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르의 수도 도하로 가기 위해 두바이에서 경유하는 대한항공을 탔다. 그동안 타보았던 미국 항공사들과 대한항공의 서비스는 차원이 달랐다. 뉴욕에 살 때는 가격이 훨씬 비싼 국내 항공사들을 탈 수가 없어서 주로 미국 항공사인 노스 웨스트 항공이나 유나이티드 항공을 탔는데 기체도 훨씬 낡고 서비스도 너무나 불친절했다. 모든 항공사들이 대표적으로 표방하는 ’ 친절한 서비스‘라는 개념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승무원들이랑 눈을 마주쳐도 쏘아보는 것처럼 보였고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익스큐즈 미”를 아무리 외쳐도 그들의 관심을 끌기엔 부족했다. 그런데 목소리 톤부터 나긋나긋하고 상냥한 대한항공 승무원 언니들은 10시간에 가까운 비행시간 동한 우아한 미소 한번 잃지 않았다. ’ 하늘을 나는 호텔‘ A380을 드디어 타보는 경험도 새로워서 나는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도하에서 ’ 새로운 삶에 도전‘하는 나의 멋진 모습을 상상하며 설핏 잠이 들었다. 그러다 익숙한 사발면 냄새에 본능적으로 눈이 떠졌다. 잠결에 순간 ’ 내가 아직도 한국인가’하는 착각도 들었다. 두바이행 비행기에 탑승한 대부분의 승객이 한국인이었는데 한 명에서 시작한 사발면의 유혹은 너무나 치명적이라 여기저기서 추가 주문이 이어졌고 기내는 마치 학교 매점처럼 라면 냄새로 가득 찼다. 나는 국제 여객기에서 라면을 서빙하는 광경이 너무나 생소해서 신기하게만 바라봤다.
’역시 관광도 식후경이지. 우리 한국인은 먹는 게 젤 중요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알뜰히 챙겨 먹는 한국인의 놀라운 의지와 국내 항공사의 한국형 맞춤 서비스가 콜라보를 이룬 기적처럼 보였다. 무사히 두바이 공항에 도착하고 도하로 환승하기 위해 게이트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분명히 인천공항에서 탈 때는 대부분이 한국 사람이었는데 도하행 게이트로 가는 한국인은 나 딱 하나였다. 대부분이 나와는 반대로 유럽행 게이트 쪽으로 걷고 있었다. 어색함과 뿌듯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TV에서 보던 것처럼 두바이 공항은 꽤 컸지만 인천공항 같은 세련미는 없었다. 공항은 나처럼 환승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파랑 빨강 노랑의 현란한 원색 나염이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얀색의 다양한 전통 의상을 입은 아프리카 및 중동 사람들로 공항은 마치 인간 전시장 같았다. 뉴욕에서 보던 다인종 다민족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신형 비행기 냄새가 물씬 나는 카타르 항공을 타고 도하에 도착했다. 비행기 창문으로 내다본 공항의 모습은 두바이의 현대적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시골 변두리 같았다. 내심 비행기를 잘못 탔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활주로를 무사히 내달린 비행기는 공항 건물 근처에는 가지도 않고 활주로 한가운데 정차를 했다.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정말 내가 비행기를 잘못 탔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내 방송에서는 “도하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라는 말이 영어와 아랍어로 번갈아 나왔다. 그리고 또 방송에서는 안전상 승무원의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 말라고 했다.
