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ento Mori(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그러므로 오늘을 기억하라)
1월부터 북클럽 활동을 시작했다. 작년부터 가입해 놓기는 했으나, 대학원 수업 과제가 너무 많다 보니 한 번도 가 보지를 못했는데, 방학하고 12월에 급한 일들을 다 마무리한 후 시간 여유가 생겨서 용기를 냈다. 2월의 추천도서는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라는 책이었다. 서울대학교 암 병원 종양내과 전문의 김범석 교수님이 내신 책이다. 수년간 암환자를 치료하면서 몸으로 체험한 환자들의 이야기다. 그 중 공감 가는 부분들이 참 많다.
작년 여름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동시에 떠나보낸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암 수술을 세 번이나 하시고도 건장하신 시어머니 생각도 났고 코로나 예방주사를 맞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상태가 악화되셔서 코마 상태에 빠지셨고 결국 요양원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신 시아버님의 모습과 세 번째로 찾아온 심장마비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나의 친엄마 생각도 났다. 집 나온 지 5일 만에 밥 한 끼 드시지 않아서 결국 스스로 죽음을 택하신 나의 엄마인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도 떠오른다. 모두들 무엇이 그리 바쁜지 산 사람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시고 갑자기 떠나가 버리셨다.
'Memento More!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므로 오늘을 기억하라.'는 문장에 마음에 와서 박힌다. 오늘밤 내가 죽는다면 나는 내일 아침을 어떤 모습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나는 이 세상에 아무런 미련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나의 마지막을 마주할 수 있을는지...
p43. '어쨌든 환자가 죽음으로써 이 부녀라는 관계의 굴레가 드디어 종결된다는 것이 그녀에게 유일한 희망으로 보였다. 부친의 죽음이 그녀의 삶에 찾아오는 첫 번째 행운 같았다.'
정말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나의 아버지는 가정 폭력이 심해서 엄마는 내가 2살 때 집을 나가버리셨다. 이제 갓 돌을 넘긴 남동생도 있었다. 그리고 결국 아버지는 할머니와 자식들마저도 산간 오지에 버리셨고 죽었나 살았나 확인하는 차원에서 설날에 한 번 다녀가는 것이 전부였다. 정부미로 간신히 연명만 하고 자란 나는 할머니가 80이 넘으셔서 더 이상 농사를 지으며 우리 두 남매를 키울 수 없게 되자, 가족들의 등쌀에 못 이겨 할머니는 하나뿐인 아들 집으로 오게 되었고 할머니와 우리 남매는 새어머니들 밑에서 눈칫밥을 먹고 자라야만 했다.
아버지의 무책임한 삶의 결과는 너무나 잔혹했다. 언니는 초등학교 5학년의 나이에 남의 집 식모살이가 되었고 할머니는 내가 가출한 그 5일 동안 곡끼를 끊으시고 결국 죽음을 택하시고 말았다. 그 5일의 시간 동안 아버지는 무엇을 했을까? 아버지는 자신의 엄마인 나의 할머니와 세 명이 자식들의 가슴에 평생 대못을 열 개도 더 박고 말았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남편이 죽고 홀로 세 자식을 키우던 나의 친엄마가 다시 우리 집으로 오게 되었으나,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밤마다 몽둥이로 잔인하게 엄마를 때리는 것 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너무나 무서워서 차마 방문을 열지도 못하고 방에서 밤마다 울기만 했다. 결국 몇 년 버티지 못하시고 다시 가출을 감행한 엄마는 택시기사를 만나서 잘 사는 듯했으나, 어린 시절부터 키워주었건만 사춘기를 맞이한 아들이 '당장 나가라고. 자기는 자신의 엄마랑 살 거라고. 당신 때문에 우리 엄마가 이 집에 다시 못 들어온다고' 밤마다 난리를 쳤고 결국 죽이겠다고 칼부림까지 갔었다고 나중에야 들었다. 세 번째로 심장발작을 일으킨 엄마는 결국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언니와 나와 남동생과 이복 여동생은 낯선 새아버지와 엄마의 장례를 치르며 며칠 간의 어설픈 동거를 했었다. 엄마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기라도 했을까? 그 해 여름 우리 집에 와서 며칠 머물다 갔고 나는 없는 형편에 백화점에 가서 엄마에게 가을에 입으라고 예쁜 마이를 하나 사 주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바쁜 삶에 아마도 그 마이는 입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기차역 구내식당을 하셨던 엄마는 새벽 5시부터 김밥을 싸고 도시락을 싸면서 그저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을 테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허무했다.
그렇게 나는 평생 할머니와 엄마와 아버지의 마지막을 마주하지도 못한 채 떠나보내야만 했다. 너무나 할 말이 많았는데, 나는 그저 먹고 사느라고 바빠서 늘 내일이 올 줄만 알았다. 그렇게 허무하게 다들 떠날 줄 알았다면 지난날의 나의 모습과는 많이 다른 삶을 살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 삶에 있어 가장 감사한 일은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한 날 한 시에, 그것도 많이 아프시지 않은 비교적 딱 적당한 나이에 돌아가신 것이다. 새어머니만 돌아가셨다면 새어머니의 형제들이 자신의 누나를 죽인 거 아니냐며 아버지는 큰 곤욕을 치르셨을 거고 아버지만 돌아가셨다면 새어머니의 남은 삶은 또 얼마나 비참했을지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돈 밖에 모르는 남동생은 아버지의 집과 땅을 자기 명의로 이전해주지 않는다며 매일 싸우다가 결국 인연을 끊은 지 몇 달 만에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에 남은 새어머니의 삶은 안 봐도 비디오다. 장례식장에서 분명히 공동명의로 하자고 모두 합의했는데도 두 누나를 속이고 집과 땅도 모두 자기 단독 명의로 해 놓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몇 달 전까지 7천만 원도 더 넘는 돈을 가져갔는데도, 평생 아버지가 모은 돈을 몇 억씩 갖다 썼는대도 남동생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남은 재산은 셋이서 공평하게 나누자고 했다. 자기 몫을 다 챙긴 남동생은 일체 연락도 없다. 삶이 다 그렇겠지만 언젠가 나의 삶에도 가족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나에게 가족이란 너무나 큰 고통 그 자체였다. 끝도 없는 어두운 터널을 50년째 달리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희망을 가져본다. 언젠가 나도 보통의 다른 사람들처럼 가족이라는 단어가 힘들지 않은 날이 오기를...
'자, 이제 당신의 남은 날은 OO일 입니다. 이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시겠습니까?'
요즘 무릎이 슬슬 아파오기 시작했고 망막박리로 레이저 시술을 받게 되면서 눈이 점점 침침해져가고 있기에 이 땅에서의 내 삶의 여정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이제는 느낄 수 있다.
태어나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없으나, 죽음은 내가 선택할 수 있기에 이제 남은 삶은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겠다. 과연 후회 없는 삶이 있기는 한 걸까? 오늘이 내 삶의 마지막 날처럼 나에게 주어진 일들에 최선을 다하고 나를 더 사랑할 것이다. 허망하게 떠나는 어느 날. 미소 지을 수 있도록. 미련 없이 저 하늘로 가볍게 날아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