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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하다 Nov 19. 2022

단 하나의 소원

인형 솜 터지지 않게 해 주세요

세기의 천문 이벤트.  

앞으로 향후 200년 동안은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다고 하니 과장된 멘트가 아니었다.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져 붉게 보이는 개기월식과 그 달이 천왕성을 가리는 엄폐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모습이 지난 11월 8일에 국내에서 관측되었다. ‘인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수식어가 만들어낸 엄청난 가치에 직접 하늘을 볼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소중한 순간을 보기 위해 유튜브 실시간 중계 채널에 모여들었다. 채팅창에는 신비한 자연 현상이 가진 영험한 기운이 이루어주길 바라는 저마다의 소망을 담은 글들이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라 수능 시험을 잘 보게 해 달라는 소원이나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게 해 달라는 수험생들이 다수 보였다. 누군가와 사랑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거나 헤어진 그와 다시 만나고 싶다거나, 연락이 오게 해 달라는 등 이성 간의 관계에 대한 소원이 많이 보여서, 인류에게 사랑은 참 중요한 문제라는 걸 느끼기도 했다.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 와중에 여기 쓴 사람들의 소원이 다 거꾸로 되게 해 달라는 글을 반복적으로 올려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  


천천히 진행되는 개기월식과 천왕성 엄폐. 그리고 너무도 빨리 지나가는 실시간 채팅의 글들이 이분할 된 내 모바일 화면에서 역설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그중에 내 눈을 스치고 마음에 자리한 한 줄의 소원이 있었다.  

‘인형 솜 터지지 않게 해 주세요.’


나만의 순수한 상상일지 모르겠지만,  아이가 정말 소중한 애착 인형이 바느질이 터지기 직전이라 너무도 걱정이  나머지 하늘에  소원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소원들은 아무 의미 없이 스쳐 지나간 사람들 같았는데,  소원은 나도 모르게 되뇌며 같이 빌었다.  


‘그래. 그 인형 솜은 터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수험생에게 대학이, 사랑에 빠진 이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의 전부일 수 있다는 것을 내 맘대로 부정하면 안 되는데 왜 나는 인형 솜을 걱정하는 그 아이의 마음에만 응원을 보태고 싶었던 걸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마 나는 아이가 인형을 조건 없이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수능을 잘 보고 싶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싶은 수험생은 그 결과를 통해서 얻고 싶은 다른 것들이 있다. 사회적 시선, 부모의 기대, 자신의 성취감, 노력에 대한 보상, 그리고 대학 졸업 후 긴 시간을 지내보니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나는 알게 되었지만, 수험생 시절의 아이들은 좋은 대학이 좋은 미래를 보장해준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갈구하며 소원을 비는 이들도 그 스스로는 조건 없이 상대를 사랑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인간은 상호작용을 하며 관계를 형성해가는 존재이므로 결국은 일정 부분 서로에게 원하는 소통의 방식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소원이 이루어지면 다른 누군가에게 영향이 있다. 누군가의 합격이 누군가의 불합격으로 이어지고, 누군가의 사랑이 이루어질 때 누군가는 외로워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이의 인형은, 아이에게 스스로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인형 솜이 터지거나 터지지 않거나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단지 인형 솜이 터지는 순간 인형이 생을 다했다고 생각해 마음이 찢어지게 아파 목놓아 우는 한 아이가 있을 뿐. 인형을 지켜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기도뿐이었던 아이는 상실감이 꽤 오랜 시간 지속될 수도 있다. 내가 지금도 나의 토끼 베개를 잊지 못하는 것처럼.


갓 태어난 신생아 송현의 사진에는 내 몸보다 큰 납작한 토끼 모양의 베개가 있다. 긴귀와 옆으로 둥글넓적한 얼굴, 그리고 몸통과 팔다리가 있었고 토끼는 멜빵바지를 입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신생아 송현은 토끼의 배 부분에 머리를 뉘이고 있었고 나의 소중한 두 언니들은 반짝이는 눈으로 아기 동생을 사랑스럽게 바라봐주었다. 토끼는 초승달이 뒤집힌 모양의 감고 있는 눈을 하고 있었다. 그 눈이 빛바랜 초록색이었는데 참 평안해 보였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 지냈으니 토끼의 세월의 흔적은 빨래로도 지워지지 않게 되었다. 토끼의 눈은 지워져 갔고 하얀 피부는 누런색이 되었다. 얼룩덜룩해졌지만, 나는 토끼가 참 좋았고 언제부턴가 토끼는 더 이상 베개가 아닌 안고 자는 친구가 되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도 토끼 베개는 곁에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아이는 언제 사라졌을까. 법무관이셨던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이사를 많이 했던 나는 초등학교만 4곳을 다녔는데, 이사를 하던 어느 날 엄마가 이제 낡아버린 토끼를 정리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더 오랜 시간이 지나 내가 더 이상 토끼를 찾지 않는 어느 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애교가 별로 없는 막내였다. 어린 시절에는 엄마에게 부탁하고 싶거나 허락받을 게 있으면 언니에게 대신 말해달라고 해서 엄마가 섭섭해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 토끼 베개가 그냥 낡고 더러워진 물건이 아니라 내게 얼마나 소중한 친구인지 얘기하지 못했던 것이 내내 후회가 되었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잠자리에 누워 그 아이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왜인지 모르게 스스로 씩씩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속상한 일이 있어도 혼자서 삼켰던 외로운 어린이는 그 말없는 토끼에게 많이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어쩌면 대청소를 한다고 집안을 뒤집어엎어도, 이건 이런 추억, 이건 저런 추억 하면서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내 시작은 토끼 베개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찾고 싶고, 보고 싶고, 떠나보낸 게 미안한 토끼.

인형 솜이 터지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던 그 아이에게 그 인형이 내 토끼 베개와 같은 의미일 것 같아서, 나는 아이의 인형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몇 달 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애착 인형을 완벽하게 고쳐주는 인형 병원을 보고 놀랐었다. 바느질도 해주고, 솜도 채워주고, 떨어진 눈도 달아주고 털 관리도 해준다. 병원이라고 칭하고 디자이너들을 치료사라고 부른다. 인형을 향한 보호자들의 애틋한 마음을 알기 때문에 가족처럼 대하는 대표님의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수선이 끝나면 전송되는 문자에는


"현재 아이의 치료가 끝나 회복실에 있습니다."

라는 문구가 정갈하게 예뻐진 아이의 사진과 함께 담겨있다. 대표님의 작년 인터뷰 기준으로 한 달에 약 100-200건의 치료가 진행된다고 한다. 치료비용은 보통 원래 인형 가격보다 배 이상으로 비싼 경우가 많은데 다들 추억 값이라며 아까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고객층의 대부분은 2-30대이고, 4-50대 손님들도 종종 방문한다고 했다. 사연을 들어보면 살아있는 생명과 나눈 추억 못지않은 귀하고 애틋한 시간이다.


아이의 곁에 인형 솜이 터져도 끝이 아니라고, 인형이 다시 건강해질 수 있다고 말해줄 수 있는 어른이 있다면 좋겠다. 세기의 천문 이벤트에 소원이 접수되었을까. 우주에 영험한 기운이 존재한다면, 아이에게 우주보다 더 크고 소중할 인형의 안녕을 선물해주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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