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랑 Dec 02. 2021

심리상담가의 마음 일기

내 안에 ‘태어나려는’ 또 다른 나와의 만남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그러기가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데미안』 중에서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왜 내가 늘 양보해야 하는데? 내가 왜?!!!”

늘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살피고, 돌보기에 바빴던 수십 년이 지난 어느 날 내 안에서 ‘솟아 나온’ 외침.


‘왜 늘 다른 사람들이 먼저일까? 나는?’

‘나는 왜…?’

떠오른 질문.


‘나’라는 호칭 앞에 서니 멍해졌다. 나는? … 나?

‘뭐가 나야..?’


내가 아는 나는 남들에게 보이는 나뿐,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에 신경 쓰는 나뿐.

다른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에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어딜 가나 친절하다거나 성격이 좋다는 칭찬을 듣고, 사람을 잘 사귀고, 만나자는 이들이 주변에 북적이고,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기고, 주일에는 성당에 가서 하느님 앞에 나의 불경한 언행과 마음을 고해하고, 조금 편안해진 마음으로 다시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딸’로 살리라는 다짐을 하는. 내 삶은 꽤 괜찮은 것이었다. ‘좋은 딸’, 선한 자녀, 선한 사람, 좋은 사람.

‘좋은 사람’이고자 했고, ‘좋은 사람’으로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좋은’ 사람이란, ‘선한’ 사람이란 늘 ‘나보다 너’에게 좋은 것을 주는/하는 사람이니까

‘나’는 안중에 없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들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스물아홉 살에 심리학 공부를 시작하고, 서른두 살에 상담을 업으로 삼기 시작하고도 삼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지하철에서 눈을 뜨고도 어르신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예의 없는 인간이 될 수 없어 눈을 감고 있던 사소한 습관에서부터 친구들과 만나면 당연스레 “네가 가고 싶은 곳/먹고 싶은 것 골라”하고 내어주던 선택권들, 가족이 모이는 날이면 가족 모두가 즐겁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게 하기 위해 쏟아붓던 다양한 노력들까지- ‘너’, ‘너’, ‘너’를 위해, ‘너’를 향해 뻗어있던 레이더가 고장 난 듯 지지직거리고, 내 안에서 무시할 수 없는 폭발음이 터져 나와 내 가슴을 때렸을 때  나는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내가 내 안 깊숙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부터 내 안 깊숙이 도사리고 있는 나, 알에서 깨어 나오지 못하고 그 안에 꽁꽁 갇힌 채 살아온 또 다른 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데미안』에서 헤르만 헤세는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고 말한다.


나는 태어나지 않은 자였다. 또 다른 나의 외침은 ‘태어나야 한다’는 강렬한 욕구로 예고 없이 내 안에서 솟아올랐고 나를 둘러싼 알을 깨뜨리도록, 나를 투쟁하도록 이끌었다. 새가 투쟁하고 나와야 하는 알—세계—은 단 하나가 아니다. 세계는 하나의 세계에서 또 다음의 세계로 이어진다. 때로 그 세계들은 서로 엉퀴어 작용하기도 한다. 세계들은 조금 얇은 세계, 그보다 두터운 세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세계, 보이지 않는 심연에서 그 기운만을 풍기는 세계, 때로는 도저히 뚫고 나갈 수 없을 것 같이 무겁고 짙은 세계, 하지만 조금만 용기를 내면 또 예측 불허하게 깨어져버리는 기묘한 세계 등 다양하다.


이 일기에서 나는 마음을 탐구하고 살아내고자 하는 심리학도의 관점에서 ‘내 안 깊숙이 있는 또 다른 나’를 살아내기 위해 투쟁하고 깨뜨려야 하는 알의 층들-세계-을 내가 어떻게 알아채고, 경험하고, 깨뜨리는지, 그 배움과 이를 통해 발견하게 된, 회복하게 된, ‘또 다른 나’의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한다.


여전히 투쟁하고 있다. 여전히 깨야할 세계가—보이지 않은 채— 겹겹이 나를 감싸고 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나에게 달콤한 거짓으로 지금의 세계 안에 머무르라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묻어두고 도망칠수록 내 안의 외침은 더 커진다. 다양한 고통으로 내 앞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내가 더 깊은 내 안의 나를 알지 못해 치러야 하는 전쟁. 솔직하게 대면해야 한다. 그것이 투쟁이다. 이 마음 일기는 솟아 나오는 나를 만나기 위해 지금의 나와 나누는 솔직한 대화가 될 것이다.


내 마음을 내 뜻대로 할 수 없음에 좌절하는, 이를 통해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음을 알아차린—또 다른 나를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세계 안에 가둬둔 채 내 마음의 수인囚人이자 간수看守로 살아가는—, 그럼으로써 이제 알에서 태어나려 고군분투하는 많은 이들과 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 『데미안 Demian』(민음사, 2016)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