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씨는 무슨 말에 속아서 카타르에 왔어요?”
거래처 사장님이 보자마자 호기심에 가득 차 물었다.
“제2의 두바이라고 해서 왔지요......”
솔직한 나의 대답에 두 사장님은 껄껄껄 웃었다. 카타르 국왕은 중동의 수도라 불리는 화려한 두바이의 변신을 지켜 보며 ’제2의 두바이가 되겠다‘는 아니, 그를 넘어서는 ’중동의 새로운 수도가 되겠다.‘고 전 세계에 천명했다. 그러나 국제적인 도시가 되기 위해 필요한 획기적인 로드맵이나 경쟁력은 여러 가지로 부족했다. 지리적으로 사우디와 에미레이트 중간에 위치한 카타르는 정체성이나 국가성도 중간에 위치한 듯 과도기적 모습을 보였다. 온 지구인의 행사인 월드컵을 유치한다며 전국을 공사판으로 벌려 놨지만 ’아직은 공사중‘이기에 서구 문화에 대한 반감과 동경도 ’여전히 공사중‘인 카타르였다.
카타르의 총 인구는 대략 2백 8십만명, 인천시 인구와 비슷한 전형적인 도시국가다. 하지만 이마저도 공사를 하려고 데려온 노동자의 인구가 대부분이라 (비율로 따지면 70%이상) 카타르인을 마주치는 건 사막에서 바위 찾는 것처럼 흔하지 않다. 카타르는 한국같이 대통령제가 아니기에 투표권이 없고 국왕께서 친히 친정을 베푸시는 ’입헌군주제‘의 나라이기에 국왕과 왕족의 지위가 절대적이다. 그래서 만민이 평등하다는 기본적 인권 논리도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 마치 중세시대처럼 태어난 신분에 따라, 국적에 따라 계급이 나뉜다. 카타르 국민들은 피라미드 최고층에 속한 계급으로 고귀한 카타르의 피를 지닌 선택받은 자들은 궂은 일을 하며 체통을 잃을 필요가 없다. 그들은 주로 정부 공무원이나 공기업 관리자로 근무를 하며 카타르의 영광과 위엄을 대변한다. 그들의 또 다른 명성은 홍길동 같은 신출귀몰한 능력으로 평가된다. 사무실에서는 찾기 힘든 그들이지만 호텔 로비나 쇼핑센터에 주로 출현한다. 조금 전 통화에서 비서는 분명 출근을 했다고 하는데 오전 11시가 되면 대부분이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휴가와 출장은 또 얼마나 많은지 미팅을 한 번 잡으려면 최소 한 달은 쫓아 다녀야 시간을 맞출 수 있다.
카타르인들의 우아한 품위 유지를 위해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 한다. 다같이 우아하게 앉아서 차만 마시며 알라를 논한다고 가스 파이프가 저절로 돌아가지 않는다. 카타르인 1명의 고용 유지를 위해서는 3명의 근로자가 필요하다고 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세상에는 이국에 살면서 겪을 사회적 차별과 불공정 연봉도 꿈의 나라처럼 생각하는, 더 불행한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다. 같은 아랍 문화권이지만 원유가 생산되지 않고 끊이지 않는 부정부패로 정쟁의 늪에 빠진 나라의 사람들에겐 카타르가 희망의 땅이다. 튀니지, 예맨, 팔레스타인,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 방글라데시 등등 자국에서조차 최소한의 삶을 유지할 수 없어서 떠나온 이방인들로 도시는 넘쳐 난다. 그들은 건설 현장부터 무역 사무원, 엔지니어등 실질적 실무를 떠맡으며 사회를 구성한다. 친해진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한국의 굴곡진 현대사 이야기와 참 많이 비슷할 때도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래도 우리는 민주주의를 이뤘다는 것과 그들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의 비극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 정도다. 복잡한 카타르의 사회 구성을 설명한 이유는 카타르에서 실질적으로 일을 하며 부딪히는 건 대부분 이런 해외 근로자들이기 때문이다. 대표적 예로 카타르 항공에 탔다고 카타르 국적의 승무원을 만날 수 없다. 대부분이 동유럽이나 모로코, 이집트, 필리핀 국적이다.
