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려가볼까요?] 작가 최송현입니다.
"우리 같이 좋은 책 만들어 봐요."
브런치에 처음 글을 올리기 시작한 지 석 달이 채 안되었을 때, 내 글에서 완성된 책의 모습을 상상해 준 은행나무 출판사와 만나게 되었다. 출판 계약을 진행하던 2023년 1월의 마지막 날, 나는 처음으로 '작가님'이라는 소중한 호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아나운서, 배우, 강사, 크리에이터 등 때때로 다르게 불리는 나는 '작가'라는 그 이름이 지금 이 순간 가장 설렌다.
2023년은 내게 불친절했다. 1월 첫 주에 경부 고속도로에서 후방 과실 교통사고를 겪었는데, 통원치료를 받은 지 2주 정도 되었을 때 나는 내 몸이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MRI 검사 결과 내 견디기 힘든 통증은 허리 디스크 파열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걸을 때마다 내 힘으로 들 수 없는 무거운 통나무가 다리에 달린 것 같아 집 밖을 나가는 것이 두려웠고, 환자들에게 좋다는 방석과 의자여도 1시간을 앉아있기 힘들었다. 하지 전체가 저리는 방사통은 진통제를 끊을 수 없게 했고, 병원 약은 졸음이 쏟아져 맑은 정신을 유지할 시간을 앗아갔다. 그 시절, 내게 글쓰기 마저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나를 붙잡았을까.
9월 중순부터 나와 출판사의 시계는 급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당초 계획은 2023년 내에 출간하는 것이었지만, 책에 실린 내가 촬영한 100장 훌쩍 넘는 수중 사진 작업과 글 교정에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2018년부터 나는 수중에서 영상을 주로 촬영해서 그 이후의 바다는 스틸 사진이 많이 없다. 영상을 캡처한 사진은 인쇄용으로는 이미지 사이즈가 작아서, 프로그램을 구입해 한 장씩 화질 높이기에 매달렸다. 어쩔 수 없는 바다 덕후는 필요한 사진만 캡처하지 못하고 영상을 넋 놓고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 작업이 더 오래 걸린 것은 안 비밀. 유튜브 영상을 편집할 때도 매번 볼 때마다 자막 오타나 수정할 점이 발견된다. 업로드하면서도 어딘가 또 나타날 수정 사항을 걱정하는 내 성격은 저자 교정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정말 내 글을 외우려나 싶을 만큼 여러 번 봤지만 여전히 아쉬웠다. 이제는 정말 그만할 때야. 그렇게 말려준 모두에게 정말 고맙다.
브런치에 적었던 글과 같은 소재, 맥락의 이야기도 많이 담겼지만 글의 톤과 생각의 정리는 많이 달라졌다. 조각조각 흩어져있던 생각들을 한정된 분량으로 정리하기 위해 서로 합치고 덜어내는 과정에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스스로 알아가는 기쁨을 누렸다. 글을 다 완성하고 난 후 가장 마지막에 쓴 서문에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한 권의 책을 써 내려가며 찾아낸 나의 이야기가 담겼다.
'입수'라는 제목의 서문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페루의 나스카 지상화가 등장한다. 서울 면적의 절반을 넘어서는 거대한 땅에 단순히 흙과 자갈로 그려진 30여 점의 그림들. 건조한 기후 덕에 수천 년간 유지되었다고 하는데, 비행기를 타고 상공에서 관찰 가능한 이 그림을 수천 년 전에 어떻게 기획하고 그려냈을까. 사람들은 외계인이 그렸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더하기도 한다. 만약 외계인이 하늘에서 이 그림 그리기를 진두지휘했다면 땅에서 흙을 파고 자갈을 쌓는 인간은 내 눈높이에서 이 그림의 모습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이것이 하나의 완성된 그림이 될 것이라는 믿음은 있었을까?
나의 인생도 그랬다. 나는 분명히 이 방향으로 다섯 발짝 나아가는 결과를 예상했는데, 내 준비와 노력을 무시하듯 다른 방향으로 세 발짝 멀어지기도 했다. 절망하고 때론 분노하며 에너지를 소모했던 시간이 흐른 후에 어느 날 그 지점은 내 새로운 시작이 되기도 했다. 반드시 하나의 방향으로 순서를 정해 사건이 벌어지길 기대했던 마음이 오히려 나를 힘들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에서야 내 인생 순간순간 이곳저곳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인생이라는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그 위치에 꼭 들러 그 사건을 경험하며 스스로 좌표를 찍어야 한다는 것을, 신은 때론 가까운 시일 안에, 어떤 때는 수십 년이 지나서야 알게 했다.
모든 이의 인생에는 나스카 지상화가 있다. 아직 비행기를 타고 그림 전체를 바라보지 못했을 뿐 우리 모두는 결국 신비롭고 거대한 하나의 완성된 그림을 그려나가고 있다고 믿는다. 이 책은 바다 그리고 스쿠버 다이빙으로 그려온 내 인생의 나스카 지상화이며, 통제할 수 없이 그저 흘러가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삶을 불안해했던 나와 닮은 분들에게 보내는 위로와 응원이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물길 따라 흘러가듯이 책장을 넘기는 가운데 어느 순간 여러분 또한 자신의 삶이 그려내는 이 불가사의하고도 아름다운 그림을 조망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p.13, <입수 - 바다에서 찾은 나스카 지상화> 중에서)
'책을 쓰고 있어요.'를 반복할 때마다 언젠가 책이 나오긴 하는 것이겠지, 첫 책을 쓰는 작가는 그 순간이 잘 그려지지 않았었다. 분명히 내 글과 사진이고 교정작업을 하는 내내 디자인까지 더해진 파일로 수없이 봤는데도 처음 책을 손에 잡았을 때 기분은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로웠다. 화면에서 보고 좋아했던 아티스트를 실제로 만났을 때 느끼는 그 '실재의 감동'같은 기분이려나. 평소에 내가 봐왔던 에세이에 비해 엄청 두툼하고 묵직한 느낌도 좋았다.
방송하는 사람에게는 프로그램이나 작품명을 말하며 잘 봤다고 이야기해 주는 분들이 큰 힘이 된다. 그런데 독자가 남겨준 서평은 눈물 나는 위로라는 것을 느끼며 지내는 요즘이다. '스쿠버 다이빙'이라는 나에게 특별한 소재로 이야기를 엮어 나갔지만, 결국 인생과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나의 마음이 전해질까? 혹시 낯선 장르의 다른 이야기라고 느끼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있었다. 그런데 내 글 한 줄 한 줄에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공감의 이야기를 적어 내려간 독자들의 마음에, 내 글을 읽고 숨이 쉬어진다는 그 말에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더 높이 오르지 못할까 두려운 날, 수평선 아래에서 만난 진짜 평화
이제 내려가볼까요?
더 많은 독자들과의 만남을 꿈꾸며 다음 이야기를 준비해 볼까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