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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 Jan 14. 2022

아이들이 방학하면,  엄마는 개학합니다.

52일 채식주의자 9

1년 365일 엄격한 채식 식단을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일주일에 딱 하루만 채식 지향의 음식을 해 먹으며 건강한 생활 습관을 만들어 가자. 당장 실행할 수 있고, 오래 지속가능한 실천만이 삶을 바꿀 수 있다 믿기 때문이다. 지난 화요일은 <52일 채식주의자>의 일곱번째 그린 데이였다.

아이들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다. 벌써 2주가 다 되 간다. 코로나 팬데믹 2년 차, 아이들은 집콕하는 방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답답하다, 심심하다 불평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마음이 든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셋이 하루 종일 집에서 복닥거린다.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들로 온집안이 꽉 차지만 올 방학은 왠지 모르게 평온하다. 


나는 혼자 시간을 보내며 에너지를 회복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된 후 혼자인  거의 없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하루 몇 시간 내 시간이 생겼다. 가족들이 모두 나가고 집안이 적막해지면 내 마음도 고요해졌다. 혼자 있는 그 몇 시간, 그 시간의 고요를 사랑했다. 아이들이 방학을 하면 내 시간은 다시 사라진다. 손이 많이 가는 나이가 지났어도 아이들은 수시로 내 시간 넘어들어 왔다. 방해받고 싶지 않다. 아이들 신경 안 쓰 일에 집중하고 싶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꼭꼭 숨겼다. 혹시나 아이들이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할까봐 두려웠다. 아이들이 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나를 방해하는 게 싫으면서도, 아이들이 내 방문을 더이상 열지 않는 날이 올까봐, 나를 더이상 찾지 않는 날이 올까봐 두려웠다.


방학이 다가오면 마음이 슬슬 바빠졌다. 이번 방학은 뭘 하며 내야 할까 고민하다 보면 방학 시작 전에 이미 스트레스가 쌓여 있었. 학기 중에 못한 것을 보충하고, 재밌고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 그런 게 엄마의 일이라고 믿었다. 기왕 시작한 엄마라는 일, 잘하고 싶었고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방학은 엄마의 능력과 자질을 평가받는 시간 같기도 했다.


여행과 나들이는 양육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았다. 적당한 자극과 다양한 경험이 아이들의 성장과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믿음이 만연하다. 에너지가 은 나는 여행을 하거나, 장시간 외출할 생각만 해도 피로를 느꼈다. 학기 중에는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방학에는 큰  먹고 있는 힘을 짜내 아이들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집밖 활동을 많이 안 하는 아이들은 1박 2일의 짧은 여행, 반나절 나들이에도 즐거워 했다. 방문지 기념품을 하나씩 사 모으며 짧은 여행을 오래 추억했다. 지난 2년 동안은 코로나 때문에(덕분에) 여행이나 나들이에 대한 부담감을 조금 내려 놓을 수 있었다. 외출을 자제하는 사회 분위기를 반기는 사람이 오직 나 한 사람 뿐일까. 아이들 어릴 적에는 억지로라도 외출한 날이 많았다. 나가서 말이라도 잘 들으면 다행이게. 나가면 집에서보다 더 말을 안 듣는 게 아이들이다. 그때는 엄마인  지금보다 열 배쯤 더 힘들었다. 


방학엔 아이들 공부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오랜 외국생할 후 귀국길에 올랐을 때 적어도 공부 때문에 아이들을 힘들고 불행하게 만들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런 생각에 아이 둘을 학원에 보내지 않고 키웠다. 덕분에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과의 경쟁과 비교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고, 시험 점수와 줄세우기에 상처도 덜 받았다. 대신 매일 꾸준히  공부를 시켰다. 일주일에 하루는 온전히 노는 날이었지만 나머지 6일은 예외를 두지 않았다. 첫째 5학년, 둘째 2학년부터 방학 때면 스스로 계획을 짜고, 시간을 정해 자리에 앉아 공부를 하게 했다. 그렇게 온전히 3년을 하고 나니 올 방학엔 내가 공부하란 소리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아이들은 평소처럼 공부를 했다. 방학이라고 굳이 더 하란 말도 안 했다. 특강도 보강도 없는 방학 스케줄이지만 더할나위 없이 충분해 보인다.


