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통해 또 다른 내가 되려는 투쟁
20여 년 전에 써놓고 못 준 엽서라며 언니에게 건네받은 엽서를 읽다가 펑펑 울었다. 좁쌀만 한 손글씨로 한 바닥을 빼곡 채운 언니의 엽서의 반은 ‘곧 엄마를 만나는데 어떻게 하면 엄마를 걱정시키지 않을지, 어떻게 하면 엄마 마음에 들지’의 고민들이 적혀있었다. 엽서의 왼켠이 끝나고 오른켠으로 눈을 돌리고 만난 첫 문장,
“언젠가는 우리 모두 엄마의 마음에 드는 날이 오겠지 ㅎㅎ”
옆에 귀여운 이모티콘까지 그려놓은 그 문장이 끝나자마자 “우린 왜 이랬어? 왜 이렇게까지 한 거야?” 농담처럼 뱉은 말을 쫓아 갑자기 왈칵 눈물이 차오르더니 명치 너머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것이 예고 없이 올라와 꺼억 꺽 참던 것을 토해버렸다. 소리 내어 엽서의 왼켠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뭐야아-엄마가 무서웠나. 대학생 때였는데 그 나이에도 이랬다니” 킥킥거리며 웃고 있었는데… 당황한 언니가 “뭐야-너 울어?”하며 휴지를 가져왔고 동생은 그런 나를 불거진 눈시울로 바라보았다.
애인과 한바탕 다툼을 치른 다음 날 오후였다. 애인과 마음이 어긋난 시점에서 나는 여느 때처럼 내 안의 것들을 쏟아냈다. “지금 내 마음은 이렇다. 내 생각은 이렇고. (당신이 불편해하는)내 언행의 배경에는 이런 것들/이유들이 있다.” 애인은 논쟁 식으로 벌어지는 이런 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피곤하다. 난 네가 만나는 사람들—토론하는 것을 즐기는 이들(이라고 그는 생각한다)—과 다르다”며 대화를 멈추기를 원했다. 나에게서 한 발자국 멀어지는 그를 느끼는 순간, 싸아한 감정이 밀려왔다. 서로가 다른 것을 발견할 때 어느 것이 더 가치로운지를 견주는 논쟁을, 나라고 즐기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런 논쟁은 매우 불편하고 고통스럽다. 그것은 너와 나 사이의 ‘분리감’이라는 싸아한 불쾌한 감정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에게 나를 보이고 나와 다른 너를 알아가는 것이 내게는 ‘너에 대한 관심이자 애정’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좋아하는 이상 이 걸음을 멈출 길은 없다.
왜 이래야 하는 것일까..?
그동안 애인을 포함한 많은 이들—내가 관심을 가지고 알고자 하는 이들—과 치열하게 부딪혀 싸우며 느껴온 아픔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언니의 편지 내용이 내 마음 속 깊은 것을 건드린 것은 나에게, 우리에게 이러한—너와 하나가 되려는— 열망이 늘 너무나 컸다는 것을 내가 다시 한번 느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는 너에게 온갖 촉각을 곤두세워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나를 끼워 맞춤으로 너와 하나가 되려 노력했다. 그렇게 네가 웃으면 그 순간만큼은 나의 '하나됨'의 열망이 채워지는 듯 했다. 하지만 너만을 바라보느라 정작 알아주지 않은 내 마음 안에서 ‘솟아 나오는’, 나의 소리를 마주한 때부터 나는 ‘나’를 포기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림자—나와 정반대의 방식으로 사는 존재들—로 만난 타인들을 관찰하고 그들에게 배우면서 나는 내 안의 나에게 관심을 기울여 나의 소리를 듣고 알아차리기로 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너에게 보이기로 한 것이다. 그것은 잦은 갈등을 빚는 일이었다. 너에게 맞추지 않고 나를 드러내면서 어린 시절 그토록 피하려고 했던 타인들의 찌푸린 이맛살을 마주해야 했다. ‘노처녀 히스테리’라고도 불렸고, ‘오춘기’라고 놀림 섞인 비난도 샀다. ‘차가워졌다’, ‘배려심이 없다’ 등의 말을 들었고 크고 작게 언성을 높이며 다투는 상황들도 일어났다. 내 면전에 그렇게 말해주는 것은 오히려 관심의 표현이었다. 그런 나의 모습을 싫어한 사람들은 조용히 내 곁을 떠났을 것이다. 처음에는 떠나려는 이들과의 연도 붙잡아 소통을 이어가려 애썼다. 하지만 간신히 붙들어놓은 관계는 조금만 어긋나는 상황이 닥치면 다시 끊어지기 일쑤였다. 짝사랑하듯 부딪히다 차단되고 강제로 비워진 가슴앓이를 반복하다 마침내 나는 나의 에너지가 유한함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떠나는 인연은 흘러가도록 두고 ‘지금’, ‘여기—내 곁에’ 있는 이들에게 나의 유한한 에너지를 쏟고 있다.
