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머리가 나쁘다. 그냥 나쁜 게 아니고 심하게 나쁘다. 그런데 이게 그냥 단순히 공부만 못하면 되는 게 아니다. 사는 데 아주 불편하다.
(1) 기계치. 나는 공학도 출신답지 않게 기계치이다. 가전제품을 뜯어내고 그 속을 보면 숨이 턱 막힌다. 그 많은 부품들이 제각각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알다니, 천재가 아니고서야 그럴 수가 없다. 자동차 정비소에서 보닛을 열고 척척 고치는 분들은 초능력자 같다. 난 고치려 하면 맨날 더 망가뜨린다. 예외는 홧김에 꽝 갈겼다가 기적적으로 회생할 때뿐이다.
그러면서 무슨 놈의 호기심은 또 더럽게 많다. 시계나 가전제품을 사면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게 어떤 원리로 동작하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문제는 내 손만 거치면 멀쩡한 것도 고장이 난다는 거다. 그야말로 마이너스의 손이다.
(2) 방향치. 지금이야 내비게이션이 다 알려주지만 나는 내비게이션이 나올 때까지 운전을 못 했다. 뱅뱅 돌며 헤매다 허허벌판에서 기름 떨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최소 5번 넘게 간 곳이 아니면 절대 못 찾아간다(그렇다고 5번 넘었다고 잘 찾아간다는 보장이 있는 건 아님).
운전뿐이 아니다. 걸어서도 못 찾아간다. 어릴 때 전학을 가고 한동안 학교를 찾아가지 못했다. 하루는 아무리 찾아도 학교가 없어서 몇 시간 같은 곳만 뱅뱅 돌다가 등교시간이 훨씬 지나 버렸다. 거기서 학교를 찾더라도 왜 이렇게 늦었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어지는 그 상황이 싫어서 그냥 집으로 가 버렸다. 다음날.
선생님 : "어제 왜 학교 안 왔어?"
배가본드 : "늦어서요."
반 전체 : "와하하 우하하 크하하 트하하~" :) :) :)
난 학교를 못 찾아서 그랬다고 말하면 하면 다들 웃을 것 같아서 "늦어서요." 했을 뿐이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이씨 난 정말 심각한데 왜 웃어?
(3) 기억치. 나는 5학년 때까지 구구단을 외우지 못했다. 지금도 나는 툭하면 내 휴대폰 번호를 기억하지 못한다. 갑자기 본인 인증을 하거나 현금영수증을 발행하거나 무슨 포인트 적립할 땐 늘 동행자에게 내 번호를 물어야 한다. 그 11자리 숫자가 때려죽인대도 기억나지 않는다.
군입대 전날에는 휴대폰을 가지고 나간다는 게 침대 머리맡에 놔둔 TV리모컨을 가져가선 군대 가기 전날인데 전화 한 통 안 해주는 모두를 원망하다가 속이 상해서 공원에서 펑펑 울어 버린 적도 있다.
지난주에는 차에 타고 시동을 걸려는데 열쇠가 온데간데없다. 서류철에서 클립(@)을 꺼내어 구부려서 키 꽂는 곳에 집어넣고 살짝 돌렸다. ‘부르릉~’ 캬아, 어때 안 어때? 나 쵸큼 멋있지? 이제 출발하려는데 옆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내리던 배달부 아저씨가 창문을 두드리며 말한다.
“이봐요! 차 문에 키 꽂혀 있어요!“
아.
그제야 내가 차 안으로 어떻게 들어왔는지 생각났다.
