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당신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백일백장 100-2

어제 늦은 저녁. 함께 아들러심리학을 공부하는 선생님 남편의 부고 소식에 한 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 남편의 나이는 65세, 아직 젊다. 아니 젊다고 말하고 싶다.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60대는 더 이상 노인이 아니다. 알만한 친구에게 사정을 물어보니, 이미 결혼 당시부터 병이 있으셨고 지금까지 많이 아프셨다고 한다. 언제나 해맑은 미소로 분위기를 좋게 만들어주시던 소녀 같은 선생님에게 그런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많은 생각이 들었다.


오늘 죽음이라는 단어의 무게가 또다시 내 마음을 짓누른다.



할머니의 죽음


2살 때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나가셨다. 연년생 남동생은 돌도 채 되지 않았다.

재혼 후 아버지는 할머니와 우리 삼 형제를 돌보지 않으셨다. 이모할머니가 준 땅에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면서 우리는 근근이 살게 되었다. 세 명이나 되는 손자들을 어떻게 키울 거냐며 고아원에 보내라는 다른 가족들의 성화에도 할머니는 우리를 끝까지 품어 내셨다.


23년을 한 방에서 생활했던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내 삶의 가장 큰 트라우마다.


80이 넘은 노모와 자식들을 데려가라는 가족들의 성화에 못 이겨 나는 중3이 되어서야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다. 새어머니에게 우리는 눈에 가시였으리라. 새엄마는 늘 나를 모함했고 아버지와 이간질을 시켰다.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나는 23살에 가출을 하고야 말았다. 어느 날 갑자시 사라진 손녀딸의 이름을 며칠 내내 목놓아 불렀다는 친구의 말에 나는 지금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가출한 나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5일 동안 한 끼도 드시지 않으셨다고 한다. 방문에 잠금장치가 있는 걸로 봐서 새엄마가 할머니를 감금시켰는지도 모르겠다. 할머니는 결국 5일 만에 돌아가시고야 말았다.


"할머니~안 돼. 안 돼. 죽지 마! 왜 그랬어. 내가 성공해서 할머니 데리러 오려고 했는데. 조금만 기다려주지. 도대체 왜 그랬어. 죽지 마. 안 돼. 이대로 보낼 수 없어. 내가 성공해서 할머니 호강시켜주려고 했다고. 이건 아니잖아. 안 돼. 어서 눈 떠 봐. 나 왔어. 내가 왔잖아. 어서 일어나 봐. 죽지 마. 안 돼. 제발 눈 좀 떠 봐. 이렇게 가버리면 나는 어떻게 살라고. 안 돼. 어서 일어나."


그날밤 미라처럼 깡마른, 차갑게 굳어져버린 할머니의 시신을 끌어안고 나는 밤새 울었다.



어머니의 죽음


우리를 버리고 나간 것이 미안했는지, 어머니는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어린 이복동생 셋을 구례에 두고서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마주하게 된 아버지의 가정 폭력. 다른 새어머니들에게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폭력적인 모습이 너무 무서웠다. 퍽퍽 어머니가 몽둥이로 맞는 소리가 들려도 우리는 방문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만하라고 아버지에게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저 남동생과 나는 각자의 방에서 문을 잠그고 어서 이 사태가 진정되기를 기다리며 숨죽여 울 뿐이었다.


"어떻게 너는 엄마가 맞고 있는데도 말리지도 않냐?"

어머니의 이 한 마디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몽둥이에 맞아 본 사람은 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그래서 더 무서운지도 모른다. 그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될까 봐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다.


버리고 나간 자식들을 다시 잘 키워보겠다고 집으로 들어오신 나의 어머니는 그렇게 5년도 버티지 못하시고 다시 집을 나가버리셨다. 한마디 말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그것은 2살 때 버림받은 것보다는 덜 충격적이었다. 어디에서 살든 이곳 지옥과 같은 삶보다는 나을 테니. 차라리 엄마가 사라진 것이 잘 된 일이라고 나를 위안했다.


