시는 경우도 있고 학원 선생님이 기다리는 경우도 있고요. 보호자가 아예 아이의 책가방을 둘러메고 함께 걸어가는 모습도 흔하고, 간식이 들어 있는 학원 가방으로 바꿔주고 헤어지는 것도 심심찮게 볼 수 있어요. (제 친구 중에도 하굣길 중간에 엄마를 만나 가방만 바꿔 학원으로 가는 친구가 있었는데 당시엔 꽤나 충격적인 풍경이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제 주변인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이미 자기 책가방은 스스로 챙기고 준비물도 등굣길에 문구점에 들러 직접 사가지고 갔어요. 요즘은 도화지, 색종이 같은 준비물은 아예 학교에 비치되어 있고, 초등학생 때부터 사물함에 교과서를 두고 다니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래서인지?) 고학년이 되어서야 책가방을 직접 챙기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어떤 2학년 여학생이 가방을 한 번도 스스로 챙겨본 적 없다고 하길래 어머님께 여쭤보니 가방에 인형이나 스티커 같은 쓸데없는 걸 자꾸 넣으려고 해서 일부러 직접 챙기지 못하게 하신다더군요. 다른 3학년 남학생이 “내일은 엄마한테 가방에 큰 물병을 넣어놓으라고 해야겠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깜짝 놀란 적 있습니다. 직접 할 생각은 없고 엄마를 부려먹다니? 친구 아들이 2학년 때 “우리 반에 엄마가 바빠서 숙제를 못해 왔다는 애가 있어. 엄마가 바쁜데 왜 자기가 숙제를 못해?”라고 했다기에 기특해했습니다. 당연한 말이 칭찬받는 세상이네요.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공부에서도 그런 모습이라 안타깝습니다. 글자를 막 배우기 시작하면서 "이건 뭐예요, 저건 어떻게 읽어요? 왜요?" 폭탄을 날리며 호기심 분출하던 때는 귀찮기 짝이 없었다는데, 클수록 부모님들이 자녀를 귀찮게 하는 모양새예요.


  제가 어릴 땐 내비게이션이 없었습니다. 이웃들 중엔 차가 없는 집들도 있었고 제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저희 집에도 자가용이라는 게 생겼으니 내비게이션 같은 신문물은 상상도 못 했죠. 요즘 아이들은 오히려 그런 상황을 상상하지 못하더군요. 하긴 식구 수대로 자기 차를 소유하는 경우도 있고 차의 크기와 종류도 훨씬 다양해졌고, 차에 별의별 기능들이 탑재되고 있으니까요.

  최소시간, 최단거리, 무료도로 우선 등의 한정된 선택지 내에서 고르거나 그마저도 추천 또는 최적경로 중에 선택하면 되는 게 당연해져 버렸어요. 하지만 편리해진 환경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실감합니다. 자기가 직접 방법을 찾고 고민할 기회도, 우연히 새로운 길을 발견할 기회도 사라졌잖아요.


  예나 지금이나 어른의 역할은 방향 제시까지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의 교통표지판이 내비게이션으로 업그레이드되었을 뿐, 경로를 선택하고 실행하는 건 아이의 몫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부모의 인생에서 아쉬운 점을 보완한 삶을 살아내는 아바타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건 아이들 본인이니까요.

  적어도 운전대는 아이가 직접 잡고 내비게이션을 '이용'해야죠. 어른들은 위험 구간을 지나도록 약간의 도움을 주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효율적인 방법을 두고 굳이 불편을 감수할 필요야 없겠지만 아무 생각 없이 내비게이션만 믿는 건 위험해요. 이상하게 뺑뺑 돌아가는 경로인데도 내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 따라가는 건 바보 같은 일 아닌가요? 심지어 내가 원하는 목적지가 제대로 설정된 게 아니라면요?

  저는 사교육계에 종사하고 있지만 학원도 내비게이션 정도로만 이용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공부는 스스로 해야 하는 거 다들 인정하시잖아요. 내비게이션의 성능은 거기서 거기니까 약간의 차이 때문에 학원 쇼핑하는 것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성공하고, 학원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성적이 오르는 거 맞던가요? 맹목적으로 (몸만) 학원에 다니고 기계적으로 꾸역꾸역 숙제하는 거 안쓰럽지 않으세요? 돈도, 시간도 아깝기만 합니다.


  초등학생 때 교복 입은 언니 오빠들이 시내버스를 타고 등교하는 게 부러워 버스 탑승에 도전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땐 다들 그랬다고 해도 딱 한 정거장이니 버스를 타면 훨씬 쉽고 빠르게 갈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아마 디스코오뎅 하나를 포기하고 버스비를 냈겠죠. 만원 버스에 올라타긴 했는데 중간에 끼어 결국 한 정거장을 더 가서야 내릴 수 있었어요. 덕분에 반대 방향으로 한 정거장을 걸어서 학교에 가야 했죠. 그 이후로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다시는 버스에 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가리키는 길을 무시하고 기어이 내 멋대로 엉뚱한 길을 기웃하더라도 한 번의 시행착오면 충분하더라고요. 직접 깨닫는 기회가 그렇게 소중합니다. 아주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면 두고두고 고집부리고 아쉬워하는 것보다 한 번 혼쭐나는 게 나을 테니까요.


  1등, 부자, 성공을 향한 아우토반에서 경쟁하다 부딪치고 뒤집히고 낙오하고 이탈하는 대신, 우리나라 모든 아이들이 내비게이션을 잘 이용하여 자기가 원하는 길로 안전하고 행복하게 달렸으면 좋겠습니다. 글쎄요, 지금 아이들의 자녀 세대에게는 자율주행자동차가 대세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직은 멀었으니 어설프게 흉내 내지 말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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