아이들 공부 문제로 고민하고, 아이들과 부딪쳐 속상한 날도 점점 줄어든다. 아이들 공부 때문에 내 감정이 상하는 건 아이들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인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공부에 욕심이 없다. 관심 자체가 아예 없는 아이들도 많다. 공부에 관심을 갖고, 욕심을 부리는 건 아이들이 아니라 언제나 부모, 언제나 나였다. 내 마음을 더 내려 놓으니 아이들이 스스로 책상 앞에만 앉아 있어도 기특하다 창찬이 나왔다. 칭찬은 잔소리보다 분명 힘이 셌다. 아이들은 더 이상 공부하는데 내 눈치를 살피지 않는다. 나도 공부하는 아이들을 세심히 살피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 이제 더이상 아이들 공부를 하나 하나 챙기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편한지 모르겠다. 학원에 보내지 않았지만 공부는 꾸준히 시켰고, 아이들이 잘 하고 있나  관리하고 체크하는 건 얼마 전까지 내 일이었다. 지나고 보니 무슨 에너지와 열정으로 그렇게 했나 싶다. 다시 하라면 엄두가 안 날 것 같다. 그래도 지난 3년 관계를 망치지 않고 아이들을 스스로 공부하는 학생으로 키워낸 것에 자부심과 보람을 느낀다. 그렇지만 확실히 이제 그만이다. 여기까지이다.


엄마에게 아이들 방학이란 "삼시세끼"의 시즌이 돌아왔음을 의미한다. 그래도 배달 음식과 밀키트가 활성화 되어 '삼시세끼' 챌린지가 훨씬 수월해졌다. 할 줄 아는 음식 몇 개로 돌려막기 하느라 애들도 나도 지겨웠던 방학 밥상이 그래도 좀 다양해졌다. 아이들이 커서 간식은 스스로 챙겨 먹을 나이가 되고 웬만해선 음식 투정도 안하는 것 또한 큰 변화이다.


이제 방학 2주차. 왠지 이 방학이 수월하고 평온하게 느껴지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엄마로 산다는 게 너무 벅찰 때가 많았다. 외국에서 큰애 6살 둘째 3살이 될 때까지 누구 한 사람 도움 없이 키울 때가 그랬고, 귀국 후 6년을 꼬박 '학원밖 아이들'로 키우고자 애쓰며 살면서도 그랬다. 그런데 모든 게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요즘 이상하리만큼 조용하다. 그런 고요 속에 있으니 엄마인 것도 좀 괜찮아졌다. 이제 엄마도 좀 할만하다. 아마 아이들이 크고, 나도 좀 컸기 때문이리라.


올 3월 중2, 초5가 되는 아이들. 어쩌면 지금은 폭풍전야일지도 모른다. 그래, 아직 샴페인을 꺼낼 때가 아니다. 저 고요의 끝 혹시나 물결이 일렁이고 있지는 않은지 고개를 들어 멀리 바라본다. 하지만 지레 겁먹고 미리부터 걱정하진 않는다. 엄마라는 일은 그런 것이었다. 경중이 다를 뿐 일어날 일들은 일어난다. 거친 풍랑이 일면 배가 뒤집히지 않게 중심을 잘 잡으며 가면 된다. 그러다 파도가 잔잔해지면 잠시 그 고요를 즐기면 된다. 아이들이 커서 각자의 항해를 시작할 때까지 엄마의 항해는 그렇게 이어질 것이다.


W7. The 7th Green Day

최근 "무화과 깜빠뉴"에 빠졌다. 심심한 빵에 더해진 달콤하면서도 쫄깃한 무화과는 궁합이 잘 맞는 것 같다. 빵을 사 두면 식구들이 다 먹어버리는데 이 빵은 인기가 없다. 며칠이 지나도 냉장고에 그대로 남아 있는, 나만 먹는 내 .


