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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월 Nov 11. 2024

희생

왜 희생하는가

  나는 타인의 목숨을 위해서 자신을 불사르는 행위들을 경멸한다. 왜 일면식도 없는 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고, 위험을 감수하는 미련한 짓을 하는가. 그 마음은 다른 이를 도와주고도 욕을 먹고, 고소장을 받을지도 모르는 요즘 같은 세상이라 더 강해졌다. 그래서 나는, 뉴스에서 누군가가 타인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선의를 실천했다는 이야기들에는 대단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그런데, 굳이?'라는, 의문과 몰이해가 뭉쳐진 감정이 함께 떠오른다. 그리고 왜 우리는 '희생'이라는 가치를 갖고 있으며, 그것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이어져 왔는가에 대한 대답은 전혀 다른 곳에서 찾았다.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종의 동물들이 존재한다. 지구에서 생명체가 생겨난 이래로 수많은 종의 생물들은 저마다의 생존 전략을 갖고 진화를 거듭했다. 그리고 그중 극소수 이외의 생물들은 모두 노화의 과정을 갖고, '죽음'이라는 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생존 전략'을 위해 '노화를 그 종들이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 또한, 노화가 오고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는 방식으로 종이 연명할 수 있도록 전략을 짰다.


  이는 단순히 생각하면 받아들이기 어렵다. 과거로부터 인간들은 영생, 불로장생을 위해 수은까지 음용할 정도로 이에 대한 열망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짙은데 어떻게 스스로 필연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설계되었을까. 우선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이 먹이사슬의 정상까지 올라 천수를 누릴 때까지 살 수 있을 가능성이 불가능할 정도로 낮았기 때문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원인은 '종'의 존속이 '개체'의 생존보다 우선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맥락으로 우리 인간의 뇌리에 심겨 있는 것이 '희생'이다.


  낱 개체로써는 생존에 전념하기도 바빠 진화의 의중을 모두 파악하진 못했다. 단지 희생과 같은 딱히 이득이 되지 않는 행동을 '왠지 해야만 할 것 같다'고 심어놓은 트리거에 따라 저도 모르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 이성이 이를 막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여버리는 것이다. 그저 한 명의 인간에겐 자신의 목숨이, 자신의 안녕이, 자기 삶이 이성적으론 최우선 순위에 드는 것이 옳더라도 저 한목숨을 바쳐 일면식도 없는 개인과 사람들을 위해 희생한다. 차량에 치일 뻔한 어린아이를 위해 뛰어든다든가, 어디서 고통받을 사람들을 위해 즐거움을 내려놓고 일평생 동안 사명감에 어떤 일에 매진하는 등.


  인간 진화의 방향은 타인을 위해 희생하면서 종을 이어 나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문명의 발전이 고도화되며 나 하나가 잘 살고 즐기기에도 너무나 바쁜 세상이 되어가며 우리는 유전자에 새겨진 설계도와 다른 방향의 삶을 추구하고 있다. 애초에 나약한 인간이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으며 '종의 존속'이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선, 희생, 사랑, 사회화, 친화력 등 개체들이 뭉칠 성향들을 심어놓았는데 이젠 외부의 위협보다 오히려 같은 인간의 공격 이외엔 위협이랄 것도 없어 혼자서도 잘 살아남을 수도 있는 세상이니만큼, 그리고 종의 존속에 가장 핵심적이자 기본적인 출산조차 극도로 줄어가는 만큼 우리는 우리의 본능을 잃어간다고, 혹은 본능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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