도하에 도착한지 처음 한달은 지리를 제대로 익히지 못해 파푸가 운전기사 역할을 해주었다. 9년 전의 도하는 길 표지판도 제대로 없었고 구글 네비게이션도 작동하지 않는 아직 미지의 나라였다. 게다가 회전 교차로는 왜 그리 많고, 쉽게 양보해주는 이는 하나도 없는지 한번 기회를 놓치면 다람쥐 챗바퀴 돌 듯 제자리를 맴 돌아야 했고 안전한 탈출을 위해서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어 온갖 사정을 해야했다. 사무실 출근이나 거래처 방문, 식료품 사러 외출하는 간단한 일도 파푸의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다. 네팔에서 온 파푸는 회사일로 바쁜데도 내가 부탁 할 때마다 싫은 내색 한번, 불평 한번 하지 않았다. 길 위에서 제법 시간을 보내며 어색함이 없어지자 파푸는 한국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이미 주변 친구들 중에 한국에 취업한 사람이 많아 대충의 정보는 알고 있었지만 평이 좋은지 파푸의 다음 꿈의 행선지는 “꼬레아”인 듯 했다.
“마담, 마담, 무엇 좀 물어 봐도 될까요?”
카타르에선 특이한 존칭 문화가 있다. 연배가 어느 정도 되면 이름 앞에 남자는 미스터 (Mr.), 여성은 마담 (Madamne), 또는 미스(Miss)를 붙인다. 격식 없이 이름을 부르는 미국식 문화에 익숙한 나는 마담으로 불리는 게 낯설었다. 이제는 아무리 숨겨도 원숙해 보이기에 미스보다는 마담으로 불리는 것을 부정할 순 없지만 어색함은 숨길 수 없었다.
“한국 사람들은 정말 이상해요.”
“예를 들면???”
“한국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많이 먹어요?”
“......”
’내 흉을 보는 건가?‘ 싶어 쉬이 답을 할 수가 없었다. 해외 경험상 그의 지적은 사실이다. 나도 여자지만 왠만한 성인 남성의 식성처럼 먹었고 나의 대식가의 기질을 알아 본 일본 친구들도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여러번 있었다.
“글쎄 .... 우리는 먹는 걸 좋아해. 좋아하는 사람이랑 먹고 마시는 게 한국인의 낙이자 정을 쌓는 방식이랄까? 그래서 같이 즐겁게 먹고 많이 먹는 게 중요해.”
부족한 대답이었지만 파푸는 최대한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담, 또 궁금한게 있어요.”
“먼데?”
“왜 한국인들은 나이가 많아도 에너지가 넘쳐요? 많이 먹어서 인가요?”
“무슨 뜻이야?”
“내가 전에 일하던 건설현장에서 봤어요.
70 먹은 한국인 할아버지가 네팔, 인도, 방글라, 필리핀 사람들을 앞에 세워 두고 막 소리를 질렀어요. 마이크도 없고 영어도 아니고 한국말로 소리를 질렀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알아 듣고 막 일을 시작했어요.”
“아 정말?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 그 할아버지가 초능력자라서 그런거 아니야?”
중동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평이 전설처럼 사람들 입에 오르 내린다. 체구는 작은데 많이 먹고, 악바리 같아서 한번 물은 일은 절대로 놓지 않는다고. 1970년대에 가난한 나라에서 온 꼬레안들은 메마른 사막 땅에 도로며 건물이며 부두를 지었다. 유럽의 유명 건설사나 일본 회사가 분명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꼬레안들이 오면 가능했다. 억척스러운 산업 역군 선배들을 둔 덕에 나의 카타르 생활은 다른 해외 노동자들보다는 조금 더 수월했다. “꼬레안”이라는 국적이 신용 보증표가 되어 준 것이다. 콧대 높은 카타르인들은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다가도 “꼬레아”라고 소개하면 갑자기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반겼다. 나에게도 그 전에는 없던 애국심이 생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