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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을 Jun 01. 2024

이별 축의금

중학교에 입학한지 2주만에 아들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 9일만에 헤어졌다. 편지를 썼다 "축하한다. 인생에 실패란 없다. 방향 전환이 있을 뿐." 이후 몇 마디 더 붙여서 편지를 마무리하고, 1만원을 넣어주었다. 돈이 크면 상습 이별이 이어질까 두려워 최소한만 넣었다. 학교 가려는 아이 손에 쥐어준다. 다음날 아들이 편지를 서랍에 넣으며 "제 인생 최고의 편지예요."라고 한다. 살짝 윙크를 날렸나? 착각이 들 정도로 달콤한 플러팅이다.


요즘 아이들은 연애를 하고 싶어하고 그만큼 헤어지고 싶어한다. 둘째는 집착왕답게 9일간 진상을 부렸고, 여자는 단호히 이별을 고했다. 아들은 말해다. "내가 괜찮겠어요?"  "응." 다행히 둘째가 이 학교 최단기간 이별 타이틀을 빼앗진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수고했지.


동시에 중3 딸의 교제도 시작되었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딸아이 옆에 앉아 있던 해맑은 얼굴을 마침 남편과 함께 발견했다. 딸은 공부를 하는데 남자 아이는 핸펀을 만지작거리며 내 딸만 바라보고 있었다. 남편이 아연실색하며 독설을 뿜었다. "도서관에서 저게 뭐하는 짓이야. 공부를 해야지" (이하 생략) 흥분한 남편에게 묻는다. "왜 그래?" 남편 말한다. "이상하지. 친구들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난 대체로 남자들에게 공감하는데, 딸을 중심으로 남자를 보는 순간 세상의 남자는 다 박멸해야 할 존재가 돼"


그 아이가 바로 딸아이의 남자친구임이 밝혀졌다. 1살 어린 중2 남자아이. 이 연애가 한동안 화제였다. 내 북클럽에 오는 여자 아이 둘에게 차였고, 딸에게 고백하기 일주일 전에도 고백했다 차였다. 고백하고 차이고가 얼마나 반복되었는지 알 수 없다. 프로고백러에 프로오뚝이가 아닌가. 나는 딸의 남자친구를 거절한 중2 여자아이에게 묻는다. "왜 거절했어?" "악 걔 싫어요." 북클럽을 열고 이토록 한심한 질문은 단언컨대 없었다. 차이기를 밥 먹듯이 해서 이별에 타격이 없는 아이라 헤어질 때 좀 편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주변에서도 놀람 멘트가 들려온다. 중2 후배들은 말한다.


언니가 너무 아까워요.

누나 나중에 어떡하려고 그러죠?

오래 사귀어서 다시는 그런 남자를 선택하지 않는 눈을 키워야죠.


무엇이든 진지하게 성실하게 몰입하는 내 딸, 흑역사도 참으로 성실하게 열정적으로 쓰는 중이다. 하지만 딸아이 남자친구의 장점도 내 눈엔 보인다. 심플한 아이다. 눈치 없고 부풀려서 말하고, 동기들에겐 밉상일 수 있지만 누나가 보기엔 귀엽고 실픔할 데가 있다. 더구나 딸이 속한 학생회 일을 성실히 잘해낸단다. 무엇보다 헤어질 땐 깔끔할 것 같다. 딸이 남자친구를 선택한 이유는 "전 예민한 남자는 딱 질색이예요"이기 때문이다. 내 보기엔 연애가 정말 하고 싶은데 마침 고백을 받았고, 이 정도면 괜찮지 싶어서 사귄 거다. 이 남친은 귀찮은 해바라기 남친에 대한 낭만을 충족시켜주는 데 최적화되어서 더욱 만족스러운 것도 같다.


한 달이 다 되어갈 무렵, 딸은 말한다. '개를 통해서 혼자가 편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24시간 중에 23.5시간 동안 내 생각을 안 해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걔를 좋아하는지 안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언제 헤어질 참이지? 내가 보기엔 최단기간 연애 타이틀을 가져올만큼 파격적인 커플인데 아쉽다. 오늘은 이별하려나? 싶은데, 남친이 계주 대표인데 개빠르단다. 드디어 장점 발견. 이별 연기. 내일은 헤어질까?


그리고 오늘 드디어 헤어졌다. "와 축하해~~" 쌍수 들고 환영한다. 당장 스테이크라도 썰어야겠지만 라이딩 직후라 지쳐서 안 되겠고, 내일 한강에서 축하하도록 하자. 오늘 함께 시간을 보낸 딸아이 친구가 말했단다. "좋아했으면 추억으로 남기고, 그게 아니었으면 경험으로 생각해." 우어, 나보다 훨씬 성숙한 멘트가 아닌가. 그런데 이놈의 연애사는 끊이질 않는다. 헤어짐과 동시에 제비가 박씨 물고 오듯 큐피드의 화살을 받아왔다. 오늘 만난 딸아이 친구가 우리집 둘째를 좋아한다지 않나. 흠. 귀를 씻고 싶다.


사귐도 축하하고 이별도 축하해야겠지만 난 아무래도 당연한 이별에 더 축하를 전하고 싶다.

1. 상대에게 차였다. 마음이 떠난 인간과 더 이상 사귀어서 무엇하나? 계속 이어졌다면 자존감만 깍아먹을 뿐이다. 헤어져야 한다.

2. 내가 찼다. 깔끔하다.

3. 바람을 피웠다. 확실한 이별 사유가 있으니 고민할 필요가 없고 좋다.


큰 아이가 남자친구를 사귄다고 할 때 지인이 말했다. "안 말리세요?" 큰아이 담임 선생님도 말씀하셨단다. "엄마가 허락하셨니?" "네" 라고 딸이 답하자. 선생님 왈. "나라면 허락 안 할 것 같은데."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말릴 이유가 없다. 아이 친구 말대로 추억을 쌓고 경험을 쌓는 일인데 왜 말리겠나. <페르세폴리스>라는 만화가 있다. 이란에서 프랑스로 유학을 갔던 딸이 돌아와 어떤 얼간이랑 결혼을 하겠다고 했다. 엄마는 남편에게 말한다. "왜 말리지 않죠?" 아빠 말한다. "쟤는 얼마 못 가 이혼할 거야." 아빠 말대로 얼마 후 이혼했고 아버지는 반기며 다시 딸의 유학을 지원했다. 나는 딸의 이별 축의금을 마련해야지.


잠들기 전 딸이 말한다. “전 이무래도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남자를 만나야할 것 같아요. 너무 공부를 못히는 건 곤란해요. 눈치 삐르고 똑똑하고 안경 쓰고 눈이 예쁘고 성격 좋은 남지요.“  뭐야 불길하게 구체적이잖아. 누군지 모른척 하고 싶다. 걔 되~게 예민해, 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참는다. 이 연애가 남긴 건 추억보다는 경험인 듯하다. 자신의 이상형을 향한 업그래이드에 파이팅이 넘친다. 시동 끄자마자 걸고 있지 않나. 눈을 감고 싶다. 축하금은 정말 조금만 넣어야겠다.



추신 : 세상 모든 커플의 이별 축하에서 단 한 커플만은 제외하자. 선재와 솔 커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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