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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연 Mar 24. 2022

새로운 기회

막상 하마드의 명함을 받았지만 망설여졌다. 한국 이벤트 회사에서 일했던 악몽같던 기억만 떠올랐다. 수 많은 미팅과 끝없는 제안서 .... 기약 없는 퇴근시간이지만 정시 출근을 요구했던 양심 없는 사장님. 백가지 요구를 들어줘도 불평만 늘어 놨던 고객들. 행사 전날 수십번 점검 해야 하는 압박감과 예견치 못한 실수나 사고에 대한 염려증. 그리고 그로 인한 불면증과 소화불량 등등 아무리 생각해봐도 좋았던 기억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생계를 위한 절실함이 더 컸다. 썪은 동아줄이라도 아예 없는 것보단 것보단 나았다. 또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일반 회사보다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이 이른 건설회사의 특성덕에 하마드와의 약속은 쉽게 잡을 수 있었다. 전화를 하니 남들 퇴근 이후 시간인 6시 이후가 오히려 좋다고 한다. 이벤트 업에서 칼퇴근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아직도 카타르 지리를 잘 몰라 하마드가 인터뷰 장소를 공항 근처 호텔 로비로 정했다. 내가 머무는 숙소에서도 가까워서 파푸의 도움 없이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중요한 약속이니 만큼 약속한 정각에 도착했지만 하마드는 없었다. 중동의 관례상 늦을 게 분명했다.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내고 여유있게 앉아 주위를 둘러 보았다. 간혹 아랍 전통 의상 디쉬타쉬(Dishdashah)를 입은 무슬림들이 지나 다니지만 카타르인들은 아니다. 그분들은 주로 5성급 이상의 호텔에만 출현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30분이 지나며 기다리기도 지루해졌다. 어쩌면 미래의 사장이 하마드가 될지도 모른다는 잠깐의 상상이 헛된 망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기다려야할지 망한 인터뷰인지 고민이 되었다. 하마드가 마음이 바뀌었거나 중간에 일이 있어서 못 오는 상황이라도 면접자인 내가 다시 정중하게 문자를 보내야 했다.


’혹시 사정이 여유치 않으면 다시 일정을 ...‘

하고 돌려 쓰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다른 말이 떠올랐다. ’사장이면 다냐? 늦을거면 문자라도 보내라 매너제로 인간아. 나 감.‘ 

전송을 누르려는데 건물 밖에서 요란한 스포츠 카 소리가 들렸다. 아잔을 뚫고 울리는 포르셰의 엔진 소리는 묘한 이질감을 주었다. 곧 체구가 좀 큰 하마드가 차에서 내렸다. 그가 로비에 들어사자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는 바로 나를 알아 보았지만 통화중이라 멀리서 눈인사만 건넸다. 나는 괜찮다는 손짓을 보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쉬운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기다림 뿐이었다. 


“미안 미안. 주말에 또 큰 행사가 있어서.... 기다리게 해서 미안.” 


“괜찮아요. 늘 바쁘실텐데 이해합니다.” 


“앉아요. 보내 준 이력서는 잘 봤어요. 그래도 경험이 조금 있네요.” 


“네 이벤트 회사에서 2년 오페라 단체에서 2년 정도 일은 해 봤어요.” 


“도면은 볼 수 있나요?”


“아니요 주로 작은 행사 제안서를 써서 기술적인 거나 시스템 사양같은 디테일은 잘 몰라요.” 


“그럼, 입찰 서류는 작성할 수 있고?” 


“전문적인 행사가 아닌 일반 행사라면 가능합니다.” 


“간단히 우리 회사 소개를 하면 내가 여기 도하에 온지 10년이 되가는데 이벤트 회사로는 거의 처음이라고 할 수 있어요. 도하 아시안 게임부터 월드컵 유치단 방문행사, 플라시도 도밍고 콘서트 등등 큰 행사를 맡아 왔어요. 전문 디자인팀과 기술팀까지 있고 유럽 회사들처럼 인지도는 없지만 나름 큰 회사중에 하나에요.” 


