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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뿌니뿌니 Oct 27. 2022

팔자일까? 1

태어나면서 생기는 생채기 같은 팔자. 

지금은 돌아가신 우리 엄마는 슬하에 아들 없이 딸만 다섯을 두셨는데, 두 살, 다섯 살, 네 살, 세 살의 터울로 15년에 걸쳐 딸을 놓으셨다. 일제 강점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은 그 시절의 어머니들이 그랬듯이 아이는 생기면 생기는 대로 낳았고, 옆 집 미순이네도, 기철이네도, 고만고만한 아이들은 여분의 방이 없어 한 방에서 먹고 자고 복닥대는, 다섯 정도는 많은 축에도 끼어주지 않던 그런 시절이었다. 다섯이 모두 딸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 어린 나이에 들었던 '내 팔자엔 아들도 없어서 자식복도 드럽게 없다'시던 당신의 푸념이 생각난다. 더불어 우리를 혼내실 때면 '남편 복도 없는 X이 자식 복인들 있으랴'는 말씀도 꼭 덧 붙이셨다. 


엄마의 엄마, 나의 외할머니는 내리 다섯 딸을 놓고 여섯째로 아들을 낳으실 때까지 시모로부터 미역국을 얻어 드시지 못하셨다고 했다. 그 당시엔 아들을 놓으면 복덩어리, 딸을 놓으면 죄인이었으니까. 엄마는 아마 내가 외할머니를 닮아 딸만 낳나 보다 라며 여섯째는 아들을 낳을지도 모른다는 먼지같이 가벼운 희망을 안고 낳지도 않을 여섯째를 기다리며 사셨다. 나도 자식 놓고 살아보니, 그리고 내가 푸념하시던 그 옛날 엄마 나이가 되어보니, 자식들에게 꼭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필요는 없었을 텐데 많이 힘드셨나 보다.....라고 생각해 버린다.


사실 엄마는 방년 16세에 외삼촌 내외를 따라 혼자 월남하셔서 부모가 없는 상태로 성년을 맞았고, 몇 해만 고향을 떠나 있으려는 계획은 휴전선이 생기는 바람에 그렇게 본의 아니게 가족과는 영원히 이별하게 된 불쌍한 처자였다. 대단히 정직하고 독립적이며 성실하여야만 이 세상을 살아낼 수 있으리라는 사명감으로 오롯이 혼자 그것을 감내하셨던 분이었다. 20대에 아버지와 결혼을 하신 후에도 여자를 좋아하던 아버지와는 그닥 평안한 생활을 하지는 못하셨고, 그렇게 만족하지 못한 삶을 사셨던 엄마는 가끔은 화를 감추지 못하고 딸들에게 고스란히 속마음을 드러내 놓고 들키셨다.


말은 그렇게 심하게 하셨어도 무슨 보상이라도 바라셨는가 엄마는 딸들의 사주를 자주 보러 다니셨는데, 예전에 살던 인천의 조그만 이층 집 단칸방을 사주 보는 할아버지에게 세를 주셨던 영향이었을까? 엄마는 제법 할아버지의 사주풀이를 따라 하시곤 하셨다. 어느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엄마 마음엔 딸 다섯의 사주가 다 달라서 어느 딸은 좀 좋고 어느 딸은 좀 나쁘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어쨌든 내 사주에는 - 나중에는 이것이 당사주라는 것을 알았지만 - 천인(天刃)이 있어서 평생 사고나 질병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래서 그런가 내 몸에는 흉터가 아주 많다. 큰 사고만 따져봐도 택시에 치이고, 돌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 신장 하나 도려내고, 무보험 배달 오토바이에 치고..... 흉터가 너무 많아 공중목욕탕에는 가지 않는다. 다들 여자 조폭인 줄 알고 놀랄까 봐. TV 드라마나 다큐에 나오는 사람들에서도 이렇게 큰 칼자국은 보지 못했다. 지금은 오래 지나서 흉터도 좀 예뻐졌는가, 그렇게 길고 시뻘겋던 자국은 어느새 살색으로 스며들어 원래 내 몸에 있었던 구불구불한 무늬처럼 보이기도 한다.


딸 다섯의 사주 적혀있던 조그만 한지 종이를 가끔 꺼내보시며 "이거 너네들 시집갈 때 다 줄게."라시던 엄마는 주민등록 초본이 다섯 장을 넘어갈 만큼 자주 이사를 다니면서도 꼭 가지고 계셨는데, 그 엄마가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해 계시면서 자신의 이름도 잊어갈 때쯤 그 존재도 같이 잊혀졌다. 


내 팔자는, 우리 딸들의 팔자는, 그렇게 엄마의 기억과 함께, 엄마의 몸과 함께, 엄마의 회환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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