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가 싶더니 이미 벚꽃은 지고 진달래도 안녕을 고할 때가 되었다. 날씨가 좋아 아이들을 데리고 주말이 되면 가볍게 동네 뒷산을 한 바퀴 휘 돌거나 놀이터에 데려가 시간을 보낸다. 봄나들이 삼아 가는 이유도 있으나 이렇게 좋은 날 다들 널린 빨래 마냥 소파에 침대에 누워 휴대폰만 보고 있는 꼴이 싫어서이다.
이번 주는 진달래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는 천주산이다. 이번 주를 마지막으로 꽃이 질 것 같아 김밥에 삶은 계란, 콜라, 물을 보냉 가방에 담고 커피를 타 먹을 뜨거운 물까지 보온병에 담아 아주 클래식한 메뉴로 도시락 가방을 꾸린 뒤 하나씩 짊어지고 산행에 나섰다. 우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주차장은 물론이고 주변 도로까지 꽉 차 주차할 곳도 없이 북적였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꼭 가야겠냐는 남편의 불평에도 초입이라 북적이지 넓은 산에 올라가서 줄 서겠냐고 달래 가며 눈을 돌려 주차할 곳을 찾았다.
운 좋게 주차 자리를 찾고 호기롭게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그런데 천주산을 동네 뒷산 가듯 생각했더니 내리막 하나 없이 오르기만 하는 산에 두 다리가 무거워지고 바로 밑에 주차장이 보이는데 한참을 올라온 듯 숨이 헉헉거렸다. '다 이놈의 마스크 때문이지.' 핑계를 대어 보지만 나를 지나 휙휙 지나가는 아이들을 보니 마스크 때문만도 아닌 듯하다. 중도포기를 하자니 아이들에게 면이 서지 않고 정상까지 오르자니 엄두가 나지 않았으나 산 중턱쯤에 있는 아이스크림이 나를 살렸다. 당을 충전하고 '그래, 진달래가 피면 얼마나 피었나 한번 보자.' 구시렁대며 막힌 귀로 들리는 생생한 나의 숨소리를 응원가 삼아 한 발 한 발 떼어 정상에 닿았다.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군락을 보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사진이 아무리 멋지다 한들 나의 한숨 한숨을 담아 올라온 마지막 발걸음 앞에 놓인 꽃무리를 담아낼 수는 없는 듯했다. 마침내 정상에서 아들이 회식이라 부르는 소풍 도시락을 꺼내 식사를 시작했다. 산의 한 면을 아우르는 스케일 큰 꽃밭을 앞에 두고 먹는 점심이라니! 아이들도 나도 입에 한가득 넣고 열심이다.
배도 부르고 살만 하니 주변 사람들도 눈에 들어왔다. 동네 뒷산과 다르게 소문이 나서 그런지 젊은 사람들이 꽤 많다. 꽃과 나무 따위 관심도 없던 나 때와 다르게 (?) 참 건강한 취미를 가졌구나 칭찬의 말이 흘러나온다. 한가득 짊어진 짐을 풀고 파티 분위기인 우리 가족 옆엔 젊은 두 남자분이 소박하게 방울토마토 한 봉지로 목을 축이는 듯했다. 그런데 저만치 떨어진 평상에 있던 여자분이 다가와 "제가 토마토가 너~어~무 먹고 싶어서 그런데 제 거랑 바꿔 드심 안될까요?" 라며 에너지바를 내민다. 두 발을 딱 붙이고 서 두 손으로 공손히 내밀며 동그랗게 뜬 눈에 귀여움을 가득 담아 토마토를 득템하고 돌아선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 남편과 눈이 마주치자 주책없이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한다. '안되지, 여기서 웃으면 절대 안 된다!' 필사적으로 막아보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순간까지 떠올려 보지만 이미 늦었다. 큭큭큭 웃음이 터지자 난데없이 순간을 모면해 보고자 옆에 서 있던 아들의 얼굴을 부여잡고 "아이고! 우리 아들 입에 뭘 이렇게 묻혀서 조커 커컥컥커 가 되었구만."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이 커진 아들에겐 미안하지만.
내려오는 길은 수월해서 그런지 힘들게 올라오는 사람들을 둘러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함께 산행 온 강아지부터 슬리퍼를 신고 등반한 외국인 3인방까지 참으로 볼거리가 많은 산이다. 거의 다 내려와 등산로 초입엔 원피스에 구두를 신은 분이 나를 걱정하게 하였으나 뭐 어떤가? 산엔 진달래 꽃만 보러 오는 것이 아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