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혹에 빠지기 쉬운 사람일까?
오랜만에 '밥 친구'로 당첨된 '꼬꼬무'. 148회 ‘인간사냥-피라미드의 덫’ 편. 피라미드(다단계) 판매 피해자들의 이야기였다.
1998년, IMF 직후 암울한 시기. 전국 곳곳에서 20대 초중반 젊은 남녀가 사라진다. 명문대생부터 갓 제대한 사람, 취업준비생, 사회 초년생까지. 연락이 뜸해지더니 몇 개월째 생사도 알 수 없다. 그 시작은 친구의 전화 한 통.
어머, 제대했다고? 너무 잘됐다! 너 시간 많지? 우리 일단 만나자!
제대하자마자 연락이 닿은 친구가 제안한 3일간의 아르바이트. 그렇게 강남을 찾은 석민. 대학생 현주, 취업 준비생 창호도 친구의 아르바이트 제안을 받고 강남으로 향한다. 그 3일이 그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게 되는데…. 그들이 찾아간 곳은 바로 피라미드 판매 회사였던 것.
첨에 친구가 연락할 때부터 수상했다. 저걸 저렇게 홀랑 속냐 싶어서, '참 순진도 하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요즘도 이런 거 있던데. 네트워크 마케팅 어쩌고 하는, 블로그 하다 보면 “글쓰기 부업으로 월 천 벌었어요”하는 댓글들, 이거 다 다단계, 피라미드 이런 거 아니었나?
갑자기 생각난 대학 시절의 기억. 화장품 다단계 회사에 끌려가서 몇백만 원 빚진 애가 있었다. 사실은 한 달 정도 사귄 4살 연하 대학생(당시 나는 막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던 시기)이었다. 달변가라 얼핏 멀쩡해 보이지만 대화를 좀 나눠보면 어딘가 어수룩하고 허세가 있는 스타일. 허우대 멀쩡하고 착하긴 했다. 알고 보니 집은 지지리 못 살고, 홀어머니와 어린 여동생과 살았는데, 그 엄마가 없는 돈을 만들어서 다단계 빚을 갚아줬단다.
어느 날 그 얘기를 울면서 털어놓는 그에게 '이런 얘기까지 한다고? 날 정말 신뢰하는구나'라는 생각보다는 '왜 이딴 얘기를 해? 정 떨어지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무튼 그 애는 앞으로 어떻게든 돈을 많이 벌어서 성공할 거라고 했다. 지금은 연락이 끊긴 지 오래라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 버스가 끊기면 택시 탈 돈이 없어서 몇 시간을 집까지 걸어가던 애였다. 내 눈엔 솔직히 한심하기만 했다.
걔도 제대 후 복학하기 전에 시간이 붕 떠서 알바라도 해야 하나 싶을 때 '당했다'고 한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솔직히 그런 데 속아서 가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프로그램 말미에서 이런 일은 절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라고, 작정하고 속이는 거니 피해자를 비난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다단계 회사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방법이 생각보다 과학적(?)이긴 했다. 목표물(친구, 지인)의 성격과 성향은 물론 경제 상황과 집안 분위기 등을 파악해서 상당히 혹할 만한 말들로 꼬여 냈던 것. 그런 식으로 ‘인간 사냥’을 해온 역사가 장장 10년이 넘었다고 하니, 그 많은 피해자들이 모두 어수룩해서 속은 건 아닐 거다. 그저 빨리 돈을 벌어 조금이나마 집안에 보탬이 되고 싶었고, 무엇보다 한 번쯤은 잘해보고 싶었을 뿐.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 MC들이 게스트에게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일명 '손병호 게임'인데, 질문의 내용이 자신에게 해당하면 손가락을 하나씩 접는 식이다. MC들은 게스트에게 지금 자신이 20대 초반이라고 가정하고(즉, 사회 물정에 어두운 나이) 그런 자신에게 해당하는 내용이 있다면 손가락을 접으라고 했다.
1. 나는 정이 많고 지인들의 부탁을 잘 들어준다.
2. 나는 사교성이 좋고 발이 넓은 편이다.
3. 나는 일을 빨리 시작하고 싶었다.
4. 나는 승부욕이 있다.
5. 나는 변덕이 심한 편은 아니다.
이 날 출연한 게스트들은 손가락을 거의 다 접었다. 모두 성격이 좋고 정이 많은 사람들에 가까웠던 것이다. 두 명은 5개를 다 접고, 한 명은 4개를 접었다.
