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여행기>는 총 4부입니다. 1부 소인국 릴리펏, 2부 거인국 브롭딩낵, 3부 천공의 성 라퓨타, 4부 말들의 나라 후이늠. 영원한 이방인으로 떠도는 걸리버. 온갖 활면스러운 상황에서 적응하려고 애쓰고 왕에게 기꺼이 순응하는 걸리버이지만 쫒겨나길 반복한다. 마지막 휴이넘에선 정말 쫒겨나기 싫었지만 그들 사회의 권고로 강력하게 쫒겨난다.
후이늠은 어떤 사회인가? 걸리버가 영원히 머물고 싶은 유토피아다. 말들이 이룩한 사회이고 인간 야후가 짐승인 나라다. 후이늠의 나라는 이성에 따르는 사회로, 그들의 이성은 감정이나 이해관계로 뒤범벅되고, 그로 인해 깨달음이 모호해지거나 퇴색되지 않는 확고한 이성이다. 의견이란 존재하지 않고 있다면 악 취급을 받는다. 4년에 한 번 회의가 열리면 만장일치로 통과된다. 의견이 없으니 당연하다. 결정사항에 대한 강압은 원고 권고만이 존재한다. 이성이 있다면 당연히 이성적 사고에 따를 수밖에 없으니 굳이 강압이 필요없다.
문자가 없이 오래되고 심플한 관습대로 살아가는 사회다. 공동체를 위해 개인의 감정, 의견, 생각은 필요없고 선택할 필요도 없이 정해진 대로 살아간다. 계급이 존재해서 계급간 결혼이 금지되어 있다. 조너던 스위프트가 자유주의자가 아닌 결정적인 이유이다. 다만 특이하게도 여성도 반드시 교육을 시켜야한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므로.
분명 아비규환인 인간 세상에 환멸을 느끼는 걸리버(조나던 스위프트)에겐 최선의 유토피아이지만 이토록 삭막할 수가 없다. 섹스도 아이를 낳을 때만 합의를 통해 하고, 자식은 공동육아 시스템에서 길러지고, 사랑이라는 단어는 아예 없다. 우정과 박애라는 단어만이 존재한다. 공동체를 위해 개인의 모든 것을 맞춰놓은 세상이다. 이 지독한 염세주의자가 도달한 유토피아는 기계와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삭막한 유토피아이다. 이런 유토피아가 그에게는 최선이었다고 생각하니 서늘한 아픔이 스친다.
조지 오웰은 "세상에 여섯 권의 책만 남긴다면 그중의 하나로 이 책을 고를 것이다."라고 했지만 그의 반동적인 보수성에 경악하며 문학 대 정치의 두 가지 모순된 지점들을 짚어 나간다. 끝내주게 재미있지만 저자의 정치적 태도는 못마땅한 것이다. 그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사실상 전체주의 세계 최고의 단계 즉 순응이 워낙 일반화되어 있어 경찰력이 필요 없는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그 무엇보다 우선 압제로부터 적이며 지적 자유의 투사였다고 추론할 수 있을까?
-그들이 지향하는 바가 육체적인 생명은 유지하되 가능한 한 시체처럼 살아가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똑같은 과정이 무한히 지속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삭막한 휴이넘의 세계는 스위프트가 구성할 수 있는 최고의 유토피아였다. <정치 대 문학 :걸리버 여행기에 대하여>
우리는 오늘 조지 오웰의 관점에 따라 유토피아로 알려진 후이늠을 다른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읽고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