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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하다 Nov 24. 2022

소문

좋은 말은 멀리 퍼져가는 힘이 약하다.

갑자기 예전에 읽었던 할리우드 캐스팅 디렉터가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말했던 글귀가 떠올랐다. 원문과 화자를 정확히 찾고 싶어서 기억나는 대로 구글에 비슷한 단어들을 나열해서 검색했다. 서글프게도 내가 입력한 단어들과 관련된 배우들의 인터뷰 내용이 너무 많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 글을 내가 참 좋아했던 연기자 선배 언니의 SNS에서 봤었다는 기억이 선명하다. 들여다보지 않은 지 7~8년은 족히 지난 것 같은 지금은 내가 사용하지 않는 SNS다. 아주 오랜만에 어플을 열어보았고 언니의 페이지는 다행히 아직 오픈되어 있었다.


같은 작품을 하며 만난 언니는 내게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었고 우리는  친했었던  같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내몰리듯 도망친 회사생활 후에 연기를 시작했고,  작품을 마친  나름의 기준을 하나 정했다. 내가  작품을  해냈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 기준이었다. 동료 연기자, 제작진, 스텝,   누구든 간에  작품을 통해 인연을 맺은 사람 중에 작품이 끝난 후에도 

‘아, 이 사람과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서로 연락하며 진심으로 아낄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드는 인연이 단 한 명이라도 남는다면 난 그 작품을 정말 잘 해낸 거라고.   

   

어쩌면 배우로서 프로페셔널한 기준은 결코 아니었지만, 인간 최송현이 내가 계획하고 노력한 만큼 성과를 내기가 쉽지 않았던 이곳에서 무너지지 않고 다음을 꿈꿀 수 있는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꽤 적절한 마음의 지향점이었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 보니 그것조차 결코 만만한 목표는 아니었음을 느낀다. 언젠가부터는 그것마저 안 되는 작품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니까.


언니와 함께 작품을 할 때는 이 작품이 끝나면 바로 이 사람이 그 기준을 충족시켜줄 인연이라고 믿고 참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걸 지켜내지 못했던 것은 역시나 복잡하고 상처 많은 나의 마음이었다. 내가 좋은 마음을 가질 수 없었던 다른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언니를 보면서 나는 서서히 언니와 멀어지기 시작했다. 둘 사이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미리 겁먹고 물러났던 내 마음. 시간이 오래 흐른 지금, 여전히 내겐 좋은 사람인 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원하는 글을 찾아내려 갔다.       


내가 그 SNS를 너무 오랜만에 접했기 때문인지, 사용법이 낯설었다. 가장 최신 포스팅부터 과거로 내려가야 했는데 언니는 1~2년 전까지 이곳에 가끔 사진과 글을 남겼었던 모양이다. 내가 찾고 싶은 글은 아마 나와 같은 작품을 했던 수년 전에 업로드했던 것 같은데, 연도별로 찾는 법을 알지 못해서 의도치 않게 언니의 지난 몇 년을 아주 빠르게 넘기며 눈으로 훑게 되었다. 내가 찾고 있는 글처럼 언니는 종종 공감이 가는 글을 지난 몇 년 간 공유했었고, 나도 훑어보다가 좋아서 몇 개를 저장했다. 언니 가족들의 모습이 종종 등장해서 세월이 흘렀구나. 미소 짓기도 하고 뭉클해하기도 하면서 무언가를 기록한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며 점점 과거의 접점을 찾아 내려갔다.     


그러다가 한 포스팅이 내 눈길을 끌어 클릭하게 되었다.     


