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귀하다 Dec 03. 2022

특이한 남편

결혼기념일입니다

"2020년이니까 이공이공... 그럼 일공일공 10월 10일로 할까?"


결혼식 날짜 정하기를 하던 우리의 대화. 인생에 의미 있는 8자리 숫자가 생기는 기회라 예쁜 조합으로 만들고 싶었던 마음이 담겨있었다. 하객이 없는 진짜 가족들만 함께 할 결혼식이라 우리는 별다른 제약 없이 날짜를 선택할 수 있었다. 엄마의 가장 큰 걱정은 아홉수인 내 나이였다. 가을을 향해가던 그 당시, 두어 달 결혼이 미뤄지는 건 우리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기에 엄마의 걱정을 덜어드리기 위해 결혼식은 올해를 넘기려나 싶었다.


그런데 온 가족을 평생 기도로 지켜내신 엄마가 "교회의 달력은 12월 1일부터 새해의 시작"이라며 너는 12월에 아홉수를 벗어나기에 그때부턴 괜찮다고 하셨다. 매일 새벽 미사를 빠지지 않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의 신심과 딸의 아홉수를 걱정하는 지극히 한국적인 마인드의 콜라보. 사랑스러운 엄마의 제안으로 우리는 새로운 숫자 조합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렇게 우리의 결혼식은 20201203이 되었다. 중간에 0이 들어가긴 했지만, 나름 123, 하나 둘 셋으로 맞춘 조합이다. 1230은 너무 연말이라 아무리 찐 가족만 참여한다고 해도 불편한 점이 많을 것 같아서.


오늘은 우리가 두 번째 맞는 결혼기념일이다. 엄마는 2주년인데 훨씬 더 지난 것 같다며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나에게도 하지 않는 볼찌르기 특급 칭찬을 할 만큼 예쁜 사위가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가족이었던 것 같다는 뜻이려나. 나도 그렇다. 2년이라는 시간은 참 짧게 느껴지는데, 남편을 보면 나를 20년은 알고 지냈던 사람 같은 느낌이 든다. 정확히 말하면, 알고 지내지 못했던 20년이라도, 지금과는 다른 나였더라도 이 사람이라면 이해해줄 거라는 믿음이겠지.



"특이하다. 저 나이에 어떻게 저런 맑은 눈을 가질 수가 있지? 정말 특이하다."


아빠가 남편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남편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내게 말했다. 아빠의 표정에는 오랜 인생의 경험에서 그동안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생명체에 대한 설렘과 기대가 담겨있었다. 긴장하고 있는 남편과의 짧은 만남에서도 아빠가 그 사람이 가진 다른 점을 알아봐서 난 너무 기뻤다. 내가 남편에게 끌렸던 부분이  아빠 역시 집중하게 만드는 점이라는 것이 좋았고, 아빠가 남편을 사람 자체로 봐주리라 믿었던 내 생각이 맞았다는 걸 확인한 순간이어서 좋았다.


특이하다. 그 표현이 어쩌면 그와 나의 첫 만남에 대해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한 단어인 것 같다.

- 보통 것이나 보통 상태에 비하여 두드러지게 다르다. 


세부에서 열렸던 수중 촬영 대회에서 우연히 3박 4일의 일정을 같이 보내게 되었던 우리는 참 특이했다. 사람도 상황도 모두 특이했다. 한국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다이빙을 했던 지난 수년간의 상황과 정확히 다른 상황이 펼쳐졌고, 나는 눈으로 마음으로 그를 계속 찾았다. 다이빙 중간중간 숙소에 들어가 쉴 수 있는 시간에도 나는 그 사람과 같이 있고 싶어 했는데, 그래서 그 짧은 며칠 동안 꽤나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나와 달리 말의 속도가 느린데 내가 좋아하는 낮은 음성에 부산말을 쓴다.

'아, 부산 사투리가 이렇게 감미롭구나.'

그때 처음 알았다.


그 당시 남편은 한국에 살고 있었지만, 다이빙 강사를 하며 필리핀에서 수년간 거주한 경험이 있었고 천명에 가까운 학생을 교육했다. 가르친 경험이 많으니 에피소드도 많았고, 다이빙과 관련 없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참 많았다. 남편의 이야기는 이미 사랑에 빠진 내게만 재밌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사람들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에피소드가 많은 만큼 그의 이야기엔 많은 사람이 등장했다. 그와의 첫 만남부터 나를 지켜봤던 내 절친이 가장 걱정한 부분이었다.


"이 강사님은 충분히 매력 있는 사람이지. 그런데 주변에 너무 사람이 많아 보여. 언니가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이지 않아?"


그 아이는 서른 살 즈음에 만난 친구지만, 그때 9년째 절친에, 가족 행사에도 참여하는 친한 사이였고, 그 당시 나를 제외하고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표현에 담긴 뜻을 나도 알고 있었다.


남녀가 만나 연애를 시작하면 당연히 서로의 다른 부분을 발견하게 되고, 좋은 만큼 안 좋은 부분도 있기 마련이다. 관계의 지속 여부는 서로가 좋아하는 것을 얼마나 공유하느냐 보다는 상대가 나의 어떤 점을 싫다고 할 때 그것을 그만둬줄 수 있느냐, 혹은 얼마나 서로가 싫은 부분을 참아낼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겐 상대방이 입는 옷, 타는 차가 아주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겐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닐 수 있다. 누군가에겐 연락을 제 때 못 받는 것이 미쳐버릴 것 같은 괴로움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그러려니 하는 문제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겐 수많은 이성친구가 별 일 아닐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겐 머리론 이해해도 마음이 싫은 일일 수 있다.


