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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냥이 Nov 12. 2023

(전)남편이 바퀴벌레로 변하면?

지가 처먹은 우리 엄마 밥이 몇 그릇인데..


Q. (전)남편이 바퀴벌레로 변하면?  

A. 밟아야죠!




이혼. 뭐 대단한 이유로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엄마는 췌장암 투병 1년 반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전남편은 허풍이 심한 사람이다. 마치 처가의 모든 생활을 책임지는 듯 떠벌리고 다녔고, 병원비도 우리가 전액 부담한 듯 말하고 다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허세병에 골프에 매달 300을 써도 엄마 병원비에는 전혀 도움을 드린 적이 없다. 오히려 과일이며 찌개를 해서 집으로 가져온 건 엄마였다. 


엄마는 돌아가시기 5년 전 일하는 딸을 돕겠다며 이곳으로 이사하셨다. 매일 아침 6시면 도어락 번호키 누르는 소리가 들리고, 쌀 씻는 소리가 이어지곤 했다. 매일 아침 식사 준비와 아이들 등교준비를 마칠 즈음 겨우 일어나 차 키를 챙겨 반만 뜬 눈으로 집을 나서는 게 나의 일이었다. 아이들을 두 곳 학교에 내려주고 오면 식탁에는 내 아침밥이 차려져 있었다. 공주 같은 딸과 무수리 같은 엄마가 아이들을 키웠다. 


이제 엄마에게 2달 남짓한 시간이 남았음을 알았을 때, 엄마에게 사과했다. 괜히 여기 와서 고생만 했다고.. 엄마는 매일 아이들을 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하셨다. 그리고 나와 내 동생들을 키우던 그 시절에도 엄마는 힘하나 안 들이고 키웠다며, 행복을 말씀하셨다. 


빅터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를 읽는 내내 엄마 생각을 했다. 로고테라피. 주어진 삶에서 가치를 찾고 행복한 사람들에겐 어떤 힘이 있는 것일까. 엄마의 삶에 대한 태도는 용감하고, 당당했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는 고통의 매일을 보내면서도 엄마는 기둥 같은 그 자태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엄마는 마지막 두 달을 병원에서 보내야 했다. 장폐색이 있었는데, 일주일 정도 치료하고 퇴원하자던 주치의의 계획과 달리 점점 더 악화되었다. 입원 전부터 드신 음식을 토해내셨고 병원에선 물 한 모금도 금지였다. 두 달 동안 수액과 마약성 진통제에 의지하며 병원 생활을 하셨는데, 전남편은 그런 엄마를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병원은 집에서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에 있었다. 점심 무렵이면 일을 마치고 사무실에서 포커를 하거나 술판을 벌였다. 시간이 없어서라는 말은 못 할 거다. 그 사람은 왜 사위인 척 조차 하지 않았을까. 대체 무엇에 정신을 팔고 있었던 건지 이제 와서 알고 싶지도 알 필요도 없다. 여기서 밝히려는 건 기본도 하지 않는 남편의 태도가 망설이던 이혼을 결심하게 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거다. 


술을 좋아하고, 게임을 좋아하고, 낚시에 빠져있어도, 그래도 사람이 착하니까라고 생각했던 마지막 사는 이유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엄마가 어떻게 했는데. 엄마 생신에도 전화 한 통 하라고 종일 졸라야 하던 사람을 나는 왜 착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을까. 사람이 살아남으려고 기억과 현상을 조작하는 경우가 있다. 남편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면, 그 사람을 선택한 나를 견딜 수 없었던가. 나는 참 사람 보는 안목도 지혜도 없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엄마를 서산 절에 있는 납골당에 모셨다. 가는데 5시간 돌아오는데 5시간. 집에 오니 이미 저녁 시간이 지나있었다. 우리는 대충 식사를 준비하고, 무언가 하나는 배달시켰던 것 같다. 간단한 술상이 차려지고, 엄마 얘기를 주고받았다. 엄마가 있어서 늘 행복했던 우리들을 추억했다.