언니가 출연했던 작품에 함께했던 선배님께서 보내주신 카톡 메시지 캡처와 그 선배님께서 마지막 촬영이라고 준비해주신 선물을 받은 언니의 당시 마음이 담긴 포스팅이었다. 언니는 장편 드라마에 시나리오상 엔딩보다 일찍 작품을 떠나는 역할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언니가 캡처한 카톡 속 그 선배님은 내가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무섭고 험한 이야기를 많이 접한 분이었다. 단 한 번도 만나 뵙지 못했지만 나는 그 반복적인 소문들에 그분을 두려워했었던 것 같다. 대본에 없는 따귀를 상대 배우에게 강행했다는 소문도 있었고, 현장 진행을 어렵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데 언니가 업로드한 카톡 캡처 속에 등장하는 그분은 그 연령대의 선배님께서 보내신 것으로 생각하기에 너무 순수하고, 후배에 대한 깊은 예와 존중, 배려를 가진 분이었다.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낭만’을 가진 분이란 느낌이 화살처럼 마음에 꽂혔다. 만약 내가 그 카톡을 받았다면 분명 눈물이 났을 것 같다. 가식이나 미사여구로 만들어지지 않은 본연의 따뜻함이 느껴지는 메시지였고, 심지어 답장이 아니라 선배님이 먼저 보내신 메시지였다. 그리고 선물까지 준비하셨다니.


언니가 보낸 답장엔 ‘내 인생에 선배님과 대사 한 줄 나누는 순간이 올까 했는데 정말 영광스러운 날들이었다’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언니는 밝고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나쁜 사람에게 거짓 아부를 하는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해왔고, 그 작품을 떠나는 것이 진심으로 아쉬워 보였다. 나는 순간 마음에 아주 세게 발차기를 당한 것 같았다.     




올해 초, 방송 출연을 앞두고 며칠 마음이 많이 아팠던 적이 있다. 과거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나눠야 하는 프로그램의 성격상, 출연을 준비하면서 잊었던 기억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야 했고, 자세하게 기억하다 보니 나는 단 한 번의 사과도 받지 못해 상처가 아물지 못한 피해자였다는 결론을 내려버리고 정말 어린아이처럼 슬프게 울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가해자와 구체적인 진실에 대해 나는 편하게 말할 수 없고 대중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나를 멋대로 판단하고 그에 맞는 이미지를 쌓아갔다는 생각에 다다르자 억울함이 폭발했다. 다 말할 순 없더라도 그래도 한 번쯤은 뭉뚱그려서라도 내게 어려움이 있었음을 이야기하고 상처의 딱지가 떨어져 새살이 돋길 바랐다.


그런데 내가 아픈 기억의 딱지까지 뜯어내 다시 생생한 기억의 피를 흘리는 상태로 만들었던 제작진은 갑자기 내 출연을 취소했다. 너무 오래 전이라 애써 누르고 희미하게 묻어두었던 아픈 기억들은 갑자기 현재 진행형처럼 생생해졌는데, 치료받을 수 있는 길이 사라진 것이다. 20대의 내가 너무 가여웠고, 아직도 그 상처가 남아있는 것은 더 강해지지 못한 나 자신 때문이라는 자책으로 또다시 이어졌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에 대해 가진 게 많아 자기 하고 싶은 거하고 사는 비호감이라고 떠드는 사람들도 너무너무 원망스럽고 미워졌다.    

  

남편을 붙잡고 한참을 울었고 그러다가 엄마에게 전화해서 또 한참 울었다. 감정조절이 고장 난 것처럼 계속해서 눈물이 났다. 20대의 내가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40살이 되어서야 초등학생처럼 울면서 시시콜콜하게 말하고 있었다. 왜였는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은 나 스스로를 제어하는 것이 어려웠던 것 같다. 남편은 어머니 걱정하시니까 이제 그만 전화 끊고 오빠랑 얘기하자고 했지만, 엄마는 얘기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에게 울면서 억울함을 말해본 순간이었다.      


사실 그랬다. 어렸을 때 엄마 아빠에게 “이거 사주세요.”라고 한 번도 말해보지 못했던 나였다. 엄마 아빠는 늘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정말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분들이었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부모님이 어려웠고, 칭찬받고 싶은 일이 있을 때 부모님의 칭찬은 늘 내가 원하는 것보다 너무 덜 요란했다. 큰소리로 꾸짖은 적이 없으신 것처럼 방방 뛰며 기특하게 여겨주신 적도 없었다.