몇 년 후 다른 사람과 재혼해서 서울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언니를 통해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집 아들과의 갈등으로 결국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게 되었다. 53세라는 젊은 나이에. 장례식장에서의 낯선 이들과의 대면대면함이란.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 집 아들이 자신의 엄마와 새아버지의 재결합을 바라면서 엄마에게 이 집에서 나가라며 모진 소리들을 했고 심지어 나쁜 사람들을 불러다가 협박도 했었다는 사실을. 삶이란 그런 것이다. 내가 원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버린다고 버려지지도 않는 것.


그렇게 엄마는 죽어서 다시 우리 품으로 돌아왔다. 유골함에 이름 한 자 없이. 사진 한 장 없이.



아버지의 죽음


"아니, 어머니랑 아버지 여수 갔어? 며칠째 경로당에 안 와서 전화해 봤어. 문을 열어봐도 꽉 잠겨있고 아무 소리도 없네."


둘째 아들의 비행으로 인한 충격으로 정신이 반쯤 나가있는 사이, 새어머니와 가까이 지내시는 동네 아주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나는 별일 없겠지 생각하며 출근을 했다. 주차장에 주차를 한 후 전화를 걸어본다. 전화기가 둘 다 꺼져있다. 심장이 먼저 마구 두근대기 시작한다. 아닐 거야. 설마. 서둘러 수업하는 학부모들에게 오늘 일이 생겨서 수업을 못할 것 같다고 전화를 한다. 그리고 구례로 달려가는 그 한 시간은 10년보다 길게 느껴졌다.


역시나 방문도 꽉 잠겨 있고 불러도 아무런 대답이 없다.

창문에 덧대여진 방충망을 뜯고 창문을 열어본다. 창문이 한 뼘쯤 열린다. 그리고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찌른다. 퉁퉁 부어 바람인형 같은 새어머니의 시신이 눈에 들어온다.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다.

경찰이 오고 과학수사대가 오고 구급차가 오는 사이 남동생에게 전화를 해야 하나 고민이 된다.

아버지의 전재산을 다 탕진한 남동생은 집과 땅을 자기 명의로 상속해 주라며 아버지와 대판 싸우고는 몇 달째 집에 발길을 끊은 상태다.


5학년 때 남의 집에 식모로 보내진 언니와 아버지와 대판 싸우고 몇 달째 발길을 끊은 남동생의 얼굴을 장례식장에서 마주한다. 그렇게 우리는 말없이 장례를 치르고 똑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한 번도 가족들과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지 못 했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단어가 더 무겁고 힘든가 보다.


죽음은 어쩌면 동전의 양면처럼 삶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내일 당연히 살 것이라고 확신하며 잠에 든다.

오늘은 새 날이지만 어쩌면 마지막 날일 수도 있다.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얼마 전 영화활용교육 중에 리더인 이재근선생님이 던진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사람의 정체성이나 가치관을 대변해 줄 것이다.


나는 중독자들을 의한 예방 교육과 상담을 위한 사회재활상담사 시험을 준비 중이다. 20년 동안 입고 있는 언어재활사라는 옷을 벗고 상담사라는 새로운 옷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상담심리대학원에 다니고 임상심리사와 청소년 상담사 자격증을 따기까지 그동안 참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사회재활상담사에, 한국 상담학회의 전문상담사까지 갖추려면 내년까지 공부를 더 해야 한다.


종일 언어재활사로 근무한 후 집으로 출근해 아내로, 엄마로 또 다른 삶을 살아내야 하고 그리고 주말이면 교회에서 내게 주어진 일들도 잘 감당해야 했다. 가끔 있는 시댁행사는 또 어떤가. 나는 큰 며느리로 25년간 집안 대소사를 치러야 했다.


어느덧 50이 넘어선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어느덧 두 아들을 잘 키워냈고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 책도 쓰고 싶고 강연도 하고 싶다. 나처럼 힘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어깨를 토닥여 줄 것이다. 섣부른 위로의 말보다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그런 상담사가 되고 싶다.


최근 <혼자 사는 즐거움,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없는 나만의 행복 찾기>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 딸로, 아내로, 엄마로, 며느리로, 언어재활사로의 옷을 벗고 이제는 온전한 나로 살아보고 싶다.


#책과강연 #백백프로젝트



keyword
작가의 이전글백일백장 24기에 도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