지루한 십여분의 시간이 지난 후 드디어 기내의 게이트가 열렸다. 영문을 몰라 머뭇거리는 나를 외국인 승무원이 재촉했다. 짐을 챙겨 게이트에 서자 뜨거운 사막의 열기가 훅 느껴졌다. 아직 아침 10시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태양의 열기는 피부를 태우는 것같이 뜨거웠다. 눈이 마주치는 인도인 승무원들은 웃으며 “Welcome”을 연발했고 게이트에 연결 된 계단을 내려 가자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두바이와 경쟁하는 미래의 도시 ’ 도하‘ 공항엔 승객이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는 브릿지 조차 없어 따로 버스를 타고 공항 건물까지 가야 하는 ’ 아날로그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었다. 분명 출발 전 검색한 도하는 두바이처럼 최신식 건물과 유명 프렌치 건축가가 디자인한 건물들이 들어찬 미래 도시의 모습이었는데 내가 내린 곳은 당나귀가 딱 어울리는 헛간 같았다. 수하물을 찾고 출구에 도착하자 한국인 사장님이 알려 준 대로 운전기사가 내 이름이 쓰인 종이를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도하에 내리는 사람은 몇 안 되고 마중 나온 사람들도 몇 안 되었기에 단번에 나를 찾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름이 “파푸 (Papu)”인 운전기사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내 가방을 들었다. 다행히 선한 인상의 그를 보자 의심스러운 마음은 사라졌다. 인도식 쎈 억양의 파푸는 한국말도 곧 잘했다. 그는 이것저것 안부를 물으며 빈 웃음소리를 섞었다. 낯설어하는 나를 위해서 일부러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했다. 경기도 반만 한 크기의 카타르는 거짓말 조금 보태어 어디든 30분이면 갈 수 있다. 공항에서 나선 지 10분 만에 파푸는 나를 숙소에 내려 주었다. 동네는 모두 2층 집 단독 주택이 꽉 들어찬 단지였는데 아직도 짓다 만 새집들이 반 이상이었다. 파푸는 나에게 여독을 좀 풀고 1시까지 출근 준비를 마치라고 알려 주었다. 내 방을 안내받은 나는 짐을 풀면서도 경황이 없었다. 내가 상상한 도하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긴 비행시간 동안 지친 몸을 풀기 위해 샤워기 물을 틀었다. 뜨거운 물이 사방에 튀어 비명이 절로 나왔다. 사막의 태양은 단독주택의 물탱크도 뜨겁게 달구어 버려서 찬물이 아예 없다. 전신에 거의 화상을 입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후다닥 샤워를 끝냈다. 한국에선 가스비 아낀다고 겨울에도 뜨거운 물을 펑펑 쓸 수가 없는데 여기서는 보일러나 가스비에 상관없이 뜨거운 물이 나오는 신기한 곳이었다. 새로운 삶과 도전에 대한 기대감에 나는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간단한 짐 정리를 끝내고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집에서도 사무실까지 딱 10분 거리였다. 조금 더 멀리 내가 인터넷 검색으로 보았던 도하의 상징적인 도시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내가 일하게 될 사무실은 동네도, 건물도 모두 조금 전 공항처럼 낡은 모습이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구경할 수 있는 도하의 풍경은 노란 사막을 배경으로 집들도 건물들도 모두 모래 색깔처럼 노르스름한 정말 심심함 풍경이었다. 아스팔트는 깔았지만 도로 정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중간중간 끊긴 도로 경계선이 많았고 나무도 듬성듬성 심어진 야자수뿐, 온통 세상이 노랗게 보였다. 한국처럼 공장이 많지 않으니 파란 하늘과 고운 모래 등선이 이어져 있을 줄로 상상했는데..... 잔모래 부유물이 공중을 가득 채워 한국의 황사처럼 뿌옇고 텁텁했다.
실망감을 감추며 파푸를 따라 사장님 사무실을 찾았다. 파푸가 노크 하자마자 사장님의 구수한 한국말이 들렸다.
“들어와, 들어와.”
전형적 아저씨 인상의 사장님이 날 반겼다.
“비행은 괜찮았어요? 시차 때문에 피곤하진 않고?”
“네 괜찮습니다.”
“막상 오니까 어때요? 실망했어요?”
“아니요. 온통 건설붐이라 좀 어수선해 보이긴 하네요.”
“맞아 맞아. 그래서 정연씨의 역할이 아주 중요해요. 그래도 여기 카타르에선 한국에 대한 인식이 아주 좋거든. 한국 제품이라고 하면 막 서로 달려들어. 이미 진출한 제품이나 회사도 많지만 아직 소개 안된 히트 아이템을 찾는 게 중요해. 그게 우리가 앞으로 중점적으로 추진해야 할 일이야”
“네 근데... 제가 건설 쪽을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
“모 혼나가면서 배워야지. 처음부터 다 아는 사람이 어딨겠어. 자 여기 내가 우선 기존 거래처랑 기초 자료를 줄테니까 이거 가지고 가서 공부 좀 해놔.”
“아 네.”
“그리고 이거는 여기서 쓸 휴대폰. 내 번호랑 파푸 번호도 저장해 놨어. 파푸가 정연씨 자리도 안내해 줄 거야. 혹시 피곤하면 오늘은 지리만 익히고 그냥 퇴근해도 돼.”
성격 급한 사장님의 설명은 단 몇 분만에 끝났다. 사장님의 핸드폰과 사무실 전화가 끊임없이 울려서 더 이상 시간을 빼앗아도 안 될 것 같았다. 파푸를 따라 내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 앉은 사람들은 온통 인도 국적의 남자들로 여자는 딱 나 혼자였다. 어색함과 긴장감 속에 내 책상을 확인하고 파푸에게 다시 집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몇 시간 만에 확 바뀐 환경에 적응이 되지 않아 모든 것이 낯설었다. 모래 투성이의 도하는 확실히 이국적이긴 했지만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나오던 것처럼 전통적이지도 않았고 두바이처럼 현대적이지도 않았다. 온 도시가 건설터로 지나가는 차량도 덤프트럭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찾아온 사막의 기적은 아직 건설 중인 현재 진행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