문제는 ‘너와 하나 되려는 열망’이 유한한 에너지를 바닥까지 긁어 모아 모두 써도 채워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애초에 ‘너와의 하나 됨’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이어도,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픈 자식이어도 나와 네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까이 가려할수록 나는 네가 될 수 없음을, 너는 내가 될 수 없음을 통감하게 되니 말이다.
『에로스의 종말』에서 한병철은 이런 불가능, 그 ‘할 수 있을 수 없음’이 전제된 타자와의 관계가 바로 에로스—사랑—라고 정의한다. ‘하나’가 되고자 하는 너와 나의 관계에 있어 핵심적인 전제는 너와 나의 ‘다름’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거리는 '하나' 됨으로 좁혀질 수 없다. 그것은 ‘할 수 있을 수 없음’—불가능—이다. 그렇다면, 나의 채워지지 않는 나의 욕망은 어떻게 되는가?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면 대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때 우리는 두 가지 가능성에 봉착하고자 한다. 불가능을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가능한 답안을 찾는 것이다. 다시금 ‘너와 내가 하나’라는 환상—온갖 미디어가 창조하고 자본주의 시장이 포장하여 완판을 기록하는 로맨틱한 사랑의 결실—을 만들어내어 그 안에 머물든지, 아니면 ‘하나’가 될 수 없으므로 하나 되기를 포기—허무주의 안에 안착하여 관계 맺음 자체 포기—하든지. 이 두 가지의 가능 답안은 불가능을 받아들이지 못함에서 오는 도피이다. 한병철은 이 불가능, ‘할 수 있을 수 없음’을 극복하게 하는 힘이 바로 에로스라고 말한다.
그는 피치노의 인용구를 통해 에로스를 정의한다. 사랑은 “변신”이다. 사랑은 “인간에게서 고유한 본성을 빼앗고 그에게 타인의 본성을 불어넣는다”라고 말이다. 그의 명쾌한 사랑에 대한 정의를 통해 나는 ‘너와 나의 다름’이 관계 안에서의 기본값default임을, 따라서 그로 인해 이는 고통 역시 자연스러운 것임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너와 내가 하나가 될 수는 없으나, 사랑이 변신이라면 나는 사랑을 통해 내 고유한 본성을 낚아채어 던져버리고 너의 본성을 받아들여 변신하는 것이 가능하다. 내가 너의 부분을 받아들여 새로운 내가 되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힘을 내어 너에게 갈 것이다. 나와 가장 먼 너—나와 다른 것이 너무나도 많은 너—를 사랑하기에 나는 나의 고유한 본성을 던져버린다. 그렇게 나는 사랑하는 너를 통해 또 다른 내가, 더 다양한 내가 될 수 있다.
“에로스는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잡아채어 타자를 향해 내던진다.”*
이 과정은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너와 ‘하나’가 되려는 환상으로 너에게 나를 맞추던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과정이다. 나와 너의 다름이 전제라는 것을 받아들이자 내 안에는 용기가 생겼다. ‘너와 나는 원래 하나가 아니다. 너와 나는 원래 다르다. 그러므로 나는 너에게 나를 보여야 한다.’ 다름을 마주함으로써 나는 너와 나 안에서 비로소 나를 발견하고 너를 발견한다. 그렇게 우리의 다름을 마주하고 견주는 장면에서 어느 순간 사랑이 나의 고유한 본성을 낚아채어 너에게 던지고 너의 본성이 나에게 불어오길 바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치열하게 너에게 나를 드러내며 너와 나의 다름을 견주어야 한다. 이는 불가피한 전쟁이다. 아니, 너와 나를 이어주는 에로스를 발현하기 위해는 이것이 원동력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걸음을 내디딜 수밖에 없다.
사랑만이 나를 발견하게 하므로.
사랑만이 나를 네게 가게 하므로.
너를 통해 나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하므로-
*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문학과 지성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