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쯤 전입니다. 자신을 작가로 퍼스널 브랜딩하는 블로거분이 계셨습니다(브런치 작가는 아닙니다). 작가라면 보통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모습들이 있는데 그런 모습들과는 거리가 멀어서 '?' 하는 느낌이 있었는데, 한번은 다수의 에세이를 원저자는 슬쩍 빼버리고 블로그 포스팅한 것을 보게 됐습니다. 모두 잘 알려진 유명 에세이스트들의 글들이었는데, 그냥 통째로 뭉텅 긁어다 붙여 넣고 군데군데 추임새로 '여러분', 주어 자리에는 '저 ○○○은'을 넣는 정도라서 단순 실수로 원저자를 누락시킨 것으로 보기도 어려웠습니다.
아 이건 정말 아닌데.. 최소한 원저자들께만은 알려 드려야 맞을 것 같았습니다. 그 후는 아는 게 전혀 없고, 여전히 인기 작가로 자신을 포지셔닝하고 계시다는 것만 압니다. 인기 작가로 통하고 싶으신 마음은 무척 커보이는데 정작 다른 이의 창작물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습은 없는 극단적 대조가 좀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조차도 저에겐 교훈이 된 것 같습니다. 직접 쓰고 또 쓰며 성장통을 제대로 겪으면 자연스레 남의 창작을 소중히 여길 줄도 알게 된다는 것을, 그 기억에 저 스스로의 체험까지 더해져서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다른 작가님의 글을 읽다가 가끔 불길이 확 타오르듯 모티브를 받게 되는 상황이 생겨도, 제가 받은 임팩트가 너무 큰 그 상태로 글쓰다가는 자칫 의도치 않은 중복이 생겨버릴까봐 조심스러워집니다.
이제 두 달이 지났습니다. 한 달 되던 때도 그랬는데, 아직도 햇병아리지만 3.31.이전과 오늘을 비교해 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변해 있는 지점들이 몇 개 있습니다. 기쁘게도요.
쓰고 또 쓰다 알았습니다. 쓰는 사람이 한 줄조차도 얼마나 힘들게 쓰는지. 글이 태어나려면 먼저 글이 될 정도의 의미 있는 순간을 살아 내고 그걸 나의 사고와 관점으로 재구성하는 숙성과정이 필요한데 이게 엄청난 고통입니다. 중간중간 멍도 때려 줘야 하고요.
멍 때린다고 표현은 했지만, 그 사람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다른 사람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먼산 보는 듯해도 그 사람의 머릿속에는 사고를 숙성시키고 재구성하는 과정이 계속 일어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엉뚱한 것과 뭉개져서 떡이 되어 버리기도 하고, 아예 버려지기도 합니다. 제가 그래 보니 다른 분의 글을 읽을 때도 그냥 휙 읽기가 싫었습니다. 어렵게 생산된 걸 쉽게 소비하는 그 기분이 싫었어요.
흔히들 그렇듯 다른 곳에서는 저도 품앗이성 하트 삑삑 누르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브런치에선 그러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구독자(0)+관심작가(0)+발행글(0)+방문수(0). 일명 사빵(four 0's) 앞에서 무지하게 경건해졌던 걸 수도 있습니다. 원래 빵은 사람을 경건하게 합니다. 누가 그러냐고요? 제가요.
하지만 그보다는, 사람들이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란다면 먼저 저부터 그분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었습니다. 사빵 상태로 이것저것 눌러 본 글들이 너무 좋아서 이 라이킷에도 무게를 싣고 싶었습니다. 그게 제일 큽니다.
글을 올리자마자 1분도 안 되어 달라붙는 허망한 라이킷도 그렇지만, 자기 페이지 유입을 늘리려고 누르는 라이킷은 대체로 느낌이 옵니다. 댓글이 달려도 건성으로 읽은 소울리스한 댓글은 티가 납니다. 제 기준에서는 타인의 작가적 고통을 하찮게 여기는 행위입니다.
전 라이킷은 그냥 진짜로 이 글을 좋아한다는 딱 하나의 의미에 머물게 하고 싶습니다. 저한테서 라이킷 날아오면 그건 제가 진짜로 작가님의 글을 끝까지 자세히 읽었고, 좋은 느낌으로 읽었을 때입니다.