그날 눈에 띄는 장면이 있었는데, 재미있다. 식탁 아래에서 메시지를 쓰는 남편의 두 손이 바빴다.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장문의 글을 쓰고 보내느라 내가 보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뭐 해? 바쁘네?"


남편은 거래처에 내일 물건 공지 문자를 보냈다며 나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기껏 5줄 정도 되는 안내문을 두 곳에 보낸 내역을 보여주는 남편이 우습지도 않았다. 저기요. 저 아~까부터 보고 있었거든요. 


그러든지 말든지. 신경 쓰기도 귀찮았다. 장모님 출상한 날에도 어디 꼭 연락할 데가 있나 보지. 


당황한 듯 살짝 상기된 남자는 담배를 피우고 오겠다며 내려가서는 10분이 지나도 올라오지 않았다. 


'미친놈. 전화하나 보네.' 사랑이었는지, 썸이었는지. 그즈음 그 사람은 뭘 하고 다니는지 늘 바빴고, 멍청해 보였다. 돌아가신 장모는 안중에도 없던 그 사람을 떠올리는 지금 내 마음엔 아무런 감정이 없다. 덕분에 사람을 바로 보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절에 49제를 맡겼다. 매주 토요일 제사를 지내러 서산을 다녀왔다. 주말에도 일을 해야 하는 그 사람은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고 미리 얘기했다. 같이 다니기도 창피한 인간을 좋은 사위로 알고 칭찬하는 사람들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래도 마지막 제사 때는 꼭 오라고 여러 번 당부했다. 


49제가 있던 날, 나는 엄마 제사에 늦었다. 일이 많아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4시에 잠깐 눈을 붙였다. 남편이 운전하기로 했으니 깨우겠지라고 생각했다. 눈을 번쩍 떴을 때는 이미 7시가 지나있었다. 5시간 떨어진 절에 가려면 최소한 6시에는 출발했어야 했는데 정신이 아득했다. 옆자리에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급히 아이들을 깨우도 옷을 입고 뛰어 나갔다. 눈물을 쏟으며 차를 출발하는데 화가 났다. 같이 가기로 했던 그 사람은 왜 어젯밤 잠들기 전까지도 못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까. 그럼 6시 전에 출근을 했다는 건데 왜 나를 깨우지 않고 나갔을까. 왜 깨우지 않았는지 전화를 걸어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믿기 어려웠다. 


"제사가 몇 신데?" 


며칠 전부터 수도 없이 말했다. 지난밤 잠들기 전에도 내일 5시에 출발해야 한다고 했고, 알았다고 했던 사람이었다. 대체 이 사람 머리에 무슨 일이 생겼던 걸까. 


"알 거 없어. 오지 마. 오기만 해!"


전화를 끊고 달렸다. 엄마 미안해. 엄마 미안해. 눈물을 닦으며 엑셀에 힘을 주었다. 


혼자 나타난 나를 보며, 사람들은 내 뒤를 눈으로 살폈다. 


"아, 일이 많아서 못 왔어." 나는 급히 사촌언니에게 사정을 말했다. 


"그래. 일해야지." 


언니는 그럴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눈빛엔 물음표가 고스란히 보였다. 궁금했겠지.


그날 모두가 집에 가려고 준비하던 시간 그 사람이 나타났다. 세상 선한 얼굴을 하고 나타나 일 때문에 늦었다며 죄송해했다. 그쪽으로 눈도 두기 싫었다. 서둘러 준비를 하고 먼저 출발해 나왔다. 집에 오는 내내 화가 나고 분했다. 벌레 같은 놈.






힘든 순간에 알게 되는 사람의 됨됨이가 있다. 아무리 술 좋아하고 여자 좋아하는 놈도, 기본은 한다. 하는 척이라도 한다. 그 마저도 못하면 사람이라 부르지 않는다. 


내가 이혼한 두 번째 이유, 사람이랑 사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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