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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담 Nov 23. 2023

30대 고시원 원장이 바라본 고시생의 애환

수화기 너머로 땅이 꺼질 듯한 한숨 소리가 들린다. 얼마 전까지 공부하던 학생이 방을 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시험 결과가 나왔나 보다. 영업장에 오는 전화 문의가 반가워야 할 터인데, 어쩐지 어머님의 한숨 소릴 들으니 썩 달갑지만은 않다.


"어머님, 어쩐 일이세요? 얼마 전까지 아드님 지내셨던 것 같은데, 맞지요?"

"휴... 원장님, 방 있나요? 곧 다시 들어가야 같아요. 4점 차로 떨어졌다네요. 휴.."

"하이고.. 참, 어쩌나요. 그동안 공부한다고 고생 많이 했을 텐데... 그나저나 지금 당장은 방이 없는데요, 어쩌죠? 언제 들어오시나요?"

"내년 초예요. 그래도 지내던 곳에서 이어서 공부하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연락드렸어요."

"다시 찾아주셔서 감사하긴 한데...."

"방 나오면, 다른 사람 주기 전에 미리 연락 좀 주세요."


좀 더 수화기를 붙들고 있으면 어머님의 하소연이 점 점 거세지다가 클라이맥스로 향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얼른 전화를 끊었다. 재 계약을 하겠다는 단골손님의 전화에 펄쩍 뛰며 반겨도 모자랄 판인데,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웃픈 상황이다. 그것도 굳이 4점 차로 떨어졌다고 이야기하시니 얼마나 맘이 쓰릴런지 으레 짐작이 갔다.(4점 차가 맞기는 한 걸까?)


짧으면 1년 혹은 수년씩 취업의 문턱을 넘기 위해 2평짜리 고시원을 얻어, 365일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학원을 오가며 공부에 매달리는 학생들을 지켜본 바로는 학생에게도, 학부모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시간임을 알 수 있었다. 고시생의 다른 말은 고된 시간이 아닐까?


한차례 시험이 끝나고 나면, 우리 고시원도 덩달아 출렁거린다. 합격 여부에 따라서 방의 계약 여부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1차 시험이 끝나고, 2차 시험까지 봐야 하는 친구들은 대부분 연장을 한다. 최종 합격을 한 친구들은 그야말로 우리 고시원과 아름다운 이별을 한다. 그에 반해 떨어진 학생들은 둘 중 하나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거나 혹은 재도전을 위해 연장하거나.


전화 온 그 친구는 최종 합격을 남겨두고 떨어진 모양이었다. 세무사, 회계사, 소방사, 공무원 시험 등등 다양한 시험들이 있는데 그 친구들의 합격 여부가 갈리는 시즌이 오면 고시원 원장의 마음도 덩달아 안절부절이다. 재 계약을 해준다면 할 일이 줄어드니 감사할 노릇이지만, 만에 하나 어차피 헤어져야 할 운명이라면 제발 아름다운 이별이길 바랄 뿐이다.


과연 이 방은 계약 연장을 할까? 퇴실을 할까? 워낙 조심스러워 합격 여부를 대놓고 물어보지는 못하지만, 계약 연장 여부를 보고 우리는 그들의 합격 여부를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약 합격한 친구가 있으면, 신기하게도 정말 내가 뒷바라지한 것처럼 기특하고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떨어진 친구들을 생각하니 순간 재계약을 해달라던 어머님의 한숨 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리는 듯하다.


고시생이 유독 많은 노량진에서는 가끔 '무조건 합격하는 명당', '최다 합격자 배출(?)'과 같은 홍보 문구를 쓰는 고시원이 있던데 그 이유를 알 것만 같다. 큰 탈 없이 공부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내어주고 적당한 가격을 받을 뿐이지만, 누군가의 꿈이 한 뼘 커지는 여정에 소소한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 묘한 보람감 같은 걸 준달까. 인간은 타인에게 크고 작은 유용한 '가치'를 제공할 때 의미를 부여하는 훌륭한 존재임이 분명하다.


