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및 삶과의 연결에 대해...
작품과 나의 만남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제 청소년기가 많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만큼 힘든 시절을 보낸 건 아니지만 그들의 마음과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가져다주는 메시지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이야기는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저는 이 학교를 다니기 전, 스무 살에 다른 학교의 문예창작학과를 1년 반 정도 다녔었습니다. 언젠가 ‘다중시점의 영 어덜트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이번을 계기로 제가 추구하던 미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우, 채운이, 소리는 실제로 제가 만난 친구들과 제 자신을 닮아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채운이는 자신이 처한 환경으로 인해 자신이 좋아하던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언어를 숨구멍 삼아 언젠가는 해외로 떠나 살아가겠다고 다짐합니다. 저 또한 17살부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외국어 고등학교를 포기하고 나와 많이도 울었습니다. 학교를 포기한다고 해서 제 인생이 망하는 건 아니었지만 처음에 자부심을 가지고 언어를 배우고자 하는 초기의 제 자신이 떠올라 과거의 제 자신을 아주 오랫동안, 떠나던 날의 교실 문 밖에 세워두고 질책했습니다.
또한 스무 살에 문예창작학과에 가서는 소설 속 지우의‘일상툰(용식 일기)’에 달렸던 댓글 중 하나였던 미래에 대한 안 좋은 전망, 혹은 AI대체 가능성 등을 걱정해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먹고살기 힘들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밥을 빌어먹고 살 생각이냐는 부모님의 질책과 함께, 저는 그 학교를 나왔습니다. 두 번의 포기, 저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습니다. 힘든 상황이 올 때마다 저는 채운이의 어머니처럼 환경만 바뀌고 새 출발을 하면 상황을 모두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과거는 다 잊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제 안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어디를 가도 비슷하다는 것을 스물한 살에 깨달았습니다.
죄책감과 도피, 언어라는 숨구멍
부모님은 그 과정에서 제게 하얀 거짓말을 하시면서 안 힘들다고 제 탓이 아니라고도 해주셨습니다. 거짓인 걸 알고 있었습니다. 저로 인해 더 많이 늙어 가시는 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채운이처럼 저는 가족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망가지는 건 제 자신 뿐이었습니다. 저는 내적인 변화를 끊임없이 갈망했고, 지우와 소리처럼 창작을 시작했습니다. 열일곱 때부터 저는 미친 듯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처럼 글과 언어는 저의 숨구멍이었습니다. 특히 채운이가 영어를 공부하는 모습에서는 제 자신의 얘기처럼 느껴질 정도로 전율이 일었습니다. 저는 영어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온갖 방법을 써서 열심히 공부했고, 재수를 해서 스물두 살에 ‘경상국립대학교 영어영문학부 영문학과’에 왔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어학원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가 이렇게 나아졌고 행복하다고 해서 제 과거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장치인 ‘이 중 하나는 거짓’이라는 게임은 거짓은 다정함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이라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 윤리적인 관점의 기본에서 보았을 때 잘못된 것으로 비칩니다. 타인을 속이는 것은 잘못이 맞습니다. 그리고 거짓말은 대부분 타인을 상처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 속 거짓말은 기만이 아니라 생존의 방식, 다정함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주인공들도 끊임없이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거짓에 의문을 품고 고뇌에 빠집니다. 저 또한 삶에서 하얀 거짓말과 아픈 진실 사이에서 흔들리며 자랐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더 단단해지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제 삶과 닮아 있으면서도, 제가 경험하지 못한 더 무거운 짐을 보여주며 제 시야를 넓혀주었습니다. 소리가 채운에게 채운의 아버지가 곧 회복할 거라고 거짓말을 한 것도, 채운이의 엄마가 채운이를 대신해서 교도소에 수감된 것도, 부모님 어른들의 위로 섞인 거짓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지우의 창작도, 마지막으로 ‘이 중 하나는 거짓이다’라는 게임도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라 살기 위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버티기 위해 불가피하게 등장하는 것들입니다.
소설이 보여주는 공감의 방식 : 거짓에 대한 진심 어린 이해
소설에서 아이들은 아이가 겪기에는 너무 벅차 보이는 힘듦을 짊어지고 좌절하기도 하지만 버팁니다. 그리고 세 아이들은 서로에게 거짓으로서 위로가 되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각자의 힘듦의 형태는 다 다르니까요. 그저 비밀을 가진 사람을, 거짓을 말해야 하는 사람의 처지를 서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자신의 아픈 곳을 말하기 싫어하는 사람들, 더 굳세게 버티기 위해 숨기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의 거짓말을 알면서도 덮어주기도 하고 속아주기도 합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건네는 부모님,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려는 부류의 사람들이죠. 다 알면서도 넘어가주는 경우는 상황마다 감동이 되기도,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소설 속 아이들도 다 느끼는 부분이죠. 저 또한 느꼈습니다. 성인이 되고 나서야 예전에 제게 화를 내지 않고 토닥여준 이들의 의도를 깨닫게 되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채운이가 아버지에 대해 느끼는 양가감정이 인상 깊었습니다. 가정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가족이라는 울타리라고 생각해 죽진 않길 바라는 그 애착은 마음을 아리게 만들었습니다. 청소년의 입장에서 너무 가혹한 설정이라고 생각되지만 누군가에게는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더 무거워졌습니다. 우리는 타인에 대해 백 퍼센트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얘기를 하기 싫어하거나, 얘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공감은 할 수 있습니다. 공감한다는 것은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고 속속들이 아는 게 아닙니다. 공감은 그 사람의 처지에서 그 사람이 허락하는 한에서 점점 알아가려고 노력하고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는 것입니다. 세 아이의 관계에는 그런 제대로 된 공감이 살아있습니다.
사회와 연결된 소설 속의 공감이 주는 교훈
저는 상대가 준비가 되면 들어줄 준비가 항상 되어 있습니다. 숨기고 싶은 진실을 밖으로 보이는 거짓을 그저 직시하며 미소를 띨 뿐입니다. 편안하게 다가오길 기다리면 상대도 그걸 느끼고 다가와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때론 어떤 사람들은 오지랖이라고, 거짓을 말하는 것은 마음을 닫고 더 이상 대화하기 싫은 것이라고 단정 지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그것 또한 우리는 지레 짐작할 뿐입니다. 소설 속 세 아이는 각자 숨구멍을 찾으며 각자의 활동에 몰두하지만 결국 그 아이들을 지켜준 것은 자신의 거짓조차 괜찮다고 해주는 서로의 공감이었습니다.
그 공감은 그들의 생존 방식이자, 사회에 대한 뼈아픈 경고이기도 했습니다. 솔직함이 어쩔 때는 독이 되고,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는 사회에서, 자신들이 처한 지옥에서 차라리 거짓이 더 도움이 된다는 걸 습득한 거겠죠. 자신들만의 방어기제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감당할 수 없는 힘듦을 겪을 때 자기 방어를 위해 거짓으로 요새를 짓습니다. 스스로를 속이든 남에게 거짓말을 말하든 다양한 방법으로 말이죠. 그게 잘못되기만 한 걸까요. 이 작품은 거짓이 때로는 서로의 숨을 지켜주기 위한 다정한 방식일 수 있음을 일깨웁니다. 거짓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해 준 이 작품에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