때때로 나를 상처 주는 사람들의 나쁜 말을 들으면 그 말을 한 사람이 나쁜 사람임이 분명한 상황임에도 상처받고 숨고 싶어 하는 내 모습이 어쩌면 “우리 송현이 최고!”를 외쳐주지 않았던 엄마 아빠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온 지 꽤 오래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프로그램을 준비하며 과거의 일을 하나하나 생각을 하다 보니, 내 약해진 마음의 근원에 대한 생각이 잘못된 곳에 머물고 있었다는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떠올려본 내 인생의 기억 중에는 리더, 주체적이고 자신감 있고 친구들의 신뢰를 받았던 내면이 단단한 기억이 많았다. 대학 생활을 할 때까지 나는 꽤 자존감이 높았고, 다른 사람의 시선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는 여러 구체적인 사례들도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이 아니라면 사람들이 쳐다보는 특이한 스타일이어도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는 것이 불편하지 않았다. 수업시간에 손을 들어 발표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고, 조별과제를 할 때 이기적이거나 진상을 부리는 팀원에게 모두가 하고 싶지만 하기 어려운, 소위 말하는 총대를 메고 해야 할 말을 하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직장 생활 전에는 아웃사이더였던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았다. 단체로 어울려 노는 문화를 좋아했던 건 아니지만, 사람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않더라도 나는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의 중심에서 크게 벗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의 내가 성격유형 검사를 통해 알게 된 나의 성격유형 INFP는 소심하고 타인의 비난에 무너져내리는 성향을 보인다. 늘 기준치가 너무 높아서 ‘이 정도로는 사람들 앞에 내보일 수 없어’라는 생각에 완성하지 못하고 끝나는 일이 많다고 했다. 당근과 채찍 중 당근을 100개 주어도 16개의 성격유형 중 유일하게 자만하지 않고 감사하게 생각하며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용기를 얻는다고 했다. 반면 누군가가 일부러 상처 주려는 의도가 명확한 한마디에도 땅굴 저 아래까지 떨어져 헤어 나오지 못하기도 하는 성향. 나는 INFP에 대한 설명을 읽으면서 나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알고 있는 지금의 내가 어린 시절 성격 그대로의 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아는 직업을 갖게 되기 전에는 누군가 나에 대해 험담을 하는 이야기가 들려오면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나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뒤에서 얘기하지 않을 거야. 궁금함이 생긴다면 내게 와서 묻겠지.’


그렇게 믿었고, 거짓 이야기를 꾸며내는 사람에게 혹은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굳이 나를 좋아하게 만들기 위해 내 아까운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시작하니 상황이 달라졌다. 사람들은 아주 구체적이고 믿을만한 묘사를 곁들어 거짓을 만들어내고 빠르게 확산시켰으며, 무대응은 거짓을 진실처럼 만드는 효과도 있었다.      


입사 후 한 블로그에 내가 사는 집이라며 130평대 아파트의 내부가 소개된 적이 있었다. 나는 너무 어렸고, 신입사원인 직장인이었고 소속사가 관리해주는 연예인이 아니었다. 그것이 뉴스 기사였다면 언론사에 전화해서 정정 보도를 해달라고 얘기라도 해봤겠지만, 블로그에 떠도는 이야기를 뭐라고 해명해야 하는지, 어디에 얘기해서 이미 다 퍼져버린 저 포스팅들을 없앨 수 있는지 방법을 몰랐다.  

    

나는 부유한 사람을 부유하다는 자체만으로 비난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부를 통해서 부당한 힘을 행사하거나 부를 가진 것이 특권이라 생각하고 그런 생각이 반영된 행동이 드러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부를 가진 것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일그러진 마음이다. 만약 그 블로그를 통해 알려진 것들이 사실이었다면, 부모님이 잘못된 방법으로 얻은 재산도 아닌데 굳이 떠벌일 필요도 없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밝혀졌을 때 사실을 부인할 이유도 전혀 없었을 거다. 그렇지만 부모님과 나는 태어나서 지금껏 40평대 이상의 집에 살아본 적이 없다. 그 블로그에 등장한 130평대 아파트에 내가 살고 있다는 내용은 100% 가짜 뉴스였다.      


그래서 처음엔 그냥 내 기준에서 단순하게 사람들이 안 믿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순진함을 넘어서 바보 같았고, 너무 적극적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때 내 미니홈피에 ‘그런 블로그 내용이 많이 퍼지고 있는데 사실이 아니에요.’ 한마디라도 쓸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아니. 그때는 내 이름으로 기사 한 줄이 나면 불려 가서 안 좋은 소리를 들어야 할 때라서 아마 실천에 옮기지 못했을 거야. 그 생각이 바로 나의 후회를 잠재운다. 그때의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저 숨 쉬고 카메라 앞에서 네가 할 일을 해내는 것만으로도 정말 대견했을 뿐이야.     