눈치챘겠지만, 녹화가 진행되면서 밝혀진 건 바로 이런 성향의 사람들이 다단계 사업의 목표물(!)이었던 것. 착하고 성격 좋고 세상 물정 어두운 사람들. 파산 직전 새 활로를 찾아 일본에서 물 건너온 피라미드 판매 사업이 우리나라에서 손쉽게 성공을 거뒀던 것은 바로 이런 정 많은 한국인의 특성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프로그램을 보던 내내 난 심드렁했다. 뭘 저런 델 속아서 가? 그런 생각에 답답했다. 초반에 손병호 게임에서도 난 손가락을 접을 일이 없었다. 정 없고, 단칼에 거절 잘하고, 친구도 별로 없다(만나는 게 귀찮다). 일? 그냥 평생 한량으로 놀고먹고 싶고(젊은 시절에도 딱히 큰 욕심 없이 '한 백만 원 벌어서 글이나 쓰고 살자'는 생각이었으니), 승부욕? 1도 없고, 변덕은 죽 끓듯 하고. 어쩐지 아무도 접근 안 하더라니. 지금은 꽤 사회화가 되었지만, 20대 초반의 나는 상당히 시니컬했다.
그러고 보니 친한 친구가 암웨이였나? 거기 가입해 달라고 한 적은 있다. 일단 귀찮기도 했지만, 알아보니까 가입하는 순간 사업자등록을 내야 한다는 거다. 나중에 실업급여 같은 걸 못 받을 수도 있다길래, 그 말을 전하면서 단칼에 거절했다. 미안하지는 않았고 그런 권유를 하는 친구에게 좀 실망했었다.
생각해 보면 엄마가 좀 저런 스타일(다단계 목표물)에 가깝다. 한때 보험 영업을 했던 엄마는 다단계 판매를 하는 사람들과 상부상조했던 걸로 안다. 서로 돈을 써 실적을 올려주는 거라면 애초에 돈을 안 쓰는 게 나은 게 아닐까 싶지만. 엄마는 애터미, 암웨이 같은 다단계 회사 상품들을 여럿 집에 들였다. 옥장판인지 뭔 장판도 봤고, 방문판매 화장품도 꽤 샀다. 엄마가 보험 일을 그만두자 그런 정체불명의 영양제나 치약, 화장품들도 사라졌다.
당시 엄마는 보험영업을 하면서 적지 않은 카드빚을 졌다. 상품에 대한 지식이나 전문성 없이 알음알음 소개로 간신히 이어가던 엄마의 주먹구구식 영업은 다단계와 다를 바 없이 위태로웠고, 어느 날 휙 쓰러졌다.
그 뒤로 엄마는 정직하게 땀 흘리는 일을 찾아 나섰다. 모텔 청소를 하고 야쿠르트 배달을 하고 식당에서 홀서빙을 했다. 파견업체에 소속되어 병원이나 공공기관의 청소를 했을 때를 오히려 가장 만족스러워했다. 최저시급을 받으며 힘들게 일했지만, 영업을 하기 위해 접대비를 쓰지 않아도 됐고, 일한 시간만큼은 법적으로 정해진 시급을 받을 수 있었으니, 매일밤 고민하며 자기돈을 쏟아부었던(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았던) 보험 영업일에 비할 바가 아니었던 거다.
그렇게 엄마는 ‘미화여사님’으로 정년퇴직을 했다. 정직한 땀방울을 쏟으며 번 돈을 알뜰살뜰하게 모아 적금을 부으면서 살림을 꾸려갔다. 파견업체에나마 소속되어 직장인으로서의 안정감을 느끼며 늦게나마 한 선택에 꽤나 만족해했다.
엄마가 육체노동을 시작하던 무렵 나는 대학 졸업을 앞둔 취준생이었다. 국문과 출신에 들어갈 구멍은 좁은데 월급마저 박한 회사의 취업을 준비하며 나는 새벽부터 자책에 시달렸다. 아빠와 엄마가 일하러 나가는 시간이었다. 인테리어 내장 목수 일을 하던 아빠도 평생 육체노동을 했다. 나이 든 부모는 땀 흘리며 일을 하는데 장성한 내가 집에서 밥이나 축내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그럴 때 다단계판매를 하는 친구가 유혹의 말을 건넸다면, 여러 방면으로 나를 분석해 잘 짜인 시나리오로 작정하고 다가왔다면, 나 역시 흔들렸을지 모른다. 그때는 취업이 급했다. 부모님을 편히 쉬게 해주고 싶었다. 최소한 내 밥값은 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린 나이였지만,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조급했다. 다행히 다단계의 유혹은 1도 없었고, 얼마 간의 방황 끝에 전공을 살려 무사히 취업했다. 물론 나의 사회생활도 녹록지는 않았다. 다단계 회사만큼이나 구린 회사들도 전전했으니.
내 장점이자 단점은 의심이 많은 것이다. 사람에게 크게 데인 경험이 있는 건 아닌데(적당히 데인 경험은 많다), 사람을 잘 믿지 못한다. 아니, 믿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달콤한 유혹에 빠진 적은 없지만, 반대로 진짜 좋은 기회인데도 의심만 하다 허무하게 놓친 적도 있다. 좋은 사람을 만났는데 믿지 못해 떠난 적도 있고.
뭐든 적당히가 좋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