고시생의 메카이자 고시원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노량진에 최근 가 본 적이 있다면 정말 깜짝 놀랄 것이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고시원이고, 고시생들을 배려한 각종 서비스도 잘 되어 있다. 옛날처럼 그저 공부하고, 잠만 자는 고시원이 아니다. 안마 의자를 구비한 고시원, 별도 운동 시설과 스터디룸을 겸비한 고시원도 있다. 또 어떤 고시원은 엄마표 반찬과 특식을 제공하고 이를 시그니처 서비스로 내세우기도 하는데, 고시생을 둔 학부모의 마음을 공략한 전략이 틀림없다. 만일 노량진에서 고시원을 운영하는 원장 입장이라면, 타 업장 대비 더욱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므로 떨떠름할 노릇이지만 고시생을 대하는 고시원 원장의 마음은 어딘가 모르게 각별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도 그럴 것이 고시원의 태생이 고시생들을 위한 공간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출처: 다큐멘터리3일, 그럼에도 불구하고(노량진 고시촌편) 고시원에 이사하는 딸의 짐을 챙기고 있다.


우리 고시원도 학원 등록 시즌이 되면, 고시생들의 방 문의가 급증한다. 생각보다 주변에 경쟁 고시원이 많지 않은지라 늑장을 부리다가는 남는 방이 없을 수도 있다. 요즘은 대부분의 방 문의가 카톡이나 네이버 톡톡으로 오는 편이며, 블로그나 홈페이지에 사진이 대부분 공개되어 있지만 본인의 미래를 쉽사리 단정할 수 없는 고시생들은, 방 선택에 있어서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생각보다 기나긴 여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늘구멍 보다 작은 취업문을 뚫어 보겠다고 고군분투하는 학생들을 대신하여 학원 근처의 방을 쥐 잡듯이 뒤진 후 가장 적당한 고시원을 찾아주는 것이, 다름 아닌 부모의 역할이라는 것을 고시원 원장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방 구하러 올 때 보이는 유형도 가지각색이다. 엄마 손, 아빠 손 꼭 잡고 오는 고시생이 있는가 하면 졸래졸래 뒤따라와서는 먼발치서 뒷짐 지고 있는 고시생도 있다. 반면에 하나부터 열 까지 혼자서 알아보고 계약부터 이사까지 마무리하는 자립형 고시생도 있다.




재계약을 해야겠다며 전화를 걸어온 손님은, 경상도 지방에서 올라온 엄마와 아들이었다. 꽤 다정해 보이는 모자지간이었는데, 지방에서 올라와 날 잡고 고시원 투어를 오셨다고 했다. 아침 일찍부터 오신다고 해서 비대면으로 안내를 해주고 싶었지만, 타 지역에 아들을 맡기는 엄마의 심정으로 고시원 원장님을 직접 뵙고 싶다고 했다. 솔직히 말해서 귀찮았지만, 그곳에 직접 살게 될 당사자가 아닌 부모의 마음에 꽤 들어야만 계약이 수월하기에 번거로운 요구를 거부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눈치 챗겠지만, 속으론 이렇게 시큰둥하면서도 손님을 맞는 고시원 원장은, 늘 최고의 자본주의 미소를 장착하고 세상 친절한 사람으로 돌변한다. 특히 남편이나 나 혼자 있을 때 보다 살가운 젊은 부부 원장의 모습을 어필하는 것이 자식을 맡기는 어머님들에게 꽤 좋은 영업 포인트가 되는 듯했다. 나이 많고 생기 없는 연로한 고시원 원장 보다야, 젊고 싹싹해 보이는 원장 내외가 아무래도 낫겠지. 게다가 도둑놈 10명은 때려잡을 것 같은 듬직한 덩치와 테디베어를 닮은 따뜻한 미소를 가진 남편은 예나 지금이나 부모님들에 먹히는 스타일임이 고시원을 운영하면서 이미 몇 차례 검증되었다.


