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랑 Dec 13. 2021

나 vs 나_2

네 안에 나



꼴 보기 싫은 인간들이 생겼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


가족들이 다 모여있는 자리에 ‘자기 기분대로’ 방에서 나오지 않는 언니가 꼴 보기 싫었다. 사람들이 여럿 함께 하는 자리에서 ‘자기 마음대로’ 이거 하자, 저거 하자 하는 친구에게 짜증이 나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대놓고 막 성을 내는 친구를 도저히 마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나의 이런 마음을 그들에게 드러낼 수는 없었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하며 한심해하거나 ‘도저히 상종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 욕하며 혼자서 씩씩거렸다. 되도록 안 마주치려고 노력했지만 그 와중에도 난 상대방의 욕구 want를 먼저 들어주는 인간이므로.., 그들이 나를 필요로 하거나 원하면 ‘좋은 사람’인 가면을 쓰고 앉아 그들과의 시간을 인내했다. 문제는 이런 나의 불편함을 감추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꼭꼭 눌러 내 안에 감춰 둔 불편한 감정들은 나의 술버릇으로 봉인해제가 되곤 했다. 술을 마시는 날은 으레 기억이 끊기는 날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기억이 끊길 때까지 술을 마시는 것이다. ‘내가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술이 나를 마신다’고 던지곤 했던 농담은 농담이 아니었다. 술이 나를 마시고 나는 술의 힘을 빌려 쌓아 두었던 부정적인 감정들을 표출했다. 그것은 시비의 형태로 터져 나와 즐겁게 술자리를 하던 가까운 이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대개 ‘주사酒邪’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런 행동은 ‘술자리에서 일어난’ 재미난 에피소드의 형태로 포장되기도 하고 이를 받아주어야 하는 이들에게는 ‘술로 인한’ 이상 행동으로 수용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주사를 가진 사람은 대개 왜 그렇게 술을 마시고 ‘주사’를 부리는 가에 대해서는 잘 생각해보지 않는다. 술을 마시고 하는 행동은 내가 아니라 술이 한 것이니까.

‘나’는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술’이 그런 것이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하도록 술을 선택한 것은 ‘나’다.

난 상담을 받으며 내가 술을 통해 억압된 나를 드러내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술을 마시며 흥청망청하는 것이 만연한 20대에 나의 주사는 대단히 도드라진 행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20대 후반까지 이어지던 행동 패턴에도 변화가 생겼는데 점점 주사가 세지고, 그로 인한 사건 사고가 하나, 둘씩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어느 날, 가장 가까웠던 친구와의 -어떤 연유로 벌어진 지 기억도 나지 않는-말다툼이 주먹다짐으로 이어졌고 이를 말리던 언니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떠안게 되었다. 새벽에 길 한복판에서 벌어진 몸싸움을 뜯어말리며 온갖 욕을 나에게 다 들어먹은 언니는 겨우 나를 집에 데려와 재우고는 한숨을 못 잤다고 했다.


자주 부렸던 주사 후에는 루틴이 있었다. 주사를 부리고 난 다음 날이면 으레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내가 한 ‘짓’을 다른 이들의 말을 통해 복기하고 ‘의도-악의- 없는 행위’였음을 고백하는 사과가 이어지곤 했다. 하지만 그날은 뭔가 아주 큰일이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렴풋이 어두운 방에서 눈을 떴을 때 온 몸이 쑤시고 아팠다. 너덜너덜해진 옷가지를 입은 채였고 쓸리는 곳을 보니 상처가 나 있었다. 뭔가 아주 포악한 일이 일어났구나...짐작했다. 내 안의 모든 용기를 끌어올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왜 그랬냐?’, 가볍게 사과의 의례를 시작했는데 친구의 목소리가 보통 때와 달리 매우 저조했다. "너 나한테 왜 그랬어?" 친구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일어난 일을 늘어놓았다. 나의 일방적인 시비였고 나의 일방적인 폭발이었다. 친구도 취기가 올라온 상태에서 무방비로 당했고 어안이 벙벙하다고 했다. 심하게 몸싸움을 해서 한쪽 고막이 나간 상태라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도대체 왜 그런 거냐고. 자기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그동안 느껴본 적 없는 강도의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그냥 ‘무해한 주사’였다는 사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어떤 변명도 나오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미안하다는 사과 밖에는. 미쳤나봐.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나도 내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미안.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 것에 대한 사과는 의미도 없고 무색할 뿐이다. 일단 나의 사과에 친구는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알았다고, 조만간 다시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한다. 매우 지쳐보이는 목소리로. 나에 대한 화는 조금 누그러졌다. 한숨 내려놓는다. 여기서 일단락은 되었다. 다행이다 익숙한 안도감이 나를 감돈다.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어두운 방에 누워 있으니 '뭐지…' 섬뜩한 기분이 몰려들었다. 알코올에 잠겨 수분이 다 빠져나간 몸이 나를 더 옥죄여오는 것 같았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두려움이 목구멍을 조여 오면 몸서리를 치며 떨쳐내기를 수차례. 숙취가 심했으므로 한나절을 그렇게 시체처럼 누워 잠으로 몸을 회복했다. 저녁이 되어서야 방 밖으로 기어나가 물을 마셨다. 아무것도 모르는 가족들과 시시덕거리며 저녁을 먹고 나니 다시 살 만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 아무도 몰라. 친구 하고만 잘 해결하면 돼. 어느새 수치심과 두려움은 어두운 방구석에 두고 나는 다시 원래의 '이쁨 받는 나'로 돌아가고 있었다. '혼자 남겨질' 방으로 향하는 무거운 발걸음을 애써 격려하며 방에 돌아왔을 때 하루종일 굳게 닫혀있던 맞은편 방문이 빼꼼히 열리고 어두운 얼굴로 언니가 나를 불렀다.