글감이 작가님의 안에서 하나의 글로 탄생하려면 며칠도, 몇 달도 걸릴 수도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작가님 글 보고 싶어요!" 그조차도 그분께는 짐이 될 것 같았습니다. 어차피 브런치에서도 알림을 보내는데 굳이 하나를 더할 이유도 없고, 그 작가님이 동전 넣고 삑 누르면 커피 딸랑 나오는 자판기도 아니고.
작가님들은 저마다 자기의 시계가 있는데 그 시계가 메트로놈처럼 주기가 일정하지 않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글감을 살아 내고 자신의 관점과 사고로 재구성하는 그 과정이 무슨 닭이 알 낳는 그런 건 분명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작가님의 글이 끊어지면 그냥 어딘가에 그분이 잘 계신지만 확인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이것 역시 저 자신이 각 잡고 쓰는 입장이 되어 보고서야 생긴 변화입니다.
브런치 글이 발행되면 좌표는 'brunch.co.kr/@영문주소/글번호' 이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스터 에그가 있습니다. 만약 좌표상의 글 번호가 25인데 그 작가님이 발행하신 글 수가 52면 이건 그 작가님 서랍 속에서 오래 잠자다 나온 글이란 얘기죠. 그 차이가 클수록 그 작가님이 이 글을 완성하려고 오래 고민하신 거고, 어디를 고민하셔서 오랫동안 내놓지 못하셨던 걸까 상상해 보는 것도 저한테는 재미 포인트였습니다. 글이 쭉쭉 나가질 않아서 되다 만 글로 한동안 묻어 놨다가 최근의 뭔가를 계기로 화룡점정하듯 완성되었을 수도 있고. 아까 저의 읽는 속도가 브런치 시작하고 확 느려졌다고 했는데, 그게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 반대로 발행 글이 20개인데 URL 좌표상 글 번호는 40이다, 그럼 아마도 이 글은 후다닥 쓰셨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 작가님의 서랍 속에는 다른 많은 글들이 익어 가고 있다는 얘기고, 그 차이가 클수록 그 작가님 서랍 속엔 뭐가 있을까 살짝 훔쳐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깁니다. 제 서랍요? 완전 쓰레기장입니다 킥 :)
글 쓰다가 울어 보신 적 다들 있으시죠. 예전엔 글 쓰다가 우시는 작가님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자기감정에 취해서 청승 떠는 것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바보같이 왜 울어, 울긴?
그런데, 아니던데요. 막상 제가 그 꼬라지 되어 보니 그런 거 전혀 아니던데요. 글로 못 나간 건 물로 나가던데요. 50만큼 숙성시키면 10만큼 쓰고 40이 물로 나가고, 100만큼 숙성시키면 10만큼 쓰고 90이 물로 나가는 거던데요. 더 많이 숙성시킬수록 더 많이 쏟게 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더 많이 사색하고, 더 많이 사유하고, 더 많이 쏟아 버리는 게 프로메테우스의 슬픔과도 같은 작가의 숙명임을 이젠 알아요.
몰입하길 좋아합니다. 몰입해서 냄비를 파글 파글 오래 끓이면 냄비에서 뭔가 튀어나와요. 그런데 튀어나온 그게 말도 안 되게 영롱한 보석일 때가 있어요. 전에는 써도 낙서 수준에 그쳤고, 정자세로 집중해서 쓰기가 아니라 무슨 낙지가 불판 위에서 트위스트 추듯 썼으니 깨달음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이 말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해 봤어도 어떻게 했느냐가 중요하고, 나중에 그걸로 얼마나 성찰했는지가 또 중요합니다. 뭔가를 아주 오래 했으면서도 실제로는 자기보다 그걸 덜 겪은 사람들보다 잘 모르는 사람이 자주 있는 것도 그래서가 아닐까 합니다.
브런치 두 달, 저에겐 읽기와 쓰기를 재발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여기서 또 한 달이 더 지나면 그땐 또 어떤 깨달음이 찾아올지 기다려집니다. 뭐가 될지 모르는 그 깨달음을 기다리는 것도 제겐 브런치의 즐거움입니다. 나중에 돌아보면 지금 모습도 미숙해 보이겠지만, 뭔가를 계속 알아 가는 오르막길에 있는 그 자체가 소중하기에 이 순간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이렇게 글로 사진 찍어 놓으려 합니다.
바람은 불고, 새는 날고, 저는 씁니다.
그리고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