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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준생 Jun 13. 2024

좌절을 하더라도 깨끗한 방에서

자취를 시작하면 가장 귀찮은 건 바로 정리다. 요리를 하고나서 나온 설거짓거리, 빨래를 하고 널기, 옷이 다 마르면 개서 옷장에 넣기 등 흔히 ‘집안일’이라고 부르는 정리 말이다. 혼자 사는 집이지만 정리할 건 넘친다. 심지어 해도해도 줄어들기는커녕 매일 더 쌓이는 것 같은 집안일을 바라보면 그대로 외면해 버리고 싶은 충동도 든다. 


지옥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면 아무것도 하기 싫다. 옷도 아무렇게 벗어 넣고 들고 갔던 가방도 놓이는 대로 놓아두고 냉장고 앞에 주저앉아 주섬주섬 먹을 음식을 꺼낸다. 아니, 일하는 시간이 길었다면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는 일마저 생략한다. 그냥 집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산 김밥을 서둘러 전자레인지에 돌려버린다. 밥을 우적우적 먹고 나면 그제야 어딘지 모를 공허함이 찾아온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면 야무지게 밥을 챙겨 먹고, 30분 정도 휴식을 취한 뒤 책을 읽거나 자기소개서를 쓰는 게 원래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게 뭔가. 밥을 챙겨 먹는 것부터 실패다. 집에 밥이 있음에도 움직이기 귀찮아 편의점에서 김밥을 샀다는 데서 오는 죄책감부터 시작해 결국 오늘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절망감. 이 모든 감정을 겪기까지 앉아서 단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부정적인 감정이 들 때면 더욱 격렬하게 현실을 회피하고 싶다. 당장 눈앞에 놓인 김밥 포장지도 버리기 싫다. 그냥 다 모르겠고, 오늘을 마감하고 내일로 넘어가고 싶은 충동이 든다. ‘오늘을 회피하고 덮어버리면 내일이라는 새로움이 오겠지’라는 안일한 마음이 나를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이렇게 더러운 방에서 자고 일어나 새로운 내일을 맞이할 생각을 하면 더 우울하다. 오늘을 회피하고 싶은 이유가 새로운 내일이기 때문인데, 내일 아침 일어나 맞이할 풍경이 더러우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제야 일어날 마음이 생기고 당장 눈앞에 있는 쓰레기부터 버려본다. 그 다음에 설거짓거리를 싱크대에 담그고, 분리수거를 한다. 설거지는 조금 미뤄도 괜찮다. 싱크대 안에 담가놓으면 일단 눈에 보이지는 않으니까. 밥상을 닦고 다시 자리에 앉으면 아까보다 기분이 나아진 걸 느낀다.


물론 오늘 아르바이트 말고 한 일이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죄책감은 그대로다. 원래 하기로 나 자신과 약속한 계획이 있었지만 지키지 않았으니까. 근데 더러운 방에서 죄책감을 느끼며 우울한 것보다, 정리라도 된 방에서 우울한 게 한결 낫다. 뭐랄까 시각적으로 거슬리는 게 없으니까 얼른 치워야 되는데 그마저도 하고 있지 않은 죄책감은 없다. 방 정리의 여부가 죄책감의 무게를 더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순간 다짐했다. 우울하고 좌절하더라도 꼭 정리된 깨끗한 방에서 하겠다고. 차라리 방이라도 정리해 죄책감을 덜고 회피한 오늘 대신 해피한 내일을 맞이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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