상대가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내가 외로워지는 건 내가 감당하지 못할 연애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마흔이 넘은 남자 친구에게 그런 걸 시시콜콜 질투하며 징징댈 자신도 없었다. 아직 내 남자 친구도 아닌데, 뭘 이런 걸 걱정하고 있어 하다가, 감당을 하든 못하든 일단 숨부터 쉬고 보자라는 마음까지 가게 되었을 때 우린 연인이 되었다.   


처음 연인이 되기로 했던 날 남편이 내게 말했다.


"이제부터 내 인생에 제일 중요한 사람은 너야. 앞으로 천천히 내게 소중한 사람들한테 너를 소개할 건데, 만약 그 사람들 중 누군가 너에게 실수한다면 처음 한 번은 경고를 줄 거고, 두 번째 만남에도 또 잘못한다면 그 사람은 그때부터는 내 인생에서 없는 사람이 될 거야."


그것은 살면서 내가 들었던 그 어떤 말보다 가장 든든한 말이었다. '당신 주변에 사람이 많아 보여서 걱정이에요.' 같은 말은 꺼낼 시간도 없었는데.


특이하다. 보통 것이나 보통 상태에 비해 두드러지게 다르다. 


마흔이 넘은 남자에게 연애를 처음 시작한 날 들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한 말이라기엔 정말 특이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가 되고 싶었던 나의 꿈은 그날부터 더 이상 꿈이 아닌 현실이 되었고, 그날부터 우리는 눈물 바람이었던 것 같다. 충분히 위로받지 못했던 상처가 많은 두 사람은 서로의 힐러가 되어 눈만 마주쳐도 울기 바빴다. 물론 슬퍼서보다는, 스무고개 하듯이 알아맞히려는 게 아니라, 그저 말하면 턱 하니 내 마음을 정확하게 알아주는 사람이 생겨 너무도 좋아 우는 날이 많았다.   




스쿠버다이빙은 숨 쉴 수 없는 수중에서 머무는 스포츠이니 많은 장비가 필요하다. 인간은 더 오래 머물고, 더 깊이 가고 싶은 욕망으로 계속해서 정교한 장비를 만들어 낸다.


다이빙 강사가 된 이후, 마스크와 핀만 가지고 자신의 한 호흡만으로 수중에서 유영하는 프리다이빙을 접한 후, 나의 장비들이 바다와의 만남에 인위적인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던 시기가 잠시 있었다. 그 시기에 나는 물개, 돌고래, 혹등고래 등 몸집이 큰 해양생물들을 장비 없이 프리 다이빙으로 만났는데, 대부분 스쿠버 장비로는 입수가 금지된 지역이었다.


기체 없이 해양생물의 속도에 맞춰 가는 일은 아무리 바다에 익숙한 사람이라도 벅차다. 그들이 곁을 내주지 않으면 교감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아, 이 친구들이 나를 하나의 생명으로 인지하고 소통하고 있어.'

하고 느껴지는 빛나는 순간이 있다. 내가 그때 스쿠버 장비를 착용하고 있던 적이 없어서 마치 장비가 진정한 해양생물과의 교류에 방해가 되는 것처럼 생각의 오류를 범했던 것 같다.


그 생각을 깨뜨려준 것도 남편이었다. 남편은 내가 여러 번 권유받았지만 그저 '안 예쁘다'라고 생각해서 배우지 않았던 얼굴 전체를 덮는 풀페이스 마스크를 사용하는 사람이었고, 탱크 두 개가 이어져 기체량이 많은 더블 탱크로 다이빙하는 날이 많다. 만약 아무 장비도 없는 맨몸이 가장 해양생물과 교류하기 좋은 자연의 상태라고 가정한다면, 남편은 나보다 더 인위적인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그와 함께 바다를 가면 그의 모든 모습이 지극히 자연의 일부처럼 보인다. 물밖에서 세팅을 하고 무겁게 나른 장비들도 물속에서는 그의 몸의 일부 같다. 거북이를 만나도 늘 가장 가까이서 오래도록 이야기하는 건 남편이다. 나는 남편에게 풀페이스 마스크를 배웠다. 지금은 풀페이스 마스크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거북이와 남편. 보홀, 2022
이탈리아의 풀페이스 마스크 제조 회사인 OCEANREEF의 부부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다육이를 키우는 하우스에는 토끼와 닭이 살고 있다. 내 이야기엔 반응하지 않는데, 남편이 말을 걸면 동물들이 리액션을 한다. 부르면 돌아보거나 소리를 내거나 날갯짓을 한다. 우연히 마주치는 새나 청설모들도 마치 말을 알아듣는 것 같다. 특이하다. 농담처럼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라고 하는데, 가끔 이 사람이 정말 나와 다른 능력을 가진 것인가 생각해본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없는 여유가 있었다. 그것은 허세나 나태함과는 다른 것이었다. 내가 늘 그려왔지만, 현실엔 없을 거라 생각했던 낭만과 여유를 가진 사람.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영혼인 그는 언제 어디로 날아가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는데, 나는 그를 묶어두려고 시도한 적도 없고 그 역시도 곁을 비우지 않는다.  


같이 날고 싶다. 혼자서는 안 날아갈 것 같은 남편에게 맑은 공기를 선물하고 싶다. 내 등에 날개가 돋아날 느낌이 오는데. 침잠의 시간을 손잡고 걸어주는 남편과 내년 결혼기념일엔 날아다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소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