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라니? MBA가진 너만 이지. 난 빼 줄래?
- 학벌만 따지는게 아니야. 세계에 너처럼 2개국어를 하고 해외여행을 자유롭게 다니는 인구가 몇이나 될거 같아? 전 세계에 채 20%가 안돼. 우리는 나머지 인류를 위한 책임이 있어.
- 난 나하나 풀칠해서 먹고 살기도 버거운 사람이야. 머나먼 아프리카나 인도인들을 위한 구제를 말하는 거라면 패스하겠어. 네 논리대로라면 먼저 자기네 나라 엘리트들이 책임져야지 억대 연봉자도 아니고 UN 대사도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관심도 없어.
- 아니야 너도 할 수 있어. 누구나 쉽게 참여하고 기여할 수 있는 선택이 많아. 예를 들어 공정무역 제품을 사용한다던가 소비를 줄여서 기부를 한다던가?
- 난 적당한 소비가 자본주의의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
- 그것도 중요하지. 하지만 예를 들어 굳이 핸드폰을 매년 바꾼 다거나 다분히 과시용인 명품으로 치장한다거나 여행갈때 굳이 퍼스트 클래스를 탈 필요는 없어.
- 난 그게 목적이기에 죽어라 일하는 건데? 퍼스트 클래스 타보는게 내 소원중의 하나야.
- 좋기는 하지. 그런데 그게 절대적으로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게 아니잖아. 우리 회사 정책중에 8시간 이상의 비행으로 가야하는 출장은 퍼스트 클래스가 나오는데 비지니스 클래스로 충분하니까 퍼스트 클래스 없애자고 전체 이메일 돌렸어.
- ...... 미쳤구나. 아름다운 자살 시도네.
- 그렇긴했지 .... 다음날 출근하니 우리 부서 직원들마저 나를 노려 보더라.
- 그봐. 세계 유명 대학과 MBA 졸업장을 가지고 통장에 몇십억씩은 가진 사람들조차 특권을 포기 안 하는데 왜 나같은 피래미한테 모라고 그래? 난 이대로 살꺼야. 그리고 언젠가는 꼭 퍼스트 클래스 탈꺼야.
교육수준의 차이만큼 나와 남친님의 윤리관도 큰 차이가 났다. 그의 설교는 나에게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그의 고매한 인격은 나를 감동 시켰고 그의 단점에서 나를 눈 멀게했다. 나보다 월등히 빛나는 능력과 아름다운 영혼까지 갖춘 그에 대한 인간적 호기심에 나는 질문을 던졌다. 경험상 나보다 잘난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 특권을 자화자찬용으로 썼지 옆의 불우이웃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분에 넘치게 흥청망청 쓰며 놀기에도 바쁜게 그들 인생이라 타인에게 관심을 주는 것도 시간과 노력이 소모되는 참으로 수고스러운 일이다.
-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사는데?
- 사람이 사는 세상이니까. 그리고 그걸 바꿀 수 있는 것도 망칠 수 있는 것도 다 사람이 하는 일이야.
- 그런 훌륭한 생각이 정말 기특하다.
- 아버지한테 배웠어. 사치 좋아하는 어머니에 반해 좋은 미덕은 다 아버지한테 배웠어.
- 나랑 정 반대네. 난 인생에 살면서 중요한 건 엄마한테 배웠는데.
- 축복이네. 내가 여자한테서 싫어하는 모든 단점을 사람이 우리 엄마인데.
- 훌륭한 아버지가 있잖아. 난 정말 부럽다. 우리 아버지는 알콜 중독에 니코틴 중독에 폭언 남발에 가진 건 쥐뿔도 없으면서 자기 권위만 내세우는 혐오스런 실패자야.
- 딱 우리 엄만데? 문젠 우리 엄만 가진게 너무 많아서 불평할게 더 많은 더 위험한 폭언자가 되었지.
세상을 구하겠다는 이상적 토론은 돌고 돌아 우리가 가진 가장 작고 예민한 세계로 돌아 왔다. 그렇게 완벽하고 그늘 하나 없어 보이던 그도 나랑 비슷한 아픔을 가진 상처 많은 인간이었다. 가장 큰 상처를 주는 것도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만고 진리가 서로에게 작은 위안을 주었다.
누르의 방문 이후 나는 남친님을 훌륭하게 키운 아버지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 누르가 너보다 너희 아버지 칭찬을 더 많이 하더라. 그렇게 멋지셔?
- 응. 사랑, 열정, 관대함으로 넘치시는 분이셔. 나에게 클래식 음악을 가르치셨고 80이 넘은 고령에도 스키도 잘 타시고 주말마다 조깅이랑 테니스도 치시는 분이야. 우리 엄마가 매일 소리 지르고 끔찍하게 굴어도 언성 한 번 안 높이신 초월적 인내심의 소유자시지.
- 그럼 어머니는....
- 전 세계 출장 다니며 온갖 종류의 사람을 다 만나 봤어. 훌륭한 기업가나 사상가 아니면 금융 사기꾼까지 다 만나 봤지. 너도 알잖아. 그래도 내가 왠만하면 사람이랑 인연 안 끊고 다양한 종류의 친구들이 있는거. 사람은 사랑할 대상이지 포기할 대상 아니라는 게 내 신념인거. 그런데 내가 여태까지 살면서 인연 끊고 싶은 사람 중 역대 3명 안에 들어. 어머니라는 신분 때문에 인연을 유지하고 있는 거지 어머니 아니 었으면 다시는 안 만났을 사람이야.
'오늘은 날이 아니네.'
궁금증이 그래도 안 풀렸지만 싸늘한 표정으로 말하는 그의 얼굴을 보자 더는 입이 열리지 않았다. 남의 고통은 아무리 아프다고 호소 해도 공감하는 척이 될 뿐이지 그 고통을 같이 아파할 수는 없나보다. 그의 표정이 굳어질수록 나의 궁금증은 커져만갔다. 그의 엄마에 대한 미움이 이혼하고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자연스런 심리적 반발감이기엔 너무나 깊어 보였다. 가족은 인간의 다양한 군집살이 형태중 피와 살이 섞여서 만들어지는 유일한 관계이자 생애 처음으로 만나는 관계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관계지만 너무 많은 실수와 오해도 가장 많은 관계일 것이다. 그래서 한번 박힌 증오는 더 깊고 단단히 자라 버린다. 이해하는 법, 용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가족은 서로에게 거머리처럼 붙어서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존재가 되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