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에세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월 May 11. 2024

HSP, 매우 예민한 사람의 청소 이야기

자기 하고싶은 것들만 하면서 모두가 만족스럽기.

나는 HSP, '선천적으로 매우 예민한 사람'이다.

전홍진 선생님의 책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을 통해 HSP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타인의 사소한 말도 마음속에 박힌다던가,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답답하고 피로해진다던가, 밤에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와 콘센트 전류가 흐르는 소리에 잠을 잘 수 없다던가 등등.


그 덕분인지 청결에서도 많이 신경을 쓴다.

물건들은 정해 둔 자리에 두어야 한다. 요리를 할 때 양념이 주변에 튀면 바로 닦아야 하고, 수저와 요리 도구가 주방 상판이나 테이블 위에 그대로 올려져 양념이 묻는 걸 상당히 거슬려하고 만약 묻으면 바로 물티슈부터 가져온다. 밥을 먹던 중이더라도 양념을 닦은 물티슈는 바로 쓰레기통으로 가져다둔다. 쓰레기는 덜 찼더라도 담배를 피우러 갈 때 마다 들고 내려간다. 샤워를 하다가도 화장실 바닥 타일이나 세면대에 물때 등의 얼룩이 눈에 보이면 바디워시로 된 거품 옷을 입은 상태로 솔을 집어든다. 이럴땐 조금 추워서 따뜻한 물을 중간중간 뒤집어써야 한다.


뭐든지 눈에 거슬리지 않고 내 주의력을 빼앗지 않는 상태가 편하다. 약속으로 밖에 나가는 일이 끔찍할 만큼 나태하지만 슬리퍼를 끌고 혼자 산책하는 건 좋아한다. 가만 앉아서 쉴 때 눈에 아무것도 거슬리지 않는 안정된 상태가 어질러져있어도 앉아만 있는 행복한 게으름보다 더 가치있다. 가끔은 한 밤중에 책을 몽땅 들어내 정리를 몇 시간 동안 하게 되더라도 잠깐이라도 눈에 띄면 책을 전부 들어낸다.


그렇지만 결벽증은 아니다. 집의 바닥에 카펫타일을 깔아놓은 이후로, 발에 머리카락이나 이물질이 밟히지 않는 이상 청소하지 않는다. 덕분에 대충 짧으면 일주일, 길면 한 달에 한 번 정도 돌린다. 이불이나 침구류도 눈에 띄는 얼룩이 있지 않는 이상 잘 세탁하지 않는다. 요즘에는 더워져서 냄새 때문에 하루종일 집에 있는 날이면 주기적으로 세탁을 한다만.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내 깔끔은 위생을 위한 깔끔이 아니라 감각을 위한 깔끔이다. 시선을 빼앗는 것이 없도록. 코를 찔러 거슬리는 냄새가 없도록. 피부에 쓸데없는 자극이 가해지지 않도록. 귀를 사로잡아 집중을 깨는 소음이 없도록. 미각은 여기서 빼도 될 것 같고.


그런데, 너무 강박적으로 이러는건가 싶던 생각은 다른 사람들 덕분에 금방 사라졌다. 잠깐 집에서 같이 지내던 친구는 건강을 끔찍이 신경쓴다. 나이 스물 다섯에 벌써 매일 챙겨먹는 영양제가 두자릿수인 것 같은데, 그것도 하나하나 영양성분끼리 과하거나 부딛치는게 없는지 분석해가며 먹는다. 그 덕분에 집에서 지내는 내내 호흡기가 나빠질 걸 걱정해서 매일 자기 전 잠자리에 돌돌이를 굴리는 건 물론, 심심하다 싶으면 카펫과 바닥 전체를 청소하고 있는다. 피부에 직접 닿는 옷이니만큼 빨래도 재깍재깍 돌리고 묵혀놓는 시간이 없도록 대기하고 있다가 칼같이 건조기에 넣는다.


다만 건강만 해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상관이 없는 것일까, 사용하던 태블릿이나 옷가지, 쓰레기 등은 적당히 굴러다니게 둔다. 덕분에 내 정신 건강에 해로워서 내가 먼저 일어난다. 그 덕분에 친구와 함께 지낼 땐 내가 쓰레기들을 치우고 정리정돈을 하고, 친구는 바닥의 먼지 청소와 빨래로 역할이 굳어졌다.


여자친구는 피부도 퍽 좋은데도 불구하고 얼굴 피부를 금이야옥이야 아낀다. 내가 볼을 만지는 걸 포함해 얼굴에 뭔가가 닿으면 끓는 물이 닿는 것 처럼 기겁을 한다(처음엔 좀 서운했었는데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도 하고 가끔은 무시하고 만져댄다. 대충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넘어가주는 것 같다. 그래도 1.5초를 넘겨선 안 된다). 심지어 세수를 하고 나서 수건으로 물기도 닦지 않고 손 부채질로 알아서 마르길 기다린다. 절대로 기초화장품을 바르기 전에 손과 얼굴에 아무것도 접촉을 해서는 안되는 불문율이 있다. 간혹 내가 세수를 하고 스킨로션을 바르기 전에 드라이어를 집어드는 걸 보면 뭔가 찝찝해하는게 뒤통수로 느껴진다. 아, 치아도 얼굴의 일부분이라 그런가 양치는 꼭 3분 이상, 입 헹구기는 혀 안쪽까지 물이 닿도록 해서 10번을 제대로 하는지 감시한다.


그러면서도 자칭 집순이라 그런가, 한 번 드러누우면 일어나지 (않는다)못한다. 조금 어질러지더라도 나중에 정말 어쩔 수 없이 일어날 일이 생기면 그때 한번에 처리하겠다는 다짐같은데, 늘 그러기 전에 내가 먼저 냅다 치워버려서 어떻게 하는지 직접 보진 못했다. 뭐, 배달음식은 여자친구가 자주 사기에 맛있는걸 얻어먹었으면 치우는 건 당연하단 마음으로 정리한다. 오히려 너무 열심히 치워서 여자친구가 불편해하는 눈치라 요즘엔 치우려 왔다갔다하는 횟수를 최대한 줄이려 애쓰는 중이다.


다들 저마다의 방식으로 깔끔을 떤다. 특히나 신경쓰는 점들을 보면 '결벽증인가' 싶을 정도로 유난을 떠는 것 같은데 막상 그 외의 영역에선 '이게 맞나' 싶을 정도로 허술하다. 그런걸 보면, 서로 각자 유난을 떠는 부분에서 열심히 하면, 다같이 잘 지낼 수 있어 보인다. 자신이 즐겁게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다른 사람들이 놓치거나 하기 싫고, 어렵게 느끼는 것들은 서로 보완해주고. 서로 보채고 다그치는 일만 없다면 말이다.


비록 작은 공간에서, 청소 한 가지에서 이뤄졌지만, 어쨌건 작은 유토피아의 조각을 발견한 기분.

매거진의 이전글 지금도, 그 시절의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