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울 수 없는 기억의 목록
성인이 된 후 나는 두 번이나 휴대폰 번호를 바꿨다. 내 나름의 인간관계를 리셋하는 방법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진정한 리셋은 아니었다. 내 번호를 바꿨을 뿐 전화번호부 속 이름은 단 하나도 지우지 못했으니까. 그들의 휴대폰에서 내 번호는 사라졌지만, 나에게는 과거와의 연결 고리가 끊기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마치 나 혼자만 아는 비밀번호처럼.
헤어진 남자친구의 전화번호는 망설임 없이 지웠다. 하지만 그의 번호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기에, 그건 지우지 않은 것과 같았다. 그가 내 번호를 모른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될 뿐이다. 우리 연애는 햇수로 7년째, 어렵게 끝을 맺었다. 그와 헤어질 이유는 충분했다. 남초 학과를 졸업하고 남초 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어느새 닳을 대로 닳은 남자가 되어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좋아했던 바른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한때는 그를 사람 그 자체로 좋아했다. 그 역시 그랬기에, 우리가 헤어지더라도 인연의 끈만은 놓지 않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변했고, 나도 변했다. 너무 일찍 만난 '타이밍'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나는 그와의 이별을 조금이라도 빨리 극복하기 위해 전화번호를 바꿔버렸다. 대학교 시절 함께했던 모든 인맥도 자연스럽게 정리되었다. 우리는 대학교 CC였다. 그와 함께했던 시간이 끝나자마자, 대학생활을 공유했던 사람들이 내 삶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의 흔적을 남김없이 지우려는 듯이.
헤어지던 해 그는 3년 후에나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그가 헤어지자는 말을 돌려서 하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그 말이 진실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정확히 3년 후였다. 그의 결혼소식을 들은 것이다. 겹치는 인맥들과의 연락을 완전히 끊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SNS를 염탐하며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있었다. 상대는 우리가 헤어지고 힘들어하던 시기에 그가 소개팅에서 만난 여성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녀는 나보다 딱 세 살 아래였다. 나는 그의 소식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지만, 그는 내가 알고 있을 거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고통스러워진 사람은 나였다. 혼자만 과거에 갇혀 있는 기분이었다.
그때 나는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 호감만으로 시작한 관계는 아니었다. 우리는 '결혼'이라는 결론부터 생각하고 만났다. 내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배우자로는 괜찮은 선택지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그에게 크게 정을 붙이지 못했다. 데이트는 마치 면접처럼 느껴졌고 설렘보다는 의무감이 앞섰다. 결국 일 년 반쯤 만나다가 아무 결론 없이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만약 결혼을 했더라도 그저 그런 부부가 되었을 거다. 뻔한 연인이 되는 게 싫어서 이별을 결심했던 내가 이 관계를 이어갈 수 없었던 건 당연했다.
사람을 잊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추억이 담긴 물건을 정리하고, 어떤 사람은 아예 새로운 환경을 찾아 떠나버린다. 나에게는 전화번호를 바꾸는 것이 그 방법이었다. 새 번호를 통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었다. 그러나 번호를 지운다고 해서 추억마저 삭제되지는 않았다. 전화번호부 어딘가에는 여전히 과거의 이름들이 남아 있고, 내 기억 속에는 그 시절의 감정들이 아로새겨져 있다.
휴대폰 속 전화번호부를 다시 본다. 낯선 번호들 사이에 익숙한 이름들이 보인다. 한때는 매일 연락했던 친구, 어색하게 인사만 나누는 옛 동료, 그리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까지. 그들의 이름은 단순한 문자열에 불과하지만, 그 뒤에는 잊고 싶은 기억 혹은 그리운 추억이 숨겨져 있다. 전화번호부는 단순한 연락처 목록이 아니라, 나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끈'인 것이다.
결국 인간관계를 리셋한다는 건, 단순히 외부 흔적을 지우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전화번호만 바꾼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전화번호부에 그대로 남은 이름들처럼, 내 마음속에도 지우지 못한 기억들이 남아, 이렇게 종종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