“네 웹사이트에서 보았어요.” 


“아 그랬군요. 어떻게 생각해요?” 


“이력은 충분히 훌륭합니다. 그런데 이벤트 회사라면 마케팅의 전략적인 기획력과 예술적 감각을 보여줘야 하는데 너무 옛날 스타일이라 .... 외람되지만 잠재 고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홍보 능력이 보이지 않았어요.” 

나는 미리 보아둔 회사 웹사이트에 대한 실망감을 최대한 돌려서 표현했다. 칭찬이 아니기에 사장의 기분이 상하겠지만 IT 선진국 한국에서 온 내가 본 회사의 웹사이트는 애들 블로그보다 유치한 수준이었다. 적당히 취업하기 위해 감언이설로 포장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심지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계정 조차도 연동이 되어 있지 않은 이벤트 회사의 웹사이트라면 차라리 폐쇄하는게 나을지도 모른다. 


“바로 그거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이야기 했어.” 중동 남자들은 워낙 자존심이 강하기에 기분 나빠할 줄 알았는데 하마드는 호기롭게 동의를 해줬다. 이 정도면 비난의 강도를 조금 더 올려 보는 도박을 걸어 보는 것도 능력이 될 수 있다. 


 “이력은 화려한데 포트폴리오 구성과 사진이 너무 빈약해서 전문성도 보이지가 않아요. 원하시는 타겟이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누가 방문 하든 한눈에 쉽게 보여야 하는게 웹사이트의 가장 우선이자 기본 원칙입니다.” 


“진작에 업데이트를 했어야 하는데 도하에 제대로 된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그럼 불어나 아랍어는 좀 하나요?” 


이젠 그의 공격 차례였다. 외국 생활을 하고 외국 회사에 일하면서 불어의 필요성은 느꼈었다. 국제 엘리트 사회에 낄려면 빵빵한 학벌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3, 4개국어는 해야 기죽지 않는다. 내가 만난 외국인들도 유식한척인지 나를 비꼬기 위함인지 모르지만 간혹  불어를 섞어 설명해서 못 알아 듣는 나를 바보로 만들었다. 자격지심에 불어 학원을 다녀보긴 했지만 아직 영어도 원어민처럼 구술하지 못하는 수준이라 머리에 과부화가 왔다. 잘난척 하려는게 아닌데 영어책을 보면 불어로 읽고 불어책을 보면 영어로 읽는 착오를 일으켜 외국인들과 대화할때 민망할 때가 있었다. 차라리 영어를 조금이라도 더 잘 하는 게 낫다 싶어서 불어는 아예 포기를 했는데 이제야 그 포기가 뼈아픈 실책이 되었다. 중동에는 워낙 예전 프랑스 식민지였던 레반트 계들이 많아서 영어보다는 프랑스어가 유용하게 통용되기도 한다. 아쉽지만 잠깐의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작은 문제가 아니라 사실을 고백해야 한다. 


“아니요 전혀 못 합니다.” 

“아쉽네요 .... ”

’나도 아쉽다.... 나란들 안하고 싶었던 건 아니야. 머리 나쁜 걸 누굴 탓하겠어...‘ 

아무래도 새로운 기회는 날아 가려나 보다. 실망감에 표정관리가 쉽지 않았다.


“원하는 조건은 어떻게 돼요?”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현재의 조건을 이야기 했다. 돈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예민한 문제이기에 하마드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조건은 아니네요. 운전은 할 수 있는 거죠? 운전기사가 꼭 필요 한건 아니죠?”


“네 이래뵈도 무사고 운전 10년입니다.”


“그럼 언제부터 일할 수 있어요?” 

’짜잔~‘ 포기 했던 중동 진출의 꿈이 다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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