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게 많아 행복하고 힘든 날들
22살의 난, 20살과 21살 때의 힘듦을 딛고 일어나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사람이 되었다. 이러다 번아웃이 올까 봐 걱정도 되기에 나는 밸런스를 찾으려 하고 있다. 워라밸 같은 걸 바라는 게 아니다. 그건 내 기준에서 성공한 후 찾을 생각이다. 지금은 달릴 때가 맞다. 중간중간 쉼을 넣어주며 힘차게 달려 나가 나의 20대를 후회 없이 보내고 싶은 와중, 나는 내 인생의 큰 키워드 세 개를 찾게 되었다. 바로 문화, 예술, 언어다. 나는 현재 어학원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으며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 보컬 트레이닝, 즉, 강사 레슨을 받으며 세상이 빠르게 변하며 교육법도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학교에서 하는 서포터즈 활동을 통해 외국인들과 소통하고 다른 대학 사람들과도 소통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문화와 가치관 차이를 수용하고 관찰하는 법도 깨달았다. 본가에 내려온 후에는 내 지역에 있는 곳곳의 박물관 중 한 곳인 '김해한글박물관'에 가서 안정감을 느꼈다. 그곳에는 내가 글쓰기 주제로 삼았던 한뫼 이윤재 선생님도 계셨고, 다양한 한글 유물들이 그 조그만 공간에 많이도 전시되어 있었다.
스무 살에도 스물한 살에도 나는 이곳에 왔었다. 그때마다 난 중학생 때 행복학교를 다니면서 수많은 프로젝트를 시킨 학교에 불만을 표하면서도 열심히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때의 마음으로 돌아간 듯했다. 내 고향인 김해는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논밭만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짧은 기간 안에 많이 발전해서 문화공간과 필요한 것은 다 생겼고 인프라도 좋아진 곳이다. 특히 박물관과 같은 역사적인 장소가 많은 옛 금관가야의 수도이다. 해반천을 따라 걸으며 고등학생 때의 고민을 흘려보냈었고, 그때 날아오던 철새들을 보며 마음을 달랬고, 많은 전시가 있는 곳들에 이끌리듯 발길을 돌렸었다. 그때부터 아마 나는 문화라는 키워드를 이미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역 신문에 에세이, 시 등을 투고하고 실린 적도 많고 김해시립소년소녀 합창단원 일 때도 있었다. 소프라노였던 나는 '김해'라는 주제의 노래를 편곡하신 지휘자님 밑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정기공연도 섰었다. 예술이라는 키워드는 나에게 안식처였다. 중학교의 영향이었는지 나는 김해 토박이이자, 온갖 김해의 문화공간은 다 꿰고 있었고, 전시회라면 계속 기웃거렸다.
나중에는 입시에 힘을 싣기 위해 거길 나와 특목고 학원을 다녔고, 김해 외고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전부터 초, 중, 고 내내 공통적으로 영어말하기 대회는 꾸준히 나갔고, 상도 타왔다. 나는 만년 2등이었지만 전국 대회 3등을 한 적도 있었다. 상장 모으기가 취미였던 어린 시절, 나는 언어라는 키워드를 손에 꽉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언어를 단 한 순간도 놓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걸어온 길에 관한 자료들을 나도 우리 엄마도 단 하나도 버리지 않고 파일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었다. 수많은 상장과 내가 따로 모은 프로젝트 종이들과 사진, 유인물들, 그걸 보니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왜 그렇게 이때 동안 자책만 했을까 어린 나는 꽤 열심히 살아왔었다. 내 지역을 부끄러워했던 적도 있다. 경상도 사람이라서 교육 수준이나 다른 부분이 낮게 보이는 건 아닌가 걱정도 했었다. 학벌에 대한 열등감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야 보인다. 전부 쓸데없는 생각이었다는 걸 말이다. 나는 이 지역이 좋다. 내 고향이 좋다. 내 고향은 자기대로 열심히 발버둥 치며 잘 자라고 있었다. 나와 함께한 세월도 나에게 내어준 것도 많고 결국에 그 세 가지 키워드, 예술, 문화, 언어는 전부 그 지역에서 얻은 것이다.
나는 내가 살아온 지역을 더 좋고 자랑스러운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돌아오면 내게 집인 이 지역을 나는 사랑한다. 김해도서관에서 내 유년시절의 3분의 1을 보냈고, 힘들 때마다 해반천길을 걸었으며, 영감이 안 떠오를 때마다 김해 곳곳의 박물관과 전시회나 축제를 찾았다. 그 세 가지 키워드를 연결 지어 '국제문화교류전문가'라는 꿈이 나타났다. 이미 쥐고 있던 키워드가 나에게 힌트를 주고 있었다. 나는 송소희 님의 'Not a dream'을 들으면서 작고도 아름다운 내 지역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추억이 많았다. 힘들고도 행복했던 내 시간들이 있는 곳이기에 진주에 있다가도 항시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나는 삼국엔 끼지 못한 가야도 사랑한다. 그 역사를 가장 좋아한다. 그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 정도로 사랑했다. 이 모든 건 도전이라는 작은 점들이 이어져 나타난 길이었다. 아빠는 돈이 되는 길이냐를 물었지만 내겐 상관없었다. 난 하고 싶으면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나는 온기를 느끼고 행복을 느꼈다. 외국인 교환학생들과 소통하면서도 행복을 느꼈고, 지금까지 해온 활동들은 내게 대단한 자산이 되었다. 이젠 보이기 시작한 이 길을 꿋꿋이 걸어보려 한다. 나는 더 이상 가다 멈추지 않는다. 이 길은 내가 스스로 개척한 길이자, 나의 예술이고, 나의 문화이며, 나의 언어다. 지금 내가 걷는 길은 결코 ‘꿈’이 아니다. 현실이고, 내가 살아낼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