무슨 치 하면 보통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몸치나 음치다. 그건 가끔 불편해도 사는 데 큰 지장까진 아닐 것 같지만, 나의 이 세 가지는 일상생활에 큰 불편함을 주며 타인에게도 폐를 끼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저주나 다름없는 것이다. 무더운 여름밤에 잠이 오지 않아 에잇 맥주나 한판 때리자, 옷을 주워 입고 편의점에 가는데 한참 가다가 뭔가 기분이 이상해서 아래를 보니 바지를 안 입고 나왔던 적도 있다. 사람들은 이런 나에게 그건 치매의 초기증상이라 말하지만 그건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따지면 나는 아예 꼬마일 때부터 지금까지 한 순간도 치매가 아니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나도 예전에는 장점이 하나 있긴 했다. 스피디함. 다른 말로는 미루지 않기. 뭔가 할 일이 생기면 시간적 여유가 있어도 그 즉시 처리하는 습관이 있었다. '척 하면 착'이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여럿이 하는 업무를 수합하는 상황에서 제일 먼저 자기 몫을 가져오는 건 항상 나였다(그래서 수합하는 사람이 나를 굉장히 좋아했었다. 자랑이다. 흐~)
그런데 이런 특징이 생겼던 이유가 엉뚱하다. 부지런해서가 아니다(오히려 나는 천성적으로 게으른 편이다). 진짜 이유는 나중에 하려 했다간 전생에서도 들어본 적 없을 정도로 까맣게 잊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그 즉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똥망인 내 기억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이고, 다른 말로는 나 자신을 믿지 못해서, 내 머리를 믿지 못해서이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고 부지런하고 자기 관리 철저한 것쯤으로 여기는 듯했지만 사실 그건 형편없는 기억력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이 좋게 포장된 것뿐이었다. 그러니 장점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그 버릇이 생긴 이유를 떠나 남들이 좋아해 주었으니 장점은 장점이라고 열심히 정신승리하자는 생각을 했었다.
어째 죄다 과거형이냐고? 이젠 그마저 사라져 버렸으니까. 일을 일찍 끝내면 일을 더 주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뭔가 오더를 받아서 그 즉시 열심히 삘삘삘 하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오더가 바뀌어서 새로 내려오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엑셀서식 하나 주고 자료작성하라고 하는 단순한 오더도 삘삘삘 하고 있노라면 다음날 엑셀서식이 바뀌었다면서 다시 메일이 와서는 일을 다시 해야 한다.
결국 일은 그 즉시 하지 말고 묵혔다가 나중에 하는 게 여러 가지 이유로 낫다는 것을 알아 버린 것이다. 죽어라 삘삘 하고 있으면 오더가 바뀌고, 또 죽어라 삘삘 하고 있으면 또 또 바뀌고.... 그리고! 가끔은 일 받아 놓고 가만 묵혀놓고 있으면 그 일이 저절로 없어져 버릴 때도 있다(진짜)!
그래서 나는 일을 최대한 미루다가 더는 정말 미룰 수 없을 때에야 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나마 하나 있던 장점마저 사라진 것이다. 과거의 나의 모습과 비교하면 퇴보로 볼 수도 있으나 이건 세상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학습된 최적화된 처신이다. 이름하여 훈련된 무능(trained incapacity)이란 것이렷다.
사람들은 좋은 머리는 신의 축복이라 생각한다. 과학이 발달해서 사람의 외모마저 수술로 뜯어고칠 수 있어도 머리 나쁜 데는 약도 없는데, 좋은 머리를 가졌다면 당연히 신이 사랑하는 사람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나쁜 머리가 신의 축복을 입지 못했다거나 불행한 건 아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고,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다. 나처럼 나쁜 머리로 태어나면 사는 데 가끔 불편할 때가 있지만 그 대신 아무도 내게 뭔가 높은 기대를 하지 않는다. 다른 건 몰라도 조용히 살기에는 최고다. 그리고 그건 정확히 내 삶의 지향점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것도 내 경험상 좋은 머리보다 나쁜 머리가 한결 유리하다. 당장 글 쓰는 것만 가지고 말해도 "저런 사람도 쓰는데 내가 왜 못 써!" 이게 되니 얼마나 좋은가? 천부적으로 글빨 깨나 날리는 사람이 “당신도 글을 쓸 수 있습니다”라고 암만 목이 터져라 터져라 울면서 외친들 그게 무슨 영감을 줄까? 반면 배가본드 놈은 그냥 숨만 쉬어도 용기를 줄 테니 이것이 바로 선한 영향력 아니겠는가? (와하하)
그래도 다음 생에서는 오펜하이머의 삶이 어떤 건지도 체험해 보고 싶다. 천재의 삶은 대부분 불행했다고들 하니 아마 그때도 나는 똑같은 소리를 할 가능성이 크지만 그렇게라도 되어야 최소한 이솝우화의 신포도 신세는 면할 수 있을 것 아니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