“너 어제… 기억 나?”

아차.., 언니를 잊고 있었다. 싸운 당사자하고 이야기해서 덮으면 될 거라고 얄팍하게, 간교하게 넘어가려 했던 나의 이성이 나를 잡아 앉혔다.

“난 이제 더 이상 못하겠어. 네가 그렇게 술 먹고 싸우고, 나한테 욕하고 그러는 거… 지금 네 얼굴을 보는 것도 힘들어.”

어렵게 말을 이어가던 언니가 무너졌다.

“절대 못 잊을 것 같아. 다시는 못 하겠어.”

놀란 언니는 떨면서 울었다. 나보다 나의 두려움을 더 잘 느끼는 사람…


나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며 울고 있는 언니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계산이 서지 않았다. 친구는 비교적 쉬웠다. 서로 치고받았으니까. 내가 일방적이었다고 해도, 내가 시비를 붙였다고 해도, 내가 먼저 시작했다고 해도, 같이 마시고 취했으니까, 친구는 그래도 자기 방어를 했으니까.., 내 마음 안에 이런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언니는 아니었다. 언니는 근처 가까운 곳에 있다가 불려 나와 싸움을 말리느라 이유도 없이 맞고 나에게 욕을 먹고 주변에서 이를 보고 있던 다른 이들에게 나를 대신해 사과를 거듭하며 겨우 나를 데리고 집에 왔다. 친구는 다시 이야기를 나누고 자초지종을 나누면서 마음을 풀어나가면 되었다. 그렇게 할 수 있다. 친구는 나를 용서할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나는 또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 나를 포장하면서. 술이 범한 짓이다, 나와는 상관 없다 하면서. 잊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언니는 아니었다.


나와 달리 언니는 꾸밈이 없는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이쁨을 받으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 자기 마음에 솔직한 사람, 그래서 어떤 이들에게는 불편한 시선을 받을지언정 자신의 감정에 더 충실한 사람. 언니는 도망갈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두려움 앞에서도. 나처럼 잔머리를 굴려 나를 지킬만큼만 사과하고 안에서 올라오는 부끄러움, 두려움 같은 거 이리저리 포장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언니는.

언니가 나의 두려움을 대신 느끼고 있었다.


“난 이제 더 이상 못 할 것 같아.”


아이처럼 울면서 무너지는 언니의 말이 나에게 신호탄이 되어 크게 울렸다.

이렇게는 못 하겠다, 이제는.


언니 앞에서 어떤 표정으로 앉아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차라리 엉엉 울어버렸으면 좋았을 걸… 언니,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도 내가 무서워. 언니, 나 좀 도와줘. 어떡해..? 했더라면 좋았을 걸. 포장밖에 할 줄 몰랐던 나는, 늘 받던 이쁨이 아닌 두려움으로 가득 차 나를 바라보지도 못하던 언니의 시선에 답할 줄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어영부영 사과를 한 것 같기도 하고.., 도망치듯 나온 것 같다. 언니의 눈물에 내 마음이 질식할 것 같았다.


서른 살이 되던 해였다.

그 후로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몇 년간은.


그렇게 나는 다시 내 안으로 숨어버렸다.

쏟아져나와 파괴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야만 했던 나의 정체도 마주하지 못한 채.

술을 먹고 잠시나마 폭발적으로 쏟아내던 내 안의 나는 그렇게 다시 언니의 눈물 속으로, 나의 어두운 방 안으로 잠식해버렸다. 한동안은 그랬다.

그것이 가능했다. 

작가의 이전글 나 vs 나_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