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뜨고, 힘 빼고 삽시다
퇴근 후 집으로 가는 버스 안. 다음 날 중요한 미팅이 있어 노트북과 관련 자료, 처리할 문서를 양손 가득 들고 있었다. 버스가 살짝 흔들릴 때마다 내 몸은 속절없이 흔들린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발가락 열 개에 힘을 꽉 주었다. 노트북 가방을 쥔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있었지만, 자꾸만 몸이 휘청거린다.
왜 이렇게 균형 잡기가 힘들지?
문득 깨달았다. 나는 버스가 가는 방향을 보지 않고 있었다. 내 손에 든 짐만 의식하며, 혹여 떨어뜨릴까 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버스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일단 집까지 가는 것만 알았다=길치). 온몸에 힘을 바짝 주고 있으니, 작은 움직임에도 더 크게 흔들렸다.
시선을 돌려 비로소 앞을 보기 시작하자 신기하게도 몸이 편해진다. 몸을 버스의 움직임에 맞추고, 버스가 가는 방향으로 시선을 맞췄다. 방향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균형을 잡는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 바짝 힘이 들어갔던 몸에 서서히 긴장이 풀린다.
만원 버스를 타는 일은 마치 인생과도 닮았다. 삶이라는 버스에 몸을 실은 우리는 각자의 짐을 지고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쓴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달리고만 있다면, 아무리 힘을 주고 버텨도 휘청거리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랬다. 국문과 졸업을 앞두고 앞으로 뭘 먹고살아야 할지 걱정이 깊었다.
국문과를 ‘굶는 과’로도 부른다는 걸 그때서야 알았다. 하얀 종이랑 펜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긴 개뿔,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얀 종이와 펜을 들고 어디든 가 보기로 했다. 방송국 막내작가로 구르고, 출판사에서 교정을 보고, 카피를 쓰러 들어간 작은 광고회사에서 기획도 하고 마케팅도 했다. 프리랜서 기자와 작가로도 활동하며 글쓰기와 관련된 많은 일을 경험했다.
온몸에 힘을 주고 늘 긴장한 채였다. 타격감이 좋은 인간이라 작은 일렁임에도 쉽게 흔들렸다. 사수가 조금 갈구면 당장이라도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었고, 상사가 조금만 칭찬해 주면 급 애사심이 생겨 자발적 야근을 하기도 했다. 아끼던 후임이 사실 뒤에서 나를 씹고 있던 걸 알고는 충격을 받고 회사를 그만둔 적도 있다. 각 잡고 힘을 잔뜩 주고 살던 시기. 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그저 달리고만 있었다.
나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상사에게 지적받고 화장실에서 울면서도, 후임에게 통수를 맞을 때도,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도, 아침에 일어나서도 물었다. "이게 진정 내가 원하는 일일까? 이 길이 맞을까? 잘하고 있는 건가? 만족해? 행복해?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될까?"
그러면서 서서히 눈을 떴던 것 같다. 그나마 운이 좋았던 건 그 길이 맞았다는 거다.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 닥치는 대로 하고 살았는데 천만다행으로 그 방향이 맞았다. 어느 날 눈을 번쩍 뜨고 보니, 그런대로 평범 비슷하게는 살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 앞을 보는 일은 사소한 일이다. 그런데 그 작은 변화가 내 몸의 균형을 바로잡았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일상에 치여 방향을 잃지 않으려면,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계속 물어야 한다. 그 길이 맞는지 의심이 들 때,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지 고민해야 한다.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을 때 비로소 평온을 찾을 수 있다.
시간이 흘러 회사에서 팀장을 달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상사와 후임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려 노력하다 보면, 지금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이 일이 정말 나와 맞는 걸까? 만족스러운가? 행복한가?" 방향을 잃을 때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다시 중심을 잡아야만 했다. 그래야 상황이 아무리 힘들어도 나아갈 수 있다.
삶의 균형은 때로는 힘을 덜어내는 것에서 온다. 내가 가야 할 곳을 알고 있을 때,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다. 그저 내가 정한 길을 묵묵히 걸어가면 되니까.
아직도 삶의 균형을 완벽하게 잡았다고는 할 수 없다. 여전히 휘청거리고, 때로는 넘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내 삶의 방향을 알고 있기에, 넘어져도 다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가방을 고쳐 매고 버스에서 내리며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삶이라는 긴 여정을 떠나는 여행자다.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넘어지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만의 균형점을 찾아간다. 그 균형점은 유연하다. 우리의 여정과 함께 계속해서 변화하고 성장한다.
앞으로도 나는 끊임없이 질문하며 방향을 점검하고,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방식으로 이 여정을 이어갈 것이다. 그러니까 힘 좀 빼고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