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회피법에 대해
앞서 밝힌 바 있듯, 나는 회피형 인간이다. 조금 웃긴 건 이런 내가 계획형 인간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요즘은 조금 들쑥날쑥한 편이긴 하지만, 매일 아침 혹은 자기 전 하루 계획을 세우는 게 루틴이다. 일어나서 무엇을 가장 먼저 하고 그다음 어떤 순서로 움직일지 정해 놓으면 일단 뭐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 같은 백수에게는 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가 성취감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 계획이 항상 지켜지는 건 아니다. 계획한 대로 움직이는 날은 정말 드물다. 절반 정도 지키면 나름 하루를 잘 보낸 수준이다. 계획을 세워놓고 왜 절반 밖에 지키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제야 나는 회피형 카드를 꺼낸다.
계획은 세웠지만 하기 싫은 일이 있다. 대표적인 일이 자기소개서, 이력서 작성이다. 무슨 취업준비생이 자기소개서와 이력서 작성을 회피하냐고 할 수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어이없는 일이다. 하지만 형편없는 내 스펙을 억지로 부풀리는 작업을 하다 보면 소위 말하는 ‘현타’가 온다. 이렇게 해서 내가 취직할 수 있을까? 정말 내가 이런 일을 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면접에서(물론 아직 불러주지도 않았지만) 이 부분에 대해 묻는다면 내가 제대로 답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자꾸 들고, 스트레스가 쌓여서 결국 노트북을 덮어버린다.
그렇지만 나는 계획을 세웠지 않았는가. 오늘 자기소개서와 이력서 작성을 하자고 분명 마음을 먹었었다. 이 계획을 회피하고 조금이라도 안정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생산적인 딴짓하기’다. 내가 가장 많이 하는 생산적인 딴짓은 책 읽기다.
책 읽기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권유하는 일이다. 책이 삶에 도움을 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 허튼짓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낭비 라기보다 책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고 있다고 느껴진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이 기분을 이용해하기 싫은 일이 있을 때면 책으로 도망쳤다. 당장 풀어야 할 수학 숙제가 있어도 책을 읽었고, 다음 주가 중간고사여도 자습 시간에 책을 읽었다. 이 습관은 성인이 되어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책 뒤에 숨어 할 일을 회피한다.
주로 읽는 책은 소설이다. 아 정말이지 소설은 도망치기 딱 좋은 장르다. 특히 내가 제일 좋아하는 SF는 더 그렇다. SF가 보여주는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 집중해서 책을 읽다 보면 현실은 금방 지워진다. 그렇게 할 일을 잊고 책을 읽다 보면 내가 계획한 하루는 그대로 끝난다. 그래도 죄책감은 덜하다. 할 일을 뒤로한 채 누워서 잠만 자거나 휴대폰을 하다 시간을 보낸 날보다 훨씬 생산적이었다고 생각하니까. 다이어트하는 사람이 초코 아이스크림을 먹고 어쨌든 무가당이니 양심은 챙겼다고 하는 것과 같은 기분일까. 할 일은 하지 않았지만 대체재가 괜찮았다는 만족감을 얻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책을 읽은 날도 자기 전 ‘당장 할 일을 회피하는데 책은 읽어서 무얼 한단 말이지’라는 죄책감이 들 때도 있다. 회피가 그렇다. 무슨 짓을 해도 무시할수록 죄책감이 쌓이는 일이다. 하지만 책 읽기는 그나마 죄책감을 덜 수 있는 행위고, 나는 내가 회피형 인간으로 남는 한 피할 수 있다면 전력으로 책 뒤로 숨을 것이다. 다른 딴짓보다 건강하고, 재미있고, 죄책감이 덜 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