소문은 또 다른 소문을 낳는다. 입사 2년 차, 입사하자마자 1년간의 지방 순환 근무가 의무인 회사 특성상 지방 근무를 마치고 이제 막 서울로 올라왔는데, 가장 핫한 프로그램의 MC가 된 신입사원.

'어쩐지. 이유가 있었겠지. 그럴 줄 알았어. 집에서 손을 썼구나.'

여기저기서 참 잘 들리게도 수군거렸다.


그런데 내가 정말 두렵다고 생각했던 건 나를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이 나라는 사람이 아닌 소문을 믿는다는 사실이었다. 직접 대놓고 ‘좋은 집 살던데 방 한 칸만 달라’ 던 부장님이 계셨다. ‘그거 저희 집 아닙니다.’ 말씀드렸는데 뭘 그런 걸 숨기냐며 끝까지 아니라는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세상이 참 무서워졌었다.     

피해는 가족들에게도 이어졌다. 그 소문을 믿은 사람들이 가족들에게 ‘돈도 많은데 오늘 식사비용은 네가 내라’는 말을 한다고 했다. 사실 확인을 안 하는 사람들도, 만약 그게 사실이라 해도 마치 맡겨둔 돈 찾아가는 사람처럼 식사비를 내라는 사람을 마주한 내 가족들을 생각하니 너무너무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 그때부터 내가 직접 겪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 절대 소문을 듣고 판단하지 말자고 결심했었다. 나는 사실 방송일을 하는 친구가 많지 않지만, 떠도는 소문을 가지고 비연예인 직업군의 사람들이 내가 직접 겪어 아는 내 기준에 좋은 사람에 대해 함부로 얘기할 때면 분위기가 싸해지는 걸 감수하면서도

“그분 저랑 친구인데 그런 얘기 하지 말아 주세요.”

라고 그 자리의 대화를 끝내기도 했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가십이 넘쳐흐르는 곳에 오래 있었기 때문일까. 나에게 너무 나쁜 사람이었는데 사람들에겐 좋은 사람으로 알려진 사람들을 보면서 박탈감을 느끼면서부터였을까. 언제부턴가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 중 내가 잘 아는 사람들에게 들은 말을 내가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같다. 만약 그들이 직접 경험한 일이었다면 내 지인에게 행한 일이니 그들을 믿었다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만, 대부분 그들도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라며 내게 전했던 것 같다.     

 

좋은 말은 멀리 퍼져가는 힘이 약하다. 나쁜 말은 점점 더 살을 붙이며 멀리 퍼져간다. 소문이 사실이 아님이 밝혀진다 해도 소문의 당사자는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씌워진 이미지라는 그 무서운 껍질을 벗어내지 못하고 소문이 나기 전의 온전한 자신으로 돌아갈 길이 사라진다.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기에, 나도 수차례 피해자였기에, 연예면이 시끄러워지는 큰 사건이 발생할 때면 알려진 것과 다른 내막을 알고 씁쓸하고 가슴 아프기도 했고, 혹은 알지 못하더라도 여론과 다른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말을 아끼거나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자고 하던 나였는데.      


언니의 SNS에서 발견한 그 따뜻한 선배님의 흔적을 보고 마주한 나의 민낯은 확인되지 않은 소문에 경계하며 살았다고 생각해온 나조차도 직접 만나지 못한 사람에 대해 반복적인 소문은 진실이라 믿어버린 무책임한 인간의 얼굴이었다.      


지난해, 내가 정말 좋아하는 감독님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내가 만나 뵐 때마다 드리는 말씀이지만 감독님 작품 할 때 제일 행복했다며, 우리 상식에 어긋난 사람들에 관한 얘기가 잠깐 오고 갔을 때다. 감독님께서 자신도 누군가에겐 나쁜 사람이라고. 감독님과  일하는 게 인생에서 가장 스트레스받고 힘들었고 다시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순간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며,


“송현 씨, 내가 모두에게 좋은 사람일 순 없어요. 그러니까 아마 그 사람들도 우리에겐 이상하지만 누군가에겐 좋은 사람일지도 몰라요.”     


