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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랑 Dec 30. 2021

또 다른 나와의 첫 만남

네가 나라고..?

술기운을 빌려서야 "너 짜증 나. 꺼져!"라고 소리친 대상들은 주로 내가 싫어하는 면을 가진 이들이었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 기분대로, 자기 뜻대로' 하는 인간들.

멀쩡한 정신에서는 '좋은 사람'이라는 나의 면面을 구기지 않기 위해서 대놓고 이야기하지 못했던 나의 불편한 감정들은 술의 힘을 입으면 여실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난 왜 그들이 불편했을까?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칼 융은 이렇게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다른 사람들의 언행, 더 나아가서는 성향-을 '그림자'라고 이름 지었다.


<그림자는 지금의 내가 나의 모습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나의 부분들을 의미한다.>


'너는 충분히 괜찮은/가치로운/필요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기 위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살피고 그들의 안위를 나의 것보다 우선시해 온 나에게는, '너'를 편안하게, '너'를 기쁘게 하고자 무시하고 돌보지 않은 나의 감정이 늘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내가 절대로 하지 않을 언행-'자신이 원하는 것이나 느끼는 것들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이 ‘그림자’로 자연스레 드리워지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다 드러냈다가는 감당하기 어려운 '홀로 됨'을 경험해야 한다고 굳게 믿던 나에게 타인을 나 자신보다 우선시하는 선택은 당연한 아니, 불가피한 선택처럼 보였다. 홀로 남겨질 때면 내 안에서 올라오는 감정들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랐고, 나 스스로도 처리할 수 없는 감정들을 납득시켜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을 납득시켜줄 타인은 없었다. 내 마음 안에 올라오는 억울함과 서운함과 좌절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 그로 인한 외로움이 대체 무엇인지 그 누구도 나를, 나의 감정을 '받아들여' ‘납득시켜’ 주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내 감정 대신 누군가의 감정을, 생각을, 욕구를 알아차리고 받아들여줌, 채워줌으로 그 사람이 나를 알아봐 주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는 생존 방식이었다. 생존하기 위해 해야 하는 것들이 생기면 자연스레 그와 반대되는 것들은 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내가 '안된다'라고 마음속 깊이로 밀어 넣은 나의 부분이 그림자가 되어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림자는 내 안에서 내가 제거해버린 나의 부분들이다.>

그것은 이미 내 안에서 제거당했으므로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완전히 제거됐다기보다 내가 '알고 있는-의식의- 나'에서 쫓겨나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무의식의- 나' 안에 자리 잡는다. 그리고 타인에게서 발견된다. 내가 억압한 나의 부분이 타인의 모습에서 찾아질 때 나는 타인에 대한 분노와 혐오감을 느낀다. '내가 저렇게 살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쓰고 있는데!'라고 내 마음속 깊숙이 밀어 넣은 나의 욕구가 건드려지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를 만들고 살아내기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이를 통해 나는 얼마나 근사한 타인의 관심과 호감을 보상으로 받았던가. 하지만 타인이 주는 긍정으로 채워지지 않는 내가 ‘지금의 나’의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쟤는 왜 저러는 거야? 미친 거 아니야?'하고 비난하고픈 너에게서 발견된다. 그것은 사실 '너'가 아니라 '나'다.



'나'라는 생김의 꼴이 만들어지고 거기에 빛을 쐬면 딱 지금 내가 생긴 꼴 대로의 '그림자'가 빛이 비추는 곳의 반대편에 드리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불편감을 동반한다. 이유 없이 꼴 보기 싫고, 짜증 나고, 화나고,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그림자>는 그런 '너'가 바로 '내가 알고 있는-의식의- 나'가 밀어낸 ‘또 다른 나’라고 말해준다.

한 마디로 내가 혐오하는 네가 바로 나라는 말이다.

단, 그것이 '나'라는 것을 아직 알지 못했을 뿐.


칼 융은 ‘의식의 나’가 ‘나의 무의식’를 만나는 첫 관문에 ‘그림자’고 있다고 말한다.


그림자'라는 개념을 아는 순간,

내가 혐오하는 네가 바로 나라는 것을 나는 알게-인식하게- 되었다.

의식의 나는 결코 너처럼 하고 싶지 않지만, 무의식의 나는 너처럼 하고 싶다는 것,

나는 결국 내가 억압해 온 나를 살아내고 싶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어마 무시한 자유함이 밀려왔다.


그게 나라니,

내가 하고 싶은 게 그거라니..!


내 마음대로, 기분대로, 뜻대로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그래야 했던 것이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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