경상도에서 온 이 학생은 위에 말한 타입 중 두 번째 타입이었다. 이 상황이 뭔가 부자연스럽다는 듯 엄마 뒤에 한 발짝 물러 서서는 보는 둥 마는 둥 방을 두리번거리는 게 다였다. 아마도 본인이 이 비좁은 방에서 수개월 혹은 1년 이상 틀어 박혀 고시 공부에 매달려야 한다는 사실을 아직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에 반해 어머님은 귀찮은 내 맘도 모른 체 눈치 없는 질문을 속절없이 쏟아내기 바빴다. 경상도 분이라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 오셔서 그런 건가? 자기 아들은 연신 추위를 많이 탄다며 겨울에 춥진 않은지 난방은 잘 되는지 수차례 물어대는 통에 살짝 편두통이 올 찰나였다.


마침내 여차저차 계약서를 쓰고 돌아서는 순간,

어머님의 한 마디가 일시에 내 심장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원장님예, 우리 아들, 잘 부탁드립니더."


잘 부탁한다라.. 고시원 원장에게 아들을 잘 부탁하는 엄마의 마음이란 무엇일까. 그 한마디에 돌연 쓸데없는 무게감을 느껴버리고 말았다. 엄마, 아들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쥐약임이 틀림없다. 나 자신이 아픈 아들 때문에 경제적 자유를 이루겠다는 비장한 꿈을 가지고 고시원 사업에 뛰어든 엄마였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늘 서울 곳곳을 전전하며 이방인 생활을 하던 딸을 걱정하던 기억 속 엄마 때문이었을까? 고시원 원장이라는 타이틀에 무게감 따위를 가져본 적도, 딱히 갖고 싶지도 않았다. 애초에 시간과 노력을 덜 들이고 조금 더 편하게 돈을 벌고 싶었을 뿐인데, 짧지만 진심 어린 어머님의 한마디가 저변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일말의 책임감 같은 것들을 툭 건드리고야 말았다.


얼마 전 어떤 에디터님과 업무적으로 미팅을 한 적이 있었는데, 작가로서는 처음 가지는 공적인 자리였다. 나는 미처 작가라는 타이틀이 새겨진 명함을 준비하지 못했고 준비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에디터님이 명함을 건네주시기에, 민망해하며 '제가 아직 작가 명함은 준비를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운을 띄우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괜찮습니다. 작가는 글이 명함이죠."


아, 작가는 글이 명함이구나. 집에 오는 내내 그 한 문장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스스로 아직 완벽히 준비되지 않았던 병아리 작가에게, 작가는 글이 명함이라는 말이 주는 무게감은 상당했다.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 내내 앞으로 내가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며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이 지점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고시원 원장의 명함은 무엇일까?' 매출? 네이버 검색 순위? 후기? … 나는 아직 완벽히 준비되지 않은 엄마이며, 작가이며, 고시원 원장이었다. 무엇으로 책임을 다해야 하는가?


겨울엔 행여나 공부하는 학생들 컨디션 망칠까봐 초겨울부터 난방에 신경을 쓴다. 그래도 춥다고 하면 전기장판도 넣어 주고 자동 차단 기능이 있는 전열 기구도 알아본다. 여름이 되면 그간 쌓인 먼지나 곰팡이 때문에 비염이라도 생길까 싶어 전문가를 불러 에어컨을 깨끗하게 청소한다. 요즘은 또 빈대 때문에 난리라서 며칠 전 전체 방역도 실시했다. 시험이 끝나면 가끔은 안면이 있는 입실자에게 고생했다는 격려와 함께 커피 쿠폰도 보내준다. 코 고는 소리, 생활 패턴이 다른 입실자들은 애초에 받지 않거나 각별히 방 배치에 신경을 쓴다. 어찌 보면 이 당연한 것들을 조금 더 세심하게 신경 쓰는 것이 나름의 책임을 다하는 방식이라 말하고 싶다.


그리고 고된 시간을 보내는 고시생에게 있어 고시원 원장의 명함은 안락한 공간, 최상의 서비스도 아닌 부모의 마음을 대신 헤아려주는 무언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출처: 다큐멘터리3일, 그럼에도 불구하고(노량진 고시촌편)

2011년 2월 방송분에서 - 부모님께 멋진 아들이 되고 싶다던 이 분은 경찰이 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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