점심엔 김치볶음밥을 했다. 그런데 큰애가 밥 위에 달걀 후라이를 올리지 않겠다는 거다. 안 그래도 채식 데이라고 김치만 넣고 밥을 볶았는데 무슨 맛으로 먹냐 하니 그래도 순수 채식 식사를 하잖다. 냉장고를 뒤져보니 감자 튀김이 있어서 에프에 돌리고 김을 잘라 올렸다. 첫째는 감자 튀김은 좀 아니잖나는 눈치였지만, 감자도 야채라는 내 주장을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뭐라도 영양을 더해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과 채식 데이의 의미를 유지하자는 아이들의 생각이 맞섰다. 아이들 마음에 들게 채식 데이 식단을 준비하면 되는 일인데, 그건 내게 '일'이 되니 좀 귀찮게 됐다.


저녁엔 김치 부침개를 하고, 반찬으로 청포묵, 감자볶음, 시금치를 배달시켰다. 날씨가 너무 추워 반찬을 배달시켰는데 아이들이 또 눈치를 준다. 채식 데이 만큼은 환경을 생각해 배달 음식을 자제하자는 거다. 점심 저녁 2연타를 맞으니 아찔하다. 아이들이 하루 종일 집에 있으니 잔소리가 많다. 엄마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아이들 감시망에 걸린다. 방학은 역시 엄마 평가의 시기가 맞다.


어쩌면 나같은 어른, 나같은 엄마에겐 희망이 없는지도 모른다. 식습관과 생활습관을 바꾸고 의식적으로 올바른 가치를 따르며 사는 건 내게 쉽지 않은 일,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 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은 배운 것과 행동하는 것이 일치한다. 적어도 배운 대로 행하고자 노력은 한다. 건강과 환경의 가치는 어릴 적부터 배우고 체화되야 하는 것 같다. 나는 "일주일 하루 채식"을 두 달이 다 되 가도록 몸에 익히지 못했다. 말만 하고, 핑계만 대면서 평소의 습관을 하나도 바꾸지 않고 있다. 이번 방학은 어째 내가 아이들에게 배우고 평가받는 시간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W8. The 8th Green Day

남편은 아침을 항상 든든히 챙겨 먹는다. 밥을 먹진 않지만 뭐라도 찾아서 배가 부를 만큼 먹고 출근을 준비한다. 이번 메뉴는 누룽지인가 보다. 한 봉지를 뜯어 먹고 조금 남겨뒀길래 남은 걸 끓여 아침으로 먹었다. 5분만 끓이면 되니 간편하다. 맛은 구수하고, 속은 따뜻했다.


점심엔 감자 옹심이 칼국수를 먹었다. 아이들은 잔치국수도 좋아하고, 메밀국수도 좋아하는데 칼국수는 항상 별로라고 한다. 이유가 뭘까? 나는 칼국수가 제일 좋은데 말이다. 밀키트로 나오는 국수 종류는 다 먹을만 하다.


저녁엔 월남쌈을 싸서 먹었다. 밀키트로 구입한 건데 간단히 한 끼 해결하기 좋았다. 채식 데이라서 밀키트 안의 쇠고기 볶음을 빼고 베지 함박을 구워 다져 준비했다. 대체육을 몇 개 테스트 중이다. 콩으로 만든 불고기, 함박, 제육 등등 종류도 다양하다. 고기 비슷한 맛과 질감이지만 육식주의자라면 아직까지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닌 것 같다. 위의 베지 함박도 함박을 기대하고 먹었다면 약간 실망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파인애플을 잘라 곁들이니 달콤하고 신선한 월남쌈 재료 완성.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서 아이들에게 또 지적을 받았다. 파인애플 손질은 누가하는데?


방학이라 아이들과 세끼 식사를 함께 하며 나누는 이야기들이 많다. 화요일에는 자연스럽게 채식이나 환경 등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날의 메뉴가 이야기 주제와 장르가 된다. 나는 이렇게라도 조금씩이라도 채식을 하며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게 의미 있다 했고, 아이들은 두 달이 됐으니 이제 좀더 본격적이고 엄격하게 채식 데이를 지켜보자 제안했다. 방학은 이런 것이다. 소란스럽고 할 일이 많다.



타이틀 이미지 출처 pexel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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