내가 생각하는 감독님은 한없이 따뜻하고 일에 완성도나 능력은 감히 내가 말하는 것이 송구할 만큼 대단하시고, 배려와 예의 매너도 듬뿍이시며, 한 해 한 해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젊은 트렌드를 익히려 하시는 분이다. 약자에게도 늘 친절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강자와 맞설 수 있는 분인데, 이런 감독님이 누군가에겐 나쁜 사람이라니.     


생각해보니 그렇다. 같은 말과 같은 행동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또 같은 자아이지만 그때의 기분과 몸 상태에 따라 같은 상황에서 다른 표현을 할 수도 있다.


어느 날의 나는 누군가에게 매우 무례하고 기분 나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집착하고 욕심내는 것으로 보였을지도, 말을 아끼는 것이 예의 없고 차가워 보였을지도, 분위기를 좋게 만들고 싶어 모두가 웃게 만드는 농담을 던졌을 때도 그중 누군가에게는 너무 나서는 모습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언니의 SNS를 끝까지 다 보았다. 내가 찾던 글이 끝내 나오지 않았다. 혹시나 내 계정에 그 글을 담아놓았을까 싶어서 내 페이지를 눌러보았다. 기억이 나지 않는 그 시절의 내가 많이 담겨있었다. 친구들만 볼 수 있는 제법 폐쇄성이 보장된 SNS였기 때문이었는지 나는 종종 인스타그램에 쓰기엔 길다고 느껴질 법한 글을 써놓았다. 어떤 글은 어떤 마음에서 써 내려간 건지 바로 기억이 나기도 했고, 어떤 글은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마음이 시렸는지 날짜로 미루어 생각해봐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30대 초반의 송현을 만나는 일은 마음 진한 과거와의 소통이었다. 한동안 글쓰기를 멈추었던 걸 많이 후회했고 그래서 다시 생각나는 대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찾던 글을 내 페이지에서 찾았다. 내가 좋아하는 언니의 페이지에서 퍼온 글이라며 올려두었더라. 나는 언니의 페이지에서 그 글을 찾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언니가 어떤 이유 때문에 그 포스팅을 지워버린 것일까. 나는 왜 이 시점에 이 글이 갑자기 간절히 보고 싶었을까.     



솔직히 말해 배역을 얻는 배우가 한 명이라면, 배역을 얻지 못하는 배우는 백 명, 아니 천 명에 이른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배우들은 배역을 맡기 위해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분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유도 듣지 못한 채, 그저 배역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줄곧 거절당하는 일이 허다할 것이다.

배우의 삶이란 결코 부러워할 만한 것이 못 된다. 배우의 삶을 채우고 있는 것은 대부분이 낙방과 거절이다. 견뎌내기 쉽지 않은 삶이다. 배우들이 어떻게 그런 삶을 버틸 수 있는지 나에게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마이클 셔틀르프, 브로드웨이, 할리우드 최고로 꼽히는 캐스팅 디렉터-     



이제 더는, ‘제 직업을 꼭 배우라고 명기해주세요.’라는 말 따윈 하지 않기로. 정말 하고 싶은 역할인데 제작진이 나를 원할 때가 아니라면 배역을 얻지 못해 상처받는 삶을 살지 않기로, 내 제1 직업은 방송인이 아니어도 된다고 결심한 이때가 되어서 왜 갑자기 저 글이 그렇게 다시 보고 싶었는지. 혹시 벌써부터 이런 나의 마음에 쏟아질 비난과 조롱을 걱정하며 무너지지 않기 위한 마음의 방파제를 쌓으려는 걸까.

‘거절당하는 삶’을 벗어나고 싶었음을, 빛나는 사람들 뒤에 수천, 수만의 거절이 어떻게 행해지는지를 다른 누군가의 공감으로 위로받고 싶었던 것일까.


소문과 가짜 뉴스가 진실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하는 걸 마주하는 세상. 피해자의 경험을 가졌으면서도 가해자의 입장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는 나약한 인간의 심리. 낙방과 거절을 거듭하면서도, 일반 회사였다면 신고당했을 외모 지적과 인신공격이 면전에서 쏟아져도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고 참